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그날 밤 서은은 드디어 염라대왕을 만날수 있었다.

딱딱한 침상때문에 잠이 오지 않아서 이리뒤척 저리뒤척 하고 있을 때였다. 비몽사몽간에 누군가가 어렴풋이 자신의 침상옆에 서있는 듯 했다. 그녀가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나자 그 그림자는 어느새 방문을 나서고 있었다.

궁녀들은 모두 잠들었는지 기척이 없었다.

그녀는 그 그림자를 따라 침소를 나선후 궁궐 깊숙한 곳에 이르렀다. 어화원이라 쓰여진 편전이 보였고 그 안쪽에는 한 사람이 뒤짐을 지고 서있었다.

어스름한 달빛을 빌어 그 사람의 정체를 확인한 그녀는 급히 앞으로 다가섰다.

“염라대왕…대왕님, 드디여 오셨군요.”

그녀에게 돌아선 염라대왕은 웃는 듯 마는 듯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기다렸느냐.”
“그럼요…세상에…절 이런 곳에 버려두시다니…대왕님께선 그때 절 인간세상으로 돌려보낸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여기가 인간세상이 아니었더냐?”

염라대왕은 빙그레 웃었다.

“난 너를 돌려보낸다고 했지, 네가 살던 그 시간대로 돌려보낸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럼…”

말장난이 분명한 걸 알면서도 그녀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왜 하필 저를 여기로 데려온 건가요?”
“네 명이다. 이는 사백여년전에 정해진 명수로서 나로서도 어떻게 할 방도가 없느니.”

그녀로서는 염라대왕의 말이 여전히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럼 전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하나요? 제가 온 세상으로는 돌아갈수 있는 건가요?”
“돌아가고 싶으냐.”

염라대왕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였다. 그런 얼굴이 이젠 그녀에게는 야속하기 보이기 시작했다.

“당연하죠. 제가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 건데요…여기는 제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걸요.”
“그럼 좋다. 내가 시키는대로 한다면 돌아가게 해주겠노라.”
“돌아갈수 있는 건가요?그럼 뭐든지 분부만 내려주세요.”

그녀가 드디어 활짝 웃었다. 염라대왕은 그런 그녀에게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우선, 천기를 누설하지 말거라…본시 너에게 맹강탕을 먹여야 하는 건데 그놈들이 법도를 어겼다. 그러니 너는 여기에 있는 동안 네가 아는 모든 것을 함구해야 할 것이다…네가 아는 역사의 흐름과 결과 그 모든 것들을…알겠느냐?”
“네.”

그녀의 고분고분한 대답에 염라대왕은 한시름 놓인 표정이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미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왜 그런 눈빛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잠시후에 풀렸다.

“그리고…넌 한 남자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너에게 향한 그 사람의 온전한 마음을. 그것이 바로 네가 네가 속한 세상으로 돌아갈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염라대왕의 말에 그녀는 한껏 미간을 찌푸렸다.

“그 사람은…저랑 그 어떤 전생의 인연이 있는 사람인가요?”
“그렇다.”

그녀의 머리속에 서서히 한 이름이 떠오르고 있었다. 설마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사람이…이여백인가요?”
“그렇다.”

그녀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의혹에 찬 눈빛으로 염라대왕을 바라보았다.

“제가 알기론, 이여백은 이미 부마자리를 거절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 사람의 온전한 마음을 얻을수 있는가요? 이건 대놓고 저보고 돌아가지 말라는 말씀이 아닌가요?”
“무엄하도다. 이미 정해진 명이거늘 어이 그리 왈가왈부하느뇨.”

염라대왕의 느닷없는 노기에 어화원에 싸늘한 바람이 불어들어왔다. 하지만 서은도 지지 않고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이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제가 왜 여기 버려졌는지도 알지 못하는데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길은 한 남자의 온전한 마음을 얻어야 하는거라니요…제가 왜 생면부지 남자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건가요? 사람 마음이 그렇게 쉽게 움직여지는 것도 아닐뿐더러, 순수한 의도가 아니고 다른 목적이 섞인 마음으로 다른 사람 감정 대하는 일 따윈 제가 싫어요.”
“네가 벌려놓은 일이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은 니가 수습해야 하느니라.”

염라대왕의 아리숭한 말에 그녀는 또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또 무슨 말씀이신가요? 제가 벌린 일이라니…”
“똑똑히 설명해주마. 너는 지금 너의 전생을 덤으로 살고있는 것이다.”
“덤…”
“그렇다. 서안공주는 너의 전생으로서 수은을 삼킨 후 명부로 왔고 명부 생사부에는 아직 2년이란 수명이 남아있다. 그런데 그 아인 슬픔과 고통만으로 기억되는 이 인간세상에 되돌아오기 싫다고 하는구나.”
“…”
“하지만 명부에서는 그 2년을 빼앗을 권한이 없다.”
“그래서요. 제 명수를 마음대로 정할 권한은 있군요.”

그녀의 빈정거림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염라대왕은 뒷짐을 지고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래서 너의 후생의 두달이란 시간을 빌렸다. 후생의 두달은 전생의 2년이다. 2년 후에 돌아가면 여기의 모든 것이 회복될 것이다. 명부의 원칙에 따르면 너는 너의 전생이 저지른 일을 수습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니라.”
“…”
“일이 다 무탈하게 진행되었지만 유일하게 빠뜨렸다면 맹강탕이니라.”
“그래서 제게 이런 당부 하시러 오셨군요.”

그녀는 허구프게 웃었다. 그녀는 염라대왕이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명부의 원칙이란 말인가.

“제 삶을, 고작 저의 전생이 고집을 부린다는 이유 하나로 명부에서 마음대로 정하려는 건가요? 명부에서 할 일은 우선 먼저 서안공주를 설득해 인간세상으로 돌아오게 하는 게 아닌가요?”
“명부에서 그 수순을 밟지 않았는 줄 아느냐.”

염라대왕은 소매를 떨쳤다. 어화원의 나무들도 우수수 흔들렸다.

“허나 네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게 뭔데요?”
“자고로 자결로 목숨을 끝낸 사람은 1겁이 지나기 전엔 후생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서안공주는 18층 지옥의 고초를 겪는 것으로 네게 후생의 기회를 주었느니라. 그만큼 서안공주의 마음을 가여이 여겨 명부에서 따로 기록한 부분이니, 이 2년의 공백시간은 후생인 네가 채워줘야 하지 않겠느냐.”

그녀는 여전히 의혹이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쌀쌀하게 말했다.

“제가 만일 천기를 누설한다면요? 전 만력황제에게 명나라가 3대이후 멸망할 거라고 알려주고 요동총병 이성량과 이여백에겐 더 이상 요동지역 전쟁으로 동분서주하지 말라고 알려줄 거에요. 어차피 누르하치와 홍타이지가 명을 망하게 하고 청을 세울 거니까요.”
“네가 감히…”
“네. 감히 제가 그리 할 겁니다.”

그녀는 염라대왕을 주시하며 말마디에 힘을 주었다.

“명부에서 이렇게 나온다면 저 절대 여기서 가만히 있다 가진 않을 거에요.”
“무엄하구나. 네 감히 역사의 순리를 거스르려 하다니, 그 후과를 감당할수 있겠느냐.”

염라대왕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서은은 그런 염라대왕을 바라보다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저는, 현대에서 연극영화과를 다니고 있지만 원래는 사학과 지망했을만큼…역사를 좋아하고 역사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무슨…뜻이냐.”
“그만큼 제 역사지식을 허술히 보지 말라는 얘기에요.”
“…”
“만일 제가 만나게 될 이여백이 명 요동총병 이성량의 아들이라면 그와 누르하치와의 모순은 불가피하게 되겠죠?이왕 이렇게 된바엔 전 그들에게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들을 다 알려주어서 대왕님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게 만들 거에요.”
“역사의 순리는 그 어느 누구도 거스르지 못한다. 그리고 천기를 누설한다면 명부뿐만 아니라 상제마저도 널 용서치 않을 것이다 .”

염라대왕은 눈을 가늘게 뜨고 냉랭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한참 그녀를 응시하다가 분연히 몸을 돌렸다.

“내가 너라면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고 돌아길 길이나 모색하겠노라. 어느 것이 네가 할 선택인지 잘 생각해보거라.”

염라대왕은 이 말을 끝으로 가뭇없이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방향으로부터 싸늘한 바람이 불어왔고 서은은 한참이나 멍하니 그 자리에 서있었다.

……

염라대왕이 다녀간후 서은은 침식을 잊고 깊은 사색에 잠겼다. 황당한 이 이야기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했지만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나가야 할지 그녀로서는 막막하기만 했다. 그녀가 다시 식음을 전폐하자 령이는 무척 불안한 모습이었다.

“공주님, 아직 옥체 미령하시온데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폐하께서는 꼭 조서를 내릴 것이옵니다.”
“조서? 무슨 조서?”
“이여백도련님께 허혼을 하는 조서 말이옵니다.”
“…”

그녀는 무심히 돌아누웠다가 다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섬광처럼 스치는 그 어떤 생각에 그녀는 더이상 지체할수 없었다. 자신이 돌아갈수 있는 고리가 이여백에게 있다면, 무슨 방법을 대서라도 우선 그를 만나봐야 했다.

그의 마음을 가져야만 현대로 돌아갈수 있다는 염라대왕의 말은 허황했지만, 그를 만나면 그녀가 돌아갈수 있는 그 어떤 방법을 제시해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버진 이런 일에 어떻게 대처했을까?”

그녀는 아버지의 모든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릴때부터 그녀의 눈에 비친 아버지의 모습은 그녀에게 엄격하게 요구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세상만사를 꿰뚫고 있는 지혜의 화신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녀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인생의 멘토 같은 존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원했던 사학과 대신 연극영화과를 선택하자 아버지는 그녀에게 크게 화를 냈고, 그녀가 대학 다니는 동안 줄곧 그녀에게 연극영화과를 포기하라고 요구해 왔었다. 심지어 사고 당일 낙마하기 직전까지 그녀와 불유쾌한 통화를 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아버지라면 조언을 해주실수 있을텐데…”

그녀는 길게 한숨을 쉬면서 다시 침상에 눕다가 아까부터 자신의 눈치를 살피던 령이가 침전을 나가는 것을 보았다.

잠시후 령이를 따라 만력황제가 총망히 서은의 방에 들어섰다.

“서안아.”
“네…오라버니.”

그녀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다가 문득 현기증이 나서 령이의 부축을 받았다. 만력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네 정녕 이 오라버니 가슴을 갈기갈기 찢을 작정이더냐.”
“오라버님, 그게 어인 말씀입니까. 성심을 어지럽혀 송구할따름입니다.”

염라대왕에게 자신의 전생이 서안공주인 것을 들은 후부터 그녀는 이 고대 생활에 잠시 적응해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녀의 자연스러운 고대 말투를 듣자 그동안 침울해보였던 만력의 표정이 조금 펴졌다.

“서안아…우리사이에 그런 허례허식은 삼가하라 하지 않았더냐.”

그녀가 말없이 고개만 숙여보이자 만력은 또 한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혹여 네게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생긴다면 짐이 무슨 면목으로 이태후마마를 뵙는단 말이냐. 마침 자수사에 계시니 이번 일은 아직 흘러나가지 않게 궁인들을 단속하였다만. 만일 태후께서 아신다면 얼마나 통탄할 일이더냐.”

그녀는 여전히 아무 말없이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만력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그 어떤 결심이라도 내린 듯 말을 꺼냈다.

“내일 조서를 내리겠노라.”
“네에?”

그녀는 머리를 들었고 만력은 허탈하게 웃었다.

“신과 무과장원 이여백에게 관직을 내리고 공주와의 혼약을 받아들이라는 조서를 내리겠다. 네가 원하는 게 이것이 아니였더냐.”
“아니되옵니다. 오라버님…”

그녀는 화뜰 놀라 거절했다. 분명히 돌아갈수 있는 이여백의 마음을 가지는 방법이라 염라대왕이 말했지만 그런 방법이 너무 치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뭣이 안된다는 거냐.”

만력이 의혹어린 시선을 보내왔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가지 적당한 이유를 생각해냈다.

“이여백은…이미 경성을 떠나지 않았습니까.”
“아직 망강루 주점에 머물고 있다는구나. 짐이 조서를 내리면 제 감히 황명을 거역할소냐.”
“황명으로 그 사람의 마음을 강요하는 건 원치 않사옵니다. 그리고 오라버니께서 이 일로 심려하시고 성심에 내키지 않는 조서를 내리시는 것 또한 원치 않사옵니다.”

그녀의 말에 만력이 길게 침묵했다. 그녀는 침상에서 내려선후 만력에게 만복(万福)의 예를 행했다. 그녀의 정중한 예에 만력은 손을 저었다.

“몸이 쾌치 않으니 이런 예는 그만두래도.”
“오라버니께 외람되이 한말씀 올리려온데 들어주시겠습니까.”
“말해보거라.”

그녀는 시선을 들어 만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난 몇일동안 계획했던 일을 진행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조서를 내려주시옵소서…”
“…”
“다만…허혼의 조서가 아닌, 제가 이미 죽은 걸로 반포하는 조서를 내려주시옵소서. 오라버니.”
“그건…무엇때문이냐.”

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만력의 놀란 시선을 마주했다.

“제게 솔직하게 말씀해주시옵소서. 오라버니께옵선 그동안 제가 이여백을 연모하는 것에 번뇌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니다.”
“제가 오라버니의 의중을 감히 대신 말씀드리겠습니다. 요동총병은 관직이 정3품에 불과한데 출사도 하지 않은 그 아들은 무과 장원이라 해도 아직은 백신이라 오라버니께서 지체가 맞지 않는 걸로 꺼리시는 것이 아닙니까.”
“…”

만력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녀는 차분한 어조로 그 뒤의 말을 이었다.

“그리고…제가 만일 이여백을 따른다면 저도 요동으로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되겠지.”
“하지만 저는 오라버니께서 제가 멀리 요동지역으로 가는 걸 원치 않으신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
“또한 이미 공주와의 혼사를 거절을 한 이여백을 황명으로 부마를 삼은들 그 사람의 마음까지 가질 순 없지 않겠습니까.”
“…”
“저는 오라버니께서 제가 혹여 그 사람을 따르면 소박이나 받지 않을까 염려하시는 마음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걸 잘 알고있다면서…”

만력이 말끝을 흐린 것은 그녀의 하도 단호한 태도 때문이었다. 그녀는 만력에게 깊숙히 허리를 굽혀보였다.

“허나 저 역시 한번 먹은 마음 변치는 않습니다. 오라버니께서 허락해주신다면 저는 이길로 황궁과의 모든 인연을 끊고 그 사람을 따라 요동으로 가겠습니다. 이러면 서로의 신분의 격차는 없었던 걸로 되지 않겠습니까.”
“서안아…”
“그 사람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가까이 접근해서 그 마음부터 얻겠습니다. 부디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만력은 이마를 찌푸리고 한참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한번 죽은 목숨입니다. 저의 일편단심을 가여이 여겨 허락해 주시옵소서. 그것이 오라버니께서 진정 저를 위한 길이라 사료되옵니다. 부디…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흐음…”

만력은 대답대신 신음 비슷한 탄식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처연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뒷짐을 지고 방안을 잠시 거닐었다.

옆에서 줄곧 듣고있던 령이는 둘을 번갈아보다가 그제야 상황파악을 한 듯 급히 무릎을 꿇었다.

“공주님…정녕 그리 하시겠습니까? 그리하다면 이 몸도 데리고 가주시옵소서.”
“령아, 요동은 험한 땅이다. 궁궐의 생활에만 익숙한 네가 적응할수 있겠느냐.”
“그러는 공주님께서도 금지옥엽으로 그 험한 곳을 마다하지 않으시는데 소인이야 더 말할 것 있겠습니까…소인이 따라가서 공주님을 성심껏 뫼시면 폐하께서도 공주님의 청을 윤허하여 주실 것입니다. 부디 소인을 내치지 말아주시옵소서.”
“령아…”

그녀는 눈물을 펑펑 쏟는 령이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만력에게 시선을 돌렸다. 요동…명조 말기 요동 여러 부족간의 야망에 짓밟힌 전란의 땅…만력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것도 바로 그때문이리라.

만력의 침묵과 령이의 눈물이 오래동안 이어졌고 그녀는 그 누구도 듣지 못하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움직이는 것이 가만 있는 것보다 낫다(以动制静)고 아버지께서 제게 가르쳤잖아요. 저 지금 잘하고 있는 거 맞죠?”

……

이틀이 지난뒤 만력은 다시 서은의 침소로 찾아왔다.

“요동으로 가겠다고 했느냐.”

만력의 얼굴에는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고민을 끝낸 듯한 착잡한 기색이 어려있었다. 서은은 머리를 끄덕였다.

“변방 소수민족들의 부족간 전쟁으로 전란이 빈번한 곳이다. 괜찮겠느냐.”
“죽음도 두렵지 않았는데 한낱 전란을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녀의 의연한 대답에 만력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곧 미소를 거두었다. 적어도 궐안에 있을 동안만큼은 정체를 들키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그녀가 서둘러 궐을 떠나려는 이유에는 이 점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까지는 령이에게서 들은대로 대충 둘러댔지만 만력이 그리 호락호락한 군주가 아님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궐에서는 곧 그녀의 출궁준비로 분주했다. 만력이 하사한 여러가지 물품들이 궁인들에 의해 그녀의 침전에 가득 쌓였다. 서은은 자신이 구경도 못했던 그 하사품들을 둘러보다가 허구픈 미소를 지었다.

“다 거두어서 장농에 보관하거라.”
“네? 가지고 가지 않으시렵니까? 궁밖은 여기와는 다르옵니다.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사온데 행여 노자라도 딸리게 되면…”

령이는 그녀의 처사가 이해 안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령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두렵거든 따라오지 말거라.”
“송구하옵니다.”

령이가 급히 머리를 숙였고 그녀는 작게 미소를 보였다.

“질책이 아니다. 한번 더 생각해보란 말이다. 궐의 생활에만 익숙한 네가 과연 바깥세상에 적응할수 있겠는지…”
“누가 뭐래도 저는 공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령이의 다급한 다짐에 서은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령이는 그녀의 명에 따라 필수품들만 넣어 간단한 행장을 준비했다. 출궁을 하는 그날이 오자 서은은 령이를 데리고 건청궁(乾淸宮)에 가서 만력에게 작별을 고했다.

“오라버니, 부디 용체 보중하옵소서.”
“끝내는 가는구나.”

만력의 얼굴에 서운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만력에게 깊숙히 고개를 숙였다.

“제가 원해서 가는 길이오니 부디 용안을 흐리우지 마시옵소서.”
“궁을 나선 후 어떻게 할지는 생각해 보았느냐.”

만력의 질문에 그녀는 미리 준비한 답을 내놓았다.

“우선 이여백을 찾겠습니다. 오라버니께서 문무과 장원들이 망강루 주점에 묵고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우선 그리로 가서 이여백을 접근하겠습니다. 그 후의 일은 변수를 보아가면서 조심스럽게 대처하겠습니다.”
“짐이 금의위 고수를 시켜 남몰래 네 주변을 지켜주게 하면 어떻겠느냐.”
“아닙니다. 제가 재주는 빈약하나 능히 자신을 지킬수 있습니다.”
“재주?”

만력의 시선이 의아해졌다. 그녀는 자신의 실언을 깨닫고 곧 말을 바꾸었다.

“능히 제 몸은 돌볼줄 안다는 얘기입니다. 오라버니께선 부디 괘념치 마시옵소서.”
“그래…”
“오라버니께서 심려하실까봐 령이까지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닙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령이를 궁으로 보내어 구원을 청하겠습니다.”
“알겠다.”

만력은 몸을 일으켜 용좌에서 내려온후 소매안에서 패물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것을 간직하거라. 위기가 닥치면, 어쩌면 이 옥패가 너를 구할수도 있을것이니.”

그녀는 조심스럽게 옥패를 받아들었다. 옥패의 정면에는 나는 듯한 룡이 그려져있었고 중간에는 만력이란 두글자가 유표하게 새겨져 있었다. 옥패를 품속에 갈무리한후 그녀는 만력에게 다시 한번 깊숙히 허리를 굽혔다.

“부디 용체 보중하시옵소서.”

궐을 나오면서 그녀는 여전히 만력의 일을 생각했다. 태정을 할 황제는 분명 아니였다. 자신이 본 만력황제는 정의를 중히 여기는 듯 했고 국사에도 엄청 심혈을 기울이는 듯 보였다.

1583년, [철혈재상] 장거정이 죽은 지금 만력은 분명 친정을 시작하여 오랫동안 계획해왔던 개혁의 뜻을 펼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알고 있는, 후세에 남겨진 외전(外傳)까지 참고한다면 지금의 만력은 조정의 명망있는 관원들을 죽여서라도 자신의 개혁에 걸림돌이 되는 상대들을 숙청해 나갈 것이다.

“저런 야심을 버리고 태정을 했단 말이지…대체 그 이유가 뭘까.”

만력에 대한 크다란 의혹을 남긴 채 자금성 한끝의 신무문으로 빠져나온 서은은 령이를 시켜 우선 먼저 망강루로 가는 길을 탐문했다. 다행이 망강루는 자금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하지만 둘이 걸음을 재촉해서 주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땅거미가 어둑어둑 지기 시작하는 시각이였다.

경성에서 제일 큰 주점답게 망강루는 멀리서부터 등불이 휘황찬란했다. 궁밖의 길에 익숙치 않은 령이는 벌써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가득했다.

“공주…아니 도련님, 조금만 쉬다 가시와요.”

남장을 한 그녀에게 급히 호칭을 고치며 령이가 말했다.

“바로 저 앞이 아니더냐. 도착했으니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서은의 재촉에 령이는 다시 발걸음을 재우쳤다. 그러다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헌데 도련님은 어떻게 그리 빨리 걸으실수 있사옵니까. 아직 옥체가 회복되지도 않으셨겠는데…”
“여러 말 말고 어서 들어가자. 내가 너같은 줄 아느냐.”
“도련님, 앞으로도 그냥 이렇게 걸어다녀야 하옵니까? 가마나 수레는 타지 않으시옵니까.”

시종차림을 한 령이는 여전히 숨을 가쁘게 내쉬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령이를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가마 수레는 무슨, 앞으론 말을 타게 될 것이다.”
“네에?”
“어쩔수 없지 않느냐. 여긴 자동차도 없고 비행기는 더더욱 없으니 말이다.”

령이는 이번에는 도저히 못알아 듣겠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피씩 웃어버렸다. 하지만 바로 그때 주점안에서 주보가 마중나오고 있는 것이 보여 그녀는 웃음을 거두었다. 남장을 하고 있으니 가급적이면 남자처럼 말하고 행동해야만 했다.

“두분 손님, 안으로 들어오십쇼. 식사를 하시오리까? 묵으시오리까?”
“묵으려고 왔소.”

서은은 주보를 한쪽으로 끌어당긴 후 작은 은부스레기를 그의 손에 넘겨주었다.

“한가지만 묻겠소.”
“열가지라도 물으십쇼.”
“무과에 장원 급제한 이여백도련님이 여기 묵고 있는 게 맞소? 그 옆칸을 내어주었으면 하는데.”
“여부가 있겠습니까. 어서 따라오십쇼.”

주보는 만면에 희색을 담고 머리를 주억거렸다. 주보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면서 그녀는 자신이 묵을 방의 옆칸을 힐끗 쳐다보았다.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두분 손님,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라도 부르십쇼.”

주보가 허리를 굽신거리며 물러가자 령이는 풀썩 침상에 주저앉다가 바로 황급히 일어섰다.

“송구하옵니다. 공주님…”
“괜찮다. 령아, 이렇게 나왔은즉 궐의 법도는 잊거라. 내일이면 페하께서 조서를 반포하실 거고 그렇게 되면 이젠 서안이란 이름은 더이상 이 세상에 없다. 그러니 너는 지금 이 시각부터 공주에 대한 예의를 갖추지 않아도 되느니라.”
“공주님…”

령이는 얼굴 한가득 안쓰러움을 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전 공주님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찌 궐의 그 모든 것을 초개처럼 버리실수 있사옵니까…”
“글쎄…”

서은은 담담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스스로 잠자리를 펴고 겉도포를 벗어 침상옆에 걸쳐놓았다.

“난 지금…내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생활에 미리 적응하는 중이다.”

령이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옆에 누웠다. 망강루의 어둠이 차츰 짙어지고 있었다.

……

서은은 어렴풋이 잠이 들었다가 문밖의 인기척소리에 그만 잠에서 깨어났다. 바스락대는 작은 기척이었지만 그녀의 잠기를 말끔히 날려보내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도포를 걸쳐입은 후 가만히 문밖의 동정을 살폈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어서 문밖은 칠흑같이 캄캄했다.

령이를 돌아보니 먼 길에 지쳤는지 누가 동여가도 모르게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소리없이 방문을 열었다. 어렴풋한 달빛을 빌어 그녀는 한 검은 그림자가 바로 옆칸의 창문앞에서 방안을 들여다보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숨소리를 죽이고 그 그림자를 주시했다. 검은 그림자는 그렇게 한참 방안을 들여다본 후 잠깐 주위를 살피는 듯 하더니 품속에서 먼가를 꺼내어 창호지 안으로 들이밀었다. 그녀는 얼핏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 저것이 바로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몽혼약 같은 걸까? 아니면 누가 이여백에게 살수를 보낸 것일까?”

다시 주위를 돌아보아도 아무것도 손에 닿는 것이 없었다. 이제 더이상 지체할수는 없었다. 위기일발의 찰나 그녀는 상투에 꽂았던 은잠을 빼어들었다. 그녀의 손이 번뜩이자 은잠은 꼿꼿이 그 검은 그림자를 향해 날아갔다.

“윽…”

검은 그림자가 화들짝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바로 그때 옆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누구냐.”

검은 그림자는 일이 틀려진 것을 알았는지 뒤로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자신의 뒤에 누군가 막고 있는 것을 발견하자, 검은 그림자는 소매안에서 뭔가를 꺼내들었다.

치익…소리와 함께 서은은 오른팔이 따끔해 나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뒤로 흠칫하는 사이, 검은 그림자는 몸을 날려 어둠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녀는 화가 나서 발을 탕 굴렀다. 흉기에 스친 팔에서 피가 배여나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그녀는 사라진 검은 그림자를 향해 크게 몸을 솟구쳤다.

바로 그때,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흰색 그림자가 몸을 날려 그녀의 앞을 막아나섰다. 그녀는 시선을 들어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사람을 똑바로 응시했다.

관옥같이 준수한 얼굴에 얼음처럼 냉담한 표정, 하도 반듯하고 선연한 그 사람의 모습에 달도 무색해서 구름뒤로 자취를 감추는 듯 했다. 여기 남자들은 어쩌면 이렇게 만화속 인물같이 아름다울까.

그녀의 시선이 이번엔 그의 얼굴로부터 그의 하얀 옷차림에 머물렀다. 눈처럼 흰 중의를 껴입긴 했지만 필경은 도포안에 입는 속옷이라 그녀는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잠시 허둥대다가 고개를 들어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눈앞의 그는 무과에 장원급제한 무부의 영용함 보다는 사서삼경을 통달한 선비처럼 정일한 기품이 돋보이는 남자였다. 그런 인상을 받은데에는 아마도 그의 손에 들려있는 무기가 검이 아니라 접선이였다는 점이 크게 한몫 했다.

한참 남자를 응시하다가 남자의 짙은 눈동자에 오롯이 담긴 의혹을 보아내자 그녀는 일부러 목소리를 거칠게 했다.

“비켜주십시오.”
“더 쫓지는 말아.”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였다. 담담한 어조였지만 거부할수 없는 단호함이 느껴졌다.

“저 놈은 사형을 해치려고 하던 놈이였습니다.”
“알고있다.”

그의 침착함에 그녀는 억이 막혔다. 대체 이 남자의 정체는 무엇인가. 문밖에 자객이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오랜 시간동안 아무런 자취도 내지 않은 그 배포하고는.

“그런데도 쫓지 않는단 말입니까?”
“여태 그놈을 기다리고 있었지. 그대때문에 모든 것이 허사로 되었고.”

말은 분명히 그녀를 탓하는 것이었으나 어조는 전혀 나무람이 없이 담담하기만 했다. 그녀는 한껏 미간을 찌푸렸고 그는 그녀의 팔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피가 나는군. 처치가 우선일 것 같은데.”

이 한마디를 던지고 그는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잠깐 주저하다가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그의 방은 주인의 분위기처럼 간단하고 정결했다. 그가 권하는대로 차탁을 의지해 앉자, 그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녀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그를 보았다.

“뭐, 뭐하시는 겁니까.”
“상처를 처치해야…”
“아니…괜찮습니다. 제 방에 돌아가 따로 처치하겠습니다.”

그녀는 그의 말을 중단하며 황급히 팔을 움츠리고 소매를 내렸다. 눈앞의 남자는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다. 잠깐 팔을 잡혔을뿐인데도 그 내공의 깊이가 느껴졌다. 조금만 더 잡혀있다간 그녀의 무예가 어느 정도라는 것까지 들통날수 있었다. 그리고 만일 소매를 걷으면 아무리 남장차림을 했다 쳐도 여인의 부드러운 피부는 속일수 없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다행이 그는 그녀의 반상적인 거동에 그리 의심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옆방의 과객인가.”

그가 자리에 앉으며 무심한 듯 물었다.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떻게 되었든간에 도와줘서 고맙다. 날이 밝으면 내 따로 사례하지.”
“과념치 마십시오. 불의를 참지 못해 잠시 칼을 뽑았을 뿐입니다.”

그녀는 속으로 가만히 웃었다. 이대로 현대로 돌아가면 배우를 하기전에 무협소설을 써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얼굴에도 알릴락말락 옅은 미소가 스쳤다. 그것은 오히려 가만히 있기보다 더 냉랭한 미소여서 그녀는 조금 불안해졌다.

그는 겉보기엔 단정하고 예의바른 모습이였지만, 말투나 행동은 오래된 빙하가 쌓인 것처럼 싸늘한 분위기어서 그를 대하노라면 꼭 마치 얼음장을 마주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두 사람사이 대화가 끊긴 것을 느끼자 그녀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초면에 결례가 많았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그대는 어디 출신이며 어디로 가는 길인가.”

그가 느닷없이 물어왔고 그녀는 대답할수밖에 없었다.

“저는 요동 출신이며 이번 과거에 참가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여 귀향하는 길입니다.”

미리 준비했던 대답이었다. 표정이나 말투도 자연스럽다 여겨졌다. 이정도면 완벽한 접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동이면 동향인데. 허나 과거 시험장에선 그대를 본 기억이 없는 것을.”
“이 큰 대륙에서 과거에 참가하는 사람 또한 하늘의 별처럼 많습니다. 그 많은 사람을 사형께서 어찌 일일히 다 기억하겠습니까.”

그녀는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 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감히 사형의 존함을 알고자 합니다.”
“나는 요동 이여백이다. 그대는 어떻게 부르면 되겠는가.”
“저는 성이 임씨입니다. 이름은 서안이구요. 임서안이라고 불러주십시오.”

그녀는 대답을 한 후 잠시 기억을 더듬는 듯 하다가 다시 그를 보았다.

“이여백이라면, 혹시 요동총병 이성량장군님의 자제분이십니까. 이번 무과장원 이여백도련님이십니까.”
“바로 그 여백이다.”

그녀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두손을 맞잡고 정중히 읍을 했다. 이 역시 미리 준비한 행동이었다.

“성함은 익히 들었사오나 이렇게 만나니 과연 명불허전입니다.”
“가부의 후광을 빌었을뿐이다. 허명이 부끄럽다.”

이여백은 고개를 끄덕여 가볍게 답례를 했다.

……

방으로 돌아온 서은은 간단히 상처를 처치하고 곧바로 침상에 누웠다. 령이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고 멀리서 닭들이 홰를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팔의 상처가 쑤셔나서 잠시 자리에서 뒤척거렸다. 잠이 오지 않은 이유는 단지 상처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머리속은 삼검불이 뒤엉킨 듯 복잡했다. 이미 이여백과의 만남은 이루어졌으나 이제부터 어떻게 그와 상종해야 할지 막막했다. 처음부터 공주라는 신분으로 접근할 생각은 없었으나 이대로 남장의 모습으로 만나게 될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이미 엎지른 물이였다.

햇살이 창호지를 환하게 물들일 무렵 그녀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곤하게 자는 령이를 깨우려는데 문득 누군가가 가볍게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

“이 아침에 어인 일이십니까?”

문을 나선 그녀는 저도 모르게 멈칫하고 말았다. 아침햇살을 등지고 선 이여백의 모습이 너무나도 눈에 부셨다. 어제밤과는 달리 단정한 도포차림었지만 얼굴의 담백한 표정은 여전하였다. 그런 얼굴로 그가 말했다.

“오늘은 요동으로 떠날 예정인데 그대가 마음에 걸려 외람되이 찾았다.”
“네…”

그녀는 내색하지 않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왕이면 요동까지 동행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드디어 미끼가 걸려들었군…그녀는 속으로 가만히 웃었다. 하지만 머리를 숙이고 잠시 고민하는 척 했다.

“제겐 좋은 일이지만, 말도 없고 수종도 곁에 있어 사형께 폐나 끼치지 않을지…”
“가부의 시위대장이 호위를 왔는데 말을 넉넉히 가지고 왔다.”
“그래도…”
“사내대장부가 공연한 걱정으로 벗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도 남아 의리에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
“알겠습니다. 그럼 곧 준비하겠습니다.”

그녀는 머리를 숙여 대답한후 다시 방안으로 들어와서 급히 령이를 깨웠다. 준비를 마친후 이여백을 따라 망강루 주점을 나서자, 주점앞에서는 이미 위풍당당한 기마행렬이 셋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여백이 몸을 날려 말에 올라타자 무관차림의 젊은 남자가 그의 앞에 다가왔다.

“도련님,장원급제 축하드리옵니다. 총병님의 명을 받들어 소인이 도련님을 뫼시러 왔사옵니다.”
“수고했다. 누르하치.”

이여백의 말에 서은은 놀란 시선을 들었다. 누르하치…바로 자신이 알고 있는 그 누르하치가 이때 요동총병 이성량의 시위대장으로 있었단 말인가.

“경성에서 알고 요동까지 동행하게 될 임씨 도련님이다. 앞으로 나를 대하듯이 예의를 갖추거라.”
“네, 도련님.”

이여백의 말에 누르하치가 서은을 향해 정중히 읍을 했다. 그녀는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 고개를 끄덕여 답례를 했다.

누르하치…북방 만주의 여진부락을 통일하고 후금을 세운 칸…바로 그 청태조 누르하치…염라대왕의 말대로 역사의 순리는 그 누구도 거스를수 없는 것일까…명이 무너지고 청이 일어서는 것은 정녕 순리를 따르는 당연한 역사였을까…

일행이 출발해서 자금성을 빠져나올 때까지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깊은 생각에 잠겼고, 얼핏 머리를 돌려보니 멀리 자금성위에 붉은 노을이 피빛처럼 비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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