1. 프롤로그: 니체를 읽는다는 것

니체를 읽는다는 것은 익숙한 사고의 틀을 흔드는 경험이다. 키워드 대부분과 그것을 설명하는 말조차 일상적인 쓰임과는 의미가 달라서 많은 공을 들이게 된다. 각주도 읽고 해설도 찾아서 읽는 식이다.

1부의 7장 “읽기와 쓰기에 대하여”를 읽은 뒤에는 “나는 왜, 무엇을, 어떻게 읽고 쓰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이 따라온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는 전체적으로 난해하고 도발적이다. 7장도 1/5정도만 읽기와 쓰기에 대해 얘기하고 나머지는 어떻게 사느냐에 대한 얘기로 채워진다. 그 불편함을 견디면서도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유익은 있어서 독후감도 여섯 편째 쓰고 있는 이 아이러니란.

2. 니체가 말하는 ‘읽기’와 ‘쓰기’란?

1부 7장에서 니체는 글쓰기와 읽기의 본질을 파헤친다.

“나는 모든 글 가운데서 자신의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 써라. 그러면 그대는 피가 정신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에게 글쓰기는 ‘피’로 하는 치열한 행위이다. 읽는 이 역시 단순한 수용자가 아니라, 저자의 고통과 사유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글쓰기와 읽기의 진입장벽을 ‘산봉우리’만큼이나 높인다.

“잠언은 산봉우리여야 한다. 그러므로 거대하고 높이 자란 사람들만이 잠언을 들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글을 잠언이라고 높이는 동시에 읽을 자격이 있는 사람을 엄격하게 제한한다. 이는 기존의 권위를 타파한다는 앞선 논지와는 모순된다. 오히려 쓰는 이 자신의 기준과 권위를 앞세우는 오만불손함으로 읽힌다.

하지만 니체의 난해함이 단순한 권위주의는 아니라는 해석이 많다. 기존 철학 언어의 한계와 인간 존재의 복잡성을 실험적으로 드러내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그는 언어의 불완전함을 일부러 드러내고 독자가 각자 자신의 삶에 맞게 해석하도록 여지를 남겼다는 견해도 있다. 즉, 난해함은 독자를 수동적 소비자가 아닌 능동적 해석자, 창조자로 만들려는 시도라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김상환, 이진우 등).

3. 누구를 위한 글쓰기인가

글의 본질은 결국 ‘소통’에 있다. 글쓰기는 자기 표현인 동시에 타인과의 만남이고 정보와 지식의 사회적 환원이다. 아무리 깊은 사유와 치열한 자기 성찰이 담겼다 해도, 독자한테 닿지 않는다면 그 글의 쓸모는 반감된다.
니체의 은유가 난무하는 난해한 문체는, 독자에게 “이해 못하면 네 탓”이라는 배타적 태도로 읽힌다.

“읽는 이가 게으르면, 글쓴이 역시 더 이상 독자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 구절은 독자와 글쓴이 모두의 책임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소통의 벽을 높이는 논리로도 읽힌다.

교회 권사님께서 띄어쓰기 하나 없는 긴 문자 메시지를 가끔 보내셔서 권사님의 노안을 걱정했었는데, 그분께서 나중에 하시는 말씀이 꼼꼼히 읽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그 이유를 듣고 당황스러움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나도 이미 노안이 시작되었는데 말이다.

게으른 독자가 되지 않게 하려고? 니체의 쓰기가 맞다면 그 권사님의 띄어쓰기 없는 쓰기도 옳은 일이 된다. 쉬운 말로 쓸 수 있는 것을 굳이 어려운 말로 쓰는 사람을 보면 꼭 행위 예술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해하든 말든 그 자체가 예술이 되는 어떤 현대 예술처럼 말이다.

4. 텍스트 난이도, 그리고 온당한 쓰기

글은 다양한 방식으로 평가되는데, 텍스트 난이도라는 객관적인 평가 척도가 있다. 평균 문장 길이, 어휘의 난이도, 문법적 복잡성 등 다양한 요소를 수치화하여 글이 얼마나 읽기 쉬운지, 이해하기 쉬운지를 측정한다.

대표적으로 미국에서 널리 쓰이는 Lexile 지수가 있다. 이 지표는 텍스트와 독자의 읽기 능력을 동일한 척도로 수치화한다. 문장 길이와 어휘의 빈도, 문법적 복잡성 등을 분석해 0L 이하부터 1600L 이상까지 점수로 표시한다. 예를 들어, 미국 초등 고학년~중학생 대상 교과서는 600L~1000L 수준이며, ‘Harry Potter’ 1권은 880L로 미국 초등 고학년에서 중학생이 읽기에 적당한 수준이 된다.  

미국의 대부분 주의 출판계에서 이 지수를 도입하고 있고, 읽기 교육에서 독자와 텍스트의 Lexile 지수를 비교해 적정 난이도의 읽기 자료를 선택할 수 있도록 돕는다. 미국에서 출판된 책을 살 때, 뒷표지의 가격 근처를 살펴보면 숫자와 함께 ‘L’로 표시된 Lexile 지수를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 난이도 평가만으로 글의 가치를 재단할 수는 없다. 때로는 예술적·철학적 실험이나 개성적 표현이 난해함을 필요로 할 수도 있겠다.

니체를 읽으면서 저 평가 척도에 은유의 빈도 요인도 추가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은 은유의 빈도를 자동으로 계량하는 것이 어렵지만 말이다. ‘춤’, ‘장미’, ‘산봉우리’, ‘마귀’… 이 책에서는 사전적 의미로 쓰인 말, 즉 은유가 아닌 명사를 찾기가 오히려 어려울 지경이다.

5. 에필로그: 깊이와 쉬움 사이의 줄타기

니체의 책이 전하는 사유의 깊이는 이미 한 세기 넘게 칭송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저자의 오만함, 자기중심적 태도, 그리고 독자에게 요구하는 과도한 문턱은 결코 지지할 수가 없다.

진정한 깊이는 쉬운 말로도 충분히 전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지나치게 단순한 언어는 복잡한 현실이나 철학적 문제의 다층성을 평면화할 소지가 있다. 쉬운 말로 풀어 쓰는 과정에서 정밀함이나 미묘한 차이, 본질이 손상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쓰기에서 깊이와 쉬움을 동시에 추구할 수는 없는 것일까? 

“사람은 분노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웃음으로 죽인다. 자, 우리 중력의 영을 죽이자!”

이 두 문장은 철학적 사유의 무게와 가벼움을 동시에 보여준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로, 깊이와 쉬움, 실험과 소통, 진지함과 유머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깊은 생각을 쉬운 말로 풀어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더 많은 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온당한 길이라고 믿는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오늘도 나는 좀 더 의미 있는 글을 좀 더 잘 읽히게 쓰기 위해 고심한다.

——

읽은 책:
프리드리히 니체 저, 백승용 역(2022),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사색의 숲(각주가 많아서 좋음)
프리드리히 니체 저, 이진우 역(2020),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휴머니스트(번역문이 쉬워서 좋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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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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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가들은 독자들을 평가절상 하는 면이 있는것 같아요. “이 정도는 얘기 안해도 다 알겠지~”라는 생각에 배경지식을 생략하고 저술을 시작해버리니… … 그러한 부분이 참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는것 같아요. 오늘도 공부에 대한 꾸준한 열정에 감탄하며 독후감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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