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의 안화동은 곤혹을 치르면서 점차 성숙되어 갔다.

계획대로 5월 말까지 서있던 버스를 살려냈고 워터 펌프가 고장났던 닛산 승용차도 수리가 다 되여 89호 번호판을 달고 다녔으므로 사업용 차 3대까지 총 14대의 차가 움직일 수 있게 되어 차 문제는 걱정 없게 되었다. 이제 이 것을 기반으로 더 많은 발전을 기해야 했다.

자체의 노력이 많이 필요했지만 나라적인 지원에서도 적지 않은 혜택을 보게 되었는데 그 주요한 실례로 중조 두 나라가 각기 훈춘-나진 도로 중의 자기 나라 쪽을 새로 만들거나 보수를 잘해준 거였다.

중국 쪽에서는 훈춘의 교외로부터 두만강 교두까지 39키로 구간을 새로 닦기 시작했는데 험한 대반령 고갯길을 버리고 1,400미터가 넘는 터널을 만든 외에도 300미터 짜리 터널도 하나 더 만들어 거리를 4키로 정도 단축시킨 새로운 포장 도로 공사였고 나진에서도 우리 회사 쪽에서 선봉으로 통한 도로를 계속 쓰는 전제 하에서 골짜기 동쪽에 새롭게 도로를 만드는 공사를 벌였으며 늦여름부터 선봉-원정 구간을 보수하는 작업을 경상적으로 해주어서 교통 문제는 이제부터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중국의 포장 도로는 이듬해 연말에 정식으로 통차 되었기에 시간적으로 한시간 가까이 절약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원래의 위험을 많이 제거하였고 조선 측의 도로 보수도 두 나라를 오가는 기사들의 아우성을 많이 막아 주었다.

편리한 조건은 두 나라에서 공동의 이익 때문에 많이 만들어 주었으며 그에 힘입어 무역 거래가 더욱 더 활기 띠게 되었고 우리 회사를 비롯하여 적지 않은 투자자들이 나진에서 사업을 성공에로 이끌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모부는 담판의 여가에도 부업을 등한시하지 않았다. 세관 신고원으로서 정화의 일이 점차 많아지게 되었다.

수백 가지나 되는 수입품에 대한 세관 신고 서류를 작성하고 승인 서류를 받는 데까지 다 그녀의 업무 범위였고 수입품이 도착되면 나진에서의 검사 절차도 그가 뛰어다니면서 밟았고 훈춘 식구들이 나진으로 다니는데 필요한 초청장의 청구 서류도 그녀가 만들어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콘테이너를 한 트럭이 10톤 정도의 수입품을 싣고 나진에 가면 종합 검사장이 없었기때문에 여러 부문의 사람들을 회사에 불러와서 물건을 하나하나 부리면서 확인받는 것이 상례였다.

다른 회사에서는 사업차가 없어서 부득이 트럭에 수입품을 실은 채로 동식물 검역, 대외 상품검사소, 세관, 통행 검사소 등 부문에 한곳 한곳 들려서 관련된 사람을 비좁은 운전실에 4~5명씩 싣고 하차 장소까지 데려왔지만 우리는 일단 트럭은 세워놓고 사업용 차(86호, 88호, 89호) 석 대 중 한 대를 사용했기에 아주 편리했다.

세관과 통행 검사소는 나진항 안에 있었는데 외국인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했기에 세관 신고원 증명서(자격증)가 있는 정화가 차에 앉아 출입문 앞에까지 간 다음 걸어 들어가서 검사원들을 데려 내왔으며 검사가 끝나면 역시 우리 차로 다시 실어다 주었었다.

그때까지 다섯 식구중 용철이와 나를 제외한 세 명은 나진에서 운전 면허를 받았으므로 그 세 명중 한명이 차를 운전했고 자 달린 차들은 중국 면허로는 운전이 허락되지 않았었다. 국제 면허증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조선의 면허로 중국의 차를 운전하는 것도 국경 지역의 중국 내에서 허락되지 않고 있었다.

자금 문제로 수입품을 얼마 나르지 못했지만 세관 신고를 달마다 할만한 걸 다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걸 내가 모르고 있으면 안된다. 드문히 내가 직접 원정에서 수속을 해야 했는데 신고서에 없는 물자를 실었을 때는 원칙상 퇴송했지만 원정이나 나진에서 얼렁뚱땅 넘어가는 것으로 하차하는 데까지 성공을 했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많은 눈이 보고 있는 데서 내놓고 하는 밀수였기 때문에 나와 정화는 항상 긴장해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모부는 침착하게 대처하군 했었다.

또 신고서에 승인된 물자도 누계로 그 수량이 초과되여도 안되었고 유효 기일이 지나도 안되었다. 그래서 신고서 보유 정형과 유효 기일은 언제나 확인해야 했으며 그 때문에 나진에서의 검사절차가 다 끝날 때까지는 긴장함을 몰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중국 쪽 교두에서의 검사는 엄하지 않았기에(사실은 안면때문에 그냥 보내주는 경우가 많았음) 긴장감이 늦추어지긴 했지만 인수원 노릇을 하는 동안 그 긴장함으로 하여 어떤 날엔 밤잠을 설치면서 이튿날의 출국에 신경쓰기도 했었다.

그나저나 몇번의 수입품 운수로 초창기의 자금 위기를 만구한 것만은 의심할 바 없다. 세번째 차가 나갈 때 이모가 잠깐 다녀오기도 했다.

5월 20일 경이라고 기억되는데 며칠 동안 의논을 하더니 훈춘 식구들을 더 내보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여 식모가 나가서 일이 많아진 정화의 주방장일을 넘겨 맡고 둘째 이모부가 하던 자금 관리도 부기장이라는 직무를 가진 중국 사람이 해야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외숙모와 우리 집 숙모가 6월 초에 나진에 나갔으며 수리해낸 89호를 영철이의 친구인 종수한테 팔기로 했으므로 종수도 5월 중순부터 나진에 다니기 시작해서 6월초에는 안화동의 훈춘 식구가 8명이 되었던 것이다.

차영감도 다시 건설 일을 시작했다. 지난해에 늦은 시간에 회사 건물을 지었기에 채 완성되지 못한 부분을 끝내야 했기때문이었다.

차영감의 건의를 받아들여 배 한척를 만들고 있었는데 길이가 10미터 정도이고 디젤 엔진을 4마력 짜리로 달아주어 먼 바다까지 갈 수 있게 한다 했다. 오라지 않아 낙지철이 되면 잡아서 말리워 팔아도 되고 미역을 건져서 말린 후 팔아도 그 수입이 짭짤하다는 것이다. 이모부는 많은 일을 겪어보았지만 유독 바다 일은 처음이었고 차영감이 한 말에 일리가 있는 것 같아 좇기로 했던 것 같다.

건물과 배 만드는 일로 차영감은 분주히 보내기 시작했는데 나진에서 고기 잡이에 귀신이라고 불리우는 김송길 영감을 데려왔고 철도 승무대와 단련대의 일군들을 지휘하면서 건설 일을 다그치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회사 건물은 이 두 기업소에 일을 맡기고 있었는데 철도 승무대는 차영감의 아들이 대장을 맡아보고 있었고 단련대는 우리 회사에서 음료수로 사용하는 샘터에서도 골짜기 안으로 200미터 쯤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과오를 범한 사람들을 무보수 일을 시키면서 교육하는 곳으로서 남자들은 낮에 일하고는 단체적으로 식사하고 숙소에서 합숙하고 있었으나 여자들은 낮에 일을 한 다음 저녁에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장사하다가 단속된 사람, 그리 중하지 않은 교통 사고를 저지른 사람, 남녀 관계가 문란한 사람 등 경범죄를 다스리는 곳으로 이해하면 된다. 그 엄격한 기율은 군대 못지 않아서 아침에 줄을 지어 혁명적 노래를 부르면서 일터에 나갔고 저녁에도 열을 짓고 공구들을 총처럼 메고 돌아갔는데 일솜씨가 서툴긴 했지만 건설 비용을 줄이기 위해 불러 온 것으로 나는 이해하고 있었다.

하여튼 지하수 자원이 풍부하고 더우기 골짜기 쪽이어서 초겨울에 지은 후 채 마르지 않은 건물이 벌써 벽체에 금이 가지 시작했고 그 정도에서 계속 도장 작업에다가 슬레이트 올리기 작업 등 마무리 작업을 하는데 회사 구내는 그야말로 시장터 격이었다. 특히 슬레이트는 지난해 겨울 세찬 바람에 많이 벗겨져 나가서 6월 중순 장마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작업을 끝내야 했고 그래야만 도둑 방지도 효과적으로 할 수 있었다.

경비도 두 명이 새벽 한시를 기준으로 교대하면서 보고 있었으나 그 유명한 도둑 솜씨는 귀신도 울고 갈 지경이어서 경비들이 밤 시간에 미처 방비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퍼런 대낮에도 쥐도 새도 모르게 하는 자들이 너무 많아서 작은 부품으로부터 시멘트, 슬레이트까지 크고 작은 걸 닥치는 대로 도둑질해 갔던 것이다.

나의 기억에는 숱한 도난 사고를 당하고 있음에도 신고는 단 한 번밖에 하지 않은 것으로 남아 있다. 현장에서 잡을 때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놓아주고 말았으며 그 때문에 경비도 여러 번 바꾸었고 지어는 배터리를 도둑 맞혀 차가 노선에 못 나가는 난감한 때도 한두 번만 겪은 것이 아니었다.

파종 철이 되여 내가 배추, 상추, 호박 등 씨들을 내갔는데 5월에 차가 노선에 나가지 못했으므로 차장들이 인분 작업을 하고 회사 건물 뒤의 생땅을 번져서 심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기에 흙보다도 돌이 더 많은 나진 땅에서 농사가 잘될 리 없었지만 야채를 국경 넘어 실어 나르는 노고를 덜 수 있었으므로 해볼만한 일이 라고 생각되어 한 노릇이었는데 배추, 상추와 마늘 잎을 조금 먹어본 외 나머지는 전부다 도둑 맞혔으므로 이듬해에는 야채 농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수리반에서는 골짜기 깊숙한 곳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회사 앞의 냇가에서 물고기 잡이를 하기도 했다. 냇가에 불을 지펴놓고 하는 천렵은 우리 훈춘 식구들한테 너무나도 아득한 옛일로만 기억되는 것이었으나 나진에서는 일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휴식의 한때를 보내는 시간을 갖게 했으며 무미건조한 생활에 이채를 돋구어 주었다.

가끔 장마당(나진시장)에 나가 섭조개를 사오고 우리 쌀을 퍼내다가 죽도 끓여 먹었는데 냇물에 끓인 섭죽 맛은 또한 일품이어서 일에 지친 우리 마음과 몸을 덥혀 주는 좋은 음식으로 지금도 기억에 뚜렷이 남아 있다.

그렇게 초창기의 가장 간고했던 시기를 보내는 중에 회사는 서서히 변모해가고 있었다.

외국인들이 나진에 투자한 사업체 가운데서 가장 성공한 몇 개 가운데의 하나로 부상하기 위한 튼튼한 기반을 이 시기에 닦아 놓았고 나진시에서 무시할 수 없는 외국인 기업소로 될 때까지 이 시기에 단련된 회사 식구들은 그처럼 어려운 여건 속에도 살아 남을 수 있다는 신심을 수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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