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요동의 밤바람은 차거웠다. 어스름한 달빛속에서 일망무제한 만주의 벌판에 말을 달리는 두 그림자가 있었다. 한참 말을 달리던중 앞에 있던 사람이 뒷사람에게 고개를 돌렸다.

"잠깐 쉬어가자."
"괜찮습니다. 계속 달리십시오. 지체해선 안됩니다."

뒷사람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앞사람이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말은 앞다리를 추켜들며 그 자리에 멈춰섰다. 그바람에 앞사람을 바싹 뒤따르던 뒷사람이 깜짝 놀라 말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곧 말을 멈춰세우고 뒷사람이 의아한 어조로 말했다.

"웬일입니까. 형님."
“어찌 그러느냐."
"네?"

밤길에 말을 달렸던 두 사람은 바로 이여백과 서은이었다. 급작스레 말을 멈춰세운 이여백의 말이 하도 뜬금없게 들려와서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어둠속에서 피씩 웃는 소리가 들렸다.

"괜찮다는 말 말이다. 넌 항상 괜찮다고 하지. 팔이 많이 아프겠는데 어찌 괜찮다고 하느냐."
"괜찮습니다."

그녀는 민망함에 얼굴을 붉혔다. 다행이 달빛이 미약하여 그에게 그런 모습을 들키지는 않은 게 다행이었다.

"남아대장부라면…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프면 아프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가까운 사람에게 솔직히 말하고 기대는것도 진정한 남아의 모습이거늘."

그가 다시 말의 고삐를 당겼다. 말은 속도를 늦추어 천천히 걸었다. 그녀도 말의 속도를 늦추어 그뒤를 따랐다.

"그리고 너와 나, 이젠 형제가 아니더냐."
"…"
"앞으론 혼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뭐든 괜찮다는 말도 이젠 그만하거라."

모든것에 무심한 듯한 그가 이런 따뜻한 말을 할 줄도 알다니…그녀는 작게 웃으려다 말고 어둠속에 묻힌 무연한 벌판을 보았다. 만주의 벌판은 끝이 없어보였다.

"작은 고통 때문에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어 그랬습니다. 팔은…참을만 합니다."

그가 침묵했다. 그리고 한참후에야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왜 그리도 필사적이냐. 누르하치를 위해서냐."
"누르하치…뿐만이 아닙니다. 이 일을 알고도 막지 않으면 요동은 앞으로 바람 잘 날이 없을테니까요…"

그녀는 다음 말을 삼켜버렸다. 솔직히 무엇을 위해서인지 자신도 갈피를 잡을수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요동의 이번 전란과 명조말기의 비사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경성에서 요동까지 동행하면서 지켜보았던 누르하치와 이여백의 운명을 바꿔놓겠다는 생각이 더 컸기때문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이런 마음이 단순히 염라대왕의 횡포에 타협할수 없다는 오기였는지, 아니면 이제 벗으로 지내게 된 누르하치와 이여백에 대한 긍휼의 감정이였는지 그녀는 잠시 헷갈렸다.

"암튼…제 감이 그렇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만일 이 일을 막지 않으면 앞으로 이보다 더 큰 일이 터집니다."

그녀의 마지막 말이 신비스럽게 들렸는지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번안(潘安,위진시기 미남자)을 무색케 하는 내 아우가 이런 점술까지 익혔을줄은 생각 못했군."
"이 험한 세상에서 몸을 보전하자면 이정도 능력은 갖추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녀는 그의 말을 천연덕스레 받은후 말고삐를 팽팽히 잡아당겼다.

"이만 길을 재촉해야겠습니다. 고륵성까지는 이틀 거리라 하셨지요. 지체하면 큰일입니다."

그가 말없이 등자를 구르자 안개 자욱한 만주의 벌판에서 채찍소리가 길게 울려퍼졌다.

새벽이 되자 서은의 체력은 차츰 바닥이 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가슴은 초조하게 타들어갔다. 고륵성 아타이의 반란…역사에서 만력은 요동총병 이성량에게 그 죄를 물을 것을 명했고 이성량은 곧 건주좌위도둑인 누르하치의 아버지 타쿠시에게 먼저 적진에 가서 탐지할 것을 명했다.

하여 지금 그녀가 할수 있는 일이라면 한시라도 빨리 고륵성으로 달려가 이성량에게 타쿠시를 적진에 들여보내지 말 것을 권고하는 일이였다. 만일 그녀의 생각대로 된다면 누르하치가 명조에 대한 원한이 역사에 기재된 것처럼 그토록 뼈에 사무치지 않을 것이고, 그가 수십년의 요동의 전란을 거쳐 후금을 세우고 명나라를 대체하는 일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휘익…

뭔가 검스레한 그림자가 갑자기 둘의 앞길에 나타났다. 말이 울부짖으며 앞다리를 높이 들었고 그녀는 어렴풋한 새벽안개속에서 복면을 한 사람그림자를 언뜰 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 복면을 한 사람은 허공을 향해 손을 번뜩한 후 뒤로 몸을 솟구쳤다.

"웬놈이냐!"

자객에게 두번씩 상한 그녀는 그 그림자를 놓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말위에서 몸을 솟구치자마자 바로 누군가의 강한 힘이 자신을 제압하는 것을 느꼇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는 어느새 이여백의 품안에 있었다. 뒤이어 풀썩…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말이 꼬꾸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사이에 복면을 한 사람은 어둠속에 사라져버렸고 그녀는 어안이 벙벙하여 그를 돌아보았다.

"형…님."
"이게 바로 그대가 이 험한 세상에서 몸을 보전하는 능력이었나."

그가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얼굴이 확 달아오른 그녀는 급히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어찌된 일입니까."

그는 대답없이 쓰러진 그녀의 말앞으로 다가갔다. 잠시후 그는 말의 몸에서 뭔가를 빼낸 후 그녀를 돌아보았다.

"또 독침이군."
"…"
"점점 극독을 쓰는군."
"대체 누가 그런 짓을…"

그녀는 몸서리를 쳤다. 만일 그 침에 찔린 사람이 이여백이나 자신이라면…그녀의 참담한 눈길이 마지막 숨을 거두고있는 말에게서 그에게로 옮겨졌다. 그런 그녀에게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고륵성까지는 아직 하루 길이 남았다."
"네…날이 밝으면 인가에 가서 말을 빌려볼까요."
"먼 거리를 달릴 말이 흔하지 않아."

그의 말에 그녀는 초조해졌다. 둘이 같이 말을 탄다면 하루가 아니라 반나절도 못걸려 말이 지쳐 쓰러질 것이다. 새삼 염라대왕이 원망스러웠다. 아무리 자신이 천기를 누설하는 것을 막고싶다 해도 굳이 이렇게 사람을 해칠 것까지야 없지 않는가. 다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이 문득 그의 등뒤에 멈췄다.

"누르하치!"

안개속에서 누르하치가 말을 달려 점점 가까워오는 게 보였다. 누르하치의 뒤에는 안장을 진 말 두필이 바싹 따르고 있었고, 그들앞으로 가까이 다가온 누르하치는 두 사람의 의아한 시선에 말에서 뛰어내려 부복했다.

"일부러 뒤를 따를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
"한밤중에 말이 없어지고 두분 도련님도 보이지 않아 깜짝 놀랐습니다. 어찌 저에게 말씀도 안하시고 그렇게 가십니까. 고륵성까지 달리자면 말이 버티지 못하기 때문에 바꿔탈 말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디 가는 걸 어찌 알았더냐."

이여백이 냉정한 눈길로 누르하치를 응시했다. 누르하치는 고개를 들어 그의 시선을 마주한 채 담담히 대답했다.

"주점에서 총병님이 고륵성으로 출전하셨다 들었습니다. 이런 때 도련님이 고륵성이 아니면 어디 가겠습니까. 사실 총병님이 걱정되는 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네가 여기 오면 다른 사람들은 어떡하느냐."

이여백은 여전히 냉정하게 말했고 누르하치는 그건 문제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나치야아가씨한테 인마를 거느리고 총병부로 가주십시사 부탁드렸습니다. 어차피 총병부를 제집 드나들 듯 다니시던 분이 아닙니까. 도련님을 따라 저도 고륵성으로 가서 제 힘을 보태고싶으니 부디 허락해주십시오."

누르하치는 머리를 돌려 서은을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

"임도련님 수종분도 지금쯤은 총병부로 가있을 것이니 시름 놓으십시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누르하치를 보았다. 이여백의 의심대로 누르하치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그들을 따라온 걸까. 이여백의 깊이 가라앉은 눈빛과 누르하치의 고집스러운 태도에서, 그녀는 문득 눈앞의 누르하치가 지금까지 보여줬던 것처럼 그렇게 단순한 인물이 아님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날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

태자하(太子河)를 건너 고륵성채 가까이에 이르자 셋은 곧바로 성채밖에 주둔해있는 이성량의 영채를 찾아갔다. 그들을 본 군사가 이성량의 장막안에 들어가 고하자 곧 장막안에서 웅글진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들여보내거라."

어딘가…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그녀는 멈칫했다가 이여백을 따라 장막안으로 들어섰다. 장막안에는 융복차림의 한 사람이 그들을 등진 채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총병님, 출전소식을 듣고 힘을 보태고자 찾아왔습니다."

누르하치가 한쪽 무릎을 꿇고 고하자 융복차림의 사람이 천천히 그들에게 돌아섰다. 그녀는 깜짝 놀라 몸을 휘청했다. 이여백이 옆에서 바로 그녀를 부축했다.

"아…버지."

융복차림의 사람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꽂혔다. 닮아있었다. 너무 닮아있었다. 중후한 얼굴에 항상 날카로운 그 눈길까지…그녀의 현대 아버지를 완벽하게 닮아있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오감독을 닮은 만력황제, 윤아를 닮은 나치야에 이어 세번째로 현대의 지인과 닮은 사람을 보는 것이지만, 그 누구를 만났을 때보다도 더 큰 전율이 그녀의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문득 코끝이 찡해져서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감이 옳았다.여기 만주에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줄곧…

융복차림의 사람은 그녀의 반응을 보자 의혹어린 시선을 이여백에게 던졌다.

"누구냐."

군중이어서 그런지 부자간의 대면 치고는 지나치게 간결한 어조였다. 그녀의 의혹과는 반대로 이여백과 누르하치는 이미 습관되었다는 듯 담담한 표정으로 이를 대했다.

"이 아우가 특별히 아버님을 뵈러 온다기에 배동하여 왔습니다."

이여백이 머리를 숙이자 이성량은 허구프게 웃으며 그녀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 먼길에 단순한 문안은 아닐터, 용건을 말하시오."

그녀는 큰 숨을 들이킨후 앞으로 한걸음 나섰다.

"소인 총병님을 뵙고 중대한 사건을 여쭙고자 특히 형님께 부탁하여 군엄을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부디 총병님께서 소인의 우러르는 마음을 어여삐 여기시어 출전중 군중을 찾은 죄를 용서해주시옵소서."

그녀의 당찬 말에 이성량의 시선이 그녀의 앳된 얼굴에 한참동안 머물렀다.

"못난 아들이 부족하여 형님으로 섬기기엔 부족한 듯 하나, 그대가 버리지 않는다면 그 미욱함을 가르쳐 굽은 길을 가지 않게 해주길 바랄뿐이요."

똑같다…그 웅글고 진중한 목소리마저…그녀는 숙였던 머리를 들어 이성량을 깊이 주시했다.

"방금 말씀드렸다 싶이 소인 총병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사오니 잠깐 좌우를 물리쳐 주실수 있겠습니까."

이성량은 잠깐 이마에 내 천자를 그리더니 손을 들었다. 이여백은 고개를 돌려 누르하치를 보았다.

"넌 나가서 같이 성밖을 둘러보지 않겠느냐."

누르하치가 이여백을 따라나간 후 이성량은 다시 그녀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군중이라 자리가 편치 못함을 양해하시오."
"아닙니다. 소인의 청을 들어주신 것만으로 감개무량하옵니다."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당돌하게 좌우를 물리쳐 달라는데 그대로 믿고 따라주는 이성량의 배포에 그녀는 은근히 감탄했다.

몽고와 여진 여러 부족을 아우르며 요동을 30년이나 지켜온 명장이라 역시 허명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철혈재상 장거정도 생전에 이성량에 대해서만은 찬탄을 금치 못했고, 후세에서도 명나라 역사 전후 200여년이래 이성량 같은 명장은 더 이상 있을수 없다고 평가하지 않았던가.

"어떤 고견이 있어 위험을 무릅쓰고 군중에 온 것이요?"

이성량이 조용히 물어오자 그녀는 다시 머리를 숙였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총병님은 이번 걸음에 고륵성 반란을 완전히 제압하려고 친히 걸음하신 겁니까."

이성량은 별로 망설임 없이 그녀에 질문에 답했다.

"그렇소."
"그러면 혹시 건주좌위도독 타쿠시를 설객으로 고륵성으로 보내는 일만은 재고하실수 있겠사옵니까?"

이성량의 눈빛에 언뜻 놀라운 기색이 내비쳤다. 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일각전에 이미 보냈소. 지금쯤 성문쪽으로 가고있을 것이요."

그녀는 급히 고개를 들었다. 끝내 막지 못한단 말인가.그녀는 한결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불가하옵니다. 총병님…부디 사람을 파견해 그 명을 거두어주시옵소서."
"무엇이 불가하단 말이오."

이성량의 날카로운 눈길이 그녀의 얼굴을 스쳤다. 그녀는 두손을 마주잡으며 머리숙여 말했다.

"소인이 알기로는 고륵성 아타이는 실은 반란이 아니옵니다. 아타이는 건주우위 두목이고 타쿠시는 건주좌위 도독입니다. 본래도 이 둘은 대립되는 관계에 처해있는데 지금 명에 대항하는 아타이가 명의 입장을 대변하는 타쿠시의 말을 들을 것이라 생각하시옵니까. 총병님은 정녕 타쿠시가 들어가서 무사히 아타이를 설득할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옵니까."
"타쿠시가 자청한 것이오. 아타이의 부인인 타쿠시의 조카딸을 보전하려면, 마지막 최선까지 해보겠다고 했소."
"하여 그리 윤허하셨습니까."
"타쿠시의 아버지 교행가도 같이 동행하기로 청을 들었고, 그 부하였던 니칸외란 또한 지금은 도륜성의 추장이니 아타이가 함부로 대하지는 않을 것이오."

니칸외란…도륜성 추장 니칸외란이 왜 하필 그들과 함께 고륵성안으로 같이 들어갔을까. 그녀는 머리속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잠시후, 이 모든 생각이 그 어떤 추측으로 정리되자 그녀는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총병님…위험합니다. 니칸외란이 만든 덫에 모두가 걸려들고 있습니다."
"덫이라."

이성량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그녀는 심호흡을 한 후 한결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애초에 아타이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상소는 니칸외란이 조정에 올린 것입니다. 니칸외란은 아타이가 반란했다는 상소를 올린후 총병님의 군사를 따라 여기 고륵성까지 왔습니다. 고륵성에서 자신을 이를 갈며 미워하는줄 번연히 알면서 왜 하필 타쿠시를 따라 들어갔겠습니까. 타쿠시는 이제 곧 아타이를 만나지도 못하고 위험한 상황에 놓일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니칸외란이 그 죄를 아타이에게 뒤집어씌우면 건주 우위와 건주 좌위는 자연 찢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흠…"
"타쿠시에게 만일이 있게 되면 총병님은 건주 우위를 진압할 것이고 건주 좌위는 니칸외란의 차지가 되니 그 세력은 몇배로 커질 것입니다. 또한 타쿠시가 죽으면 이 책임도 명과 총병님의 탓으로 돌려질수도 있으니 이는 여진 여러 부락의 반발을 조성하는데 큰 명분이 될 것입니다."
"…"
"부디 군사를 파견하여 타쿠시를 보호하고 이 요동 동란의 계기를 미연에 막으십시오."
"…"
"혹여 총병님의 군사라는 걸 알게 되면 성안에서 소란을 일으킬수도 있으니, 아니면 소인에게 여진의 옷을 내어주신다면 부탕도화 하더라도 이 일을 한번 막아보겠습니다."

그녀의 말을 듣는 내내 이성량은 줄곧 침묵하다가, 그녀의 마지막 말에 조용히 시선을 들어 그녀를 보았다.

"성공할수 있겠소?"
"네?"
"타쿠시를 보호하는 일 말이요. 날렵한 군사 열기를 주고 여백 저 아이도 같이 보낼 테니 꼭 성공해야 할 것이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의견이 채납된 것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성채쪽을 바라보는 이성량의 얼굴에는 얼핏 냉랭한 미소가 스쳤다.

"니칸외란…상소를 올리고도 모자라, 내 눈앞에서 타쿠시를 죽이려고…만일 그게 정말이라면 이 이성량을 너무 우습게 보고있군."

이성량은 곧 군사들을 불러 여진의 옷으로 변장시킨 후 이여백과 서은에게도 여진의 옷을 내어주었다. 일행이 장속을 마치고 말에 오르려는데 문득 저쪽에서 누르하치가 경황실색해서 달려왔다.

"총병님 그게 정말이옵니까!"
"뭘 말이냐."

이성량이 머리를 돌려 묻자 누르하치는 눈물이 글썽해서 털썩 두 무릎을 꿇었다.

"건주좌위도독…제 아비 말입니다…정녕 도륜성 성주와 함께 적진으로 가셨습니까…!"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누르하치에게 쏠렸다. 이성량의 눈빛에는 복잡한 기색이 어렸고 그녀는 또 한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서운 사람이였다. 사람들의 반응들로 봐서는, 지금까지 그 누구도 누르하치가 타쿠시의 아들임을 몰랐던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지금까지 누르하치는 자신의 신분을 속여가면서, 줄곧 총병부에 구구히 몸을 붙이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누르하치는 왜 자신의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알면서도 찾아가지 않았을까.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총병부에서 심복으로 지낸 그의 속셈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녀의 사색을 중단하며 누르하치의 절규가 군중에 울려퍼졌다.

"저도 가겠습니다! 제 아비입니다…제가 직접 가서 구하겠습니다!"

……

여진의 복색으로 고륵성 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서은이 상상했던 것처럼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고륵성 성문밖에 이르자 성채를 수비하던 군사들이 앞을 막아나섰다. 하지만 누르하치가 앞에 나서 여진의 말로 몇마디 말하자 군사는 머리를 끄덕인 후 바로 길을 틔워주었다. 성채안에 들어서자 서은은 이여백에게 물었다.

"성문의 경비가 이리 허술해서 성채에 세작이라도 들어오면 어찌려고 저럽니까."
"요동의 싸움은 광명정대 하기 때문에 서로 방비를 하지 않는다. 싸움을 하려면 사자를 보내 통보하고 성밖에 진을 쳐서 서로 맞붙을 것이다."
"군중을 탐지하러 세작을 보내는 일도 없단 말입니까."
"세작과 설객은 있으나 출전을 앞두고 싸우는 경우엔 잘 보내지 않고있지. 속임수가 있기 쉬우니까."
"하지만 병불염사(兵不厌诈, 병법엔 속임수를 가리지 않는다)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녀가 대꾸하자 그는 힐끗 그녀를 보았다.

"중원에서는 흔히 쓰는 병법들이 요동에서는 통하지 않아. 요동은 여진인, 조선인, 몽골인들이 많아서 성정이 곧고 호전적이지. 그들에게 병법은 한낱 속임수일뿐."
"그러니 니칸외란한테 당하죠."

그녀의 반박에 이여백은 아무 대답이 없었고 누르하치는 초조한 기색으로 둘에게 다가왔다.

"바로 일각전에 성안으로 들어오셨다 합니다. 아직 아타이한테 당도하지 못했을 테니 저는 지름길로 가서 막겠습니다."

이여백이 머리를 끄덕이자 누르하치는 말을 몰아 옆길로 달려나갔다. 서은과 이여백은 그대로 가던 길로 말을 재촉했다. 그리고 얼마 안지나 앞쪽에 한무리 사람들이 움직이는것을 발견하고 그들은 말을 멈추었다. 이여백은 군사 한명을 시켜 앞을 향해 전갈하게 했다.

"앞에 가시는 분들은 잠깐 멈춰서시오."

앞에서 가던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자 이여백은 말을 몰아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일행의 행색으로 보아 타쿠시가 틀림 없어 보였다. 이여백은 말위에서 살짝 머리를 숙였다.

"혹시 건주좌위도독 일행이십니까."

맨 앞에 서있던 사람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시오."

다소 품위있는 복색과 위엄어린 눈빛으로 보아 그 사람은 타쿠시가 틀림없었다. 특히는 그의 뒤에 바싹 붙어서있는 마른 체구의 노인이 누구라는 것을 알아보자 이여백은 말에서 내려 그들앞으로 다가갔다. 그제야 이여백을 알아본 듯한 마른 체구의 노인이 놀란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도…도련님."
"니칸외란 성주님."

이여백은 마른 체구의 노인을 향해 머리를 숙여보인 후 타쿠시를 향해 정중히 읍을 했다.

"저는 아버님의 분부를 받들어 도독님을 뫼시러 왔습니다."
"춘부장이시라면…"
"요동총병 이성량입니다."
"총병님의 자제분이 예까지 웬 일이시오."

타쿠시는 미간을 찌프렸고 이여백은 차분하게 말했다.

"성채안은 위험한 곳이니 더이상 지체하지 말고 나오라고 아버님께서 특히 명하셨습니다. 도독님과 성주님은 저와 같이 이만 말머리를 돌리셔야겠습니다."

이여백의 말에 타쿠시는 도리머리를 저었다.

"총병님께서 겨우 윤허하셔서 왔는데 여기까지 와서 어찌 돌려세운단 말씀이시오. 아타이의 부중이 바로 코앞인데…"
"내 생각도 도독과 같으이."

니칸외란이 타쿠시의 말을 받았다. 그는 이여백을 흘낏 쳐다보았다.

"요동 정세에 전혀 관심이 없던 도련님이 이렇게 갑자기 오셔서 총병님의 명이라 전달하다니…그리고 장수가 밖에 있으면 군명을 받들지 않을 때도 있다는 말도 있소. 총병님께서 직접 와서 부르시지 않는 한, 도련님의 말씀만으론 말머리를 돌릴수 없음을 용서하시오."
"성주님."

이여백의 말을 니칸외란이 다시 손을 내저으며 막았다.

"하물며 도독께서는 오랫동안 조카딸을 보지 못했는지라 출전을 앞두고 회포를 풀고자 하시오. 도독의 아버님도 동행하신 길인데 도련님이 어찌 이분들의 천륜을 막으려 하시는지 이 늙은이는 당췌 알수가 없수다."
"불쌍한 내 손녀아이…"

타쿠시의 뒤에 있던 백발의 노인이 긴 수염을 떨며 니칸외란의 말을 받았다. 타쿠시의 아버지 교행가였다.

"이 늙은 것이 이제 살면 얼마를 더 살겠다고…죽기전에 불쌍한 내 손녀아이를 한번 보는 게 그리도 원수 같소?왜 이렇게들 부산히 구는 것이오."

"도독님…"

뒤에서 이들의 대치상태를 지켜보던 서은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앞으로 한걸음 나섰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두분께서 이렇게 가시면 너무 위험하십니다. 교전을 앞두고 아타이가 두분께 천노할수 있으니 부디 형님의 말씀대로 말을 돌려주십시오."
"여기가 아무 사람이 참견할 자리던가!"

그녀를 향해 니칸외란이 호통을 쳤다. 이여백의 기색이 순간 차갑게 굳어졌다.

"성주님."
"이미 전해 들었소."

니칸외란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들을 쏘아보았다. 니칸외란의 적의에 그녀는 뭔가 아리숭한 느낌이 들었다. 니칸외란은 여전히 그녀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경성에서 만나 요동까지 동행을 한 사이라지요. 도련님께서 이런 요망한 잡인에게 홀려 대사를 경솔히 하니 총병부의 기강도 다시 바로잡아야 할 것 같소."
"지금 성주님께서 총병부의 일을 신경쓰실 입장은 아닌듯 합니다만."

이여백의 딱딱한 말에 니칸외란은 요상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런…하필 중요한 일을 앞두고…도련님께 무례를 범한 죄는 나중에 따로 청하겠소. 지금은 급한 길이니 이만."

더이상 말로 돌려세울수 없자 이여백은 말위에서 몸을 날려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서은도 말에서 내려 이여백의 곁에 섰다. 바로 그때 멀리서 누르하치가 말을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서은은 반색을 하다가 문득 눈앞에 한 검은 그림자가 눈앞에 언뜰하자 급히 검을 뽑아들었다.

고륵성 성채에 들어오자마자 지금까지 줄곧 경각성을 높여왔던 그녀였다. 그녀의 예상대로 복면자객이 나타났으나, 자객의 행동이 너무 빨라 그녀가 손쓸새 없이 일은 발생하고 말았다.

휘익하는 소리와 함께 타쿠시와 교행가가 그들이 보는 앞에서 풀썩 몸을 꺽었다. 그녀는 급히 앞으로 다가갔다. 타쿠시의 입가에 검붉은 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머리를 돌려보니 교행가는 이미 날숨만 내쉬고 있었다.

전쟁을 앞둔 성채에는 뽀얗게 티끌이 일고 있었고, 그속에서 서서히 피빛 노을이 지고 있었다.

……

"아버지!!!"

천둥이 우는 듯, 하늘땅이 진감하는 절규소리가 울렸다. 누르하치…그녀는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렇게도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이 두 사람이 죽는 것을 막지 못하다니…

"누르…하치…"

타쿠시는 아들을 한눈에 알아보고 있었다. 6년사이 훌쩍 커버린 아들이였지만 피줄의 느낌은 강렬했다. 누르하치가 손을 내밀었고 그 손을 잡은 타쿠시는 초점없는 눈을 들어 그를 더듬었다.

"미안…하다…"
"아버지…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아버지…"

굵은 눈물이 누르하치의 얼굴에서 흘러내렸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6년만의 부자간의 상봉이였지만, 그런 두 사람 사이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가로놓여 있었다.

"누굽니까? 아버지를 이리 만든 놈은 누굽니까? 이 원수를…이 원수를 꼭 갚고 말겠습니다…!"

누르하치의 피를 토하는 듯한 말에 타쿠시는 잠시 정신을 가다듬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가까스로 손을 들어 누르하치의 팔을 움켜잡았다.

"아들아, 꼭 기억하거라. 우리 원수…원수는…"
"아버지, 이 원수를 제가 꼭 갚겠습니다. 저희 아이신죠우르의 성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누굽니까? 반드시 제 손으로 원수를 찾아내서 갈기갈기 찢어버리겠습니다!"

이를 갈며 하는 누르하치의 말에 타쿠시는 마지막 힘을 다해 모지름을 썼다.

"원수는…명…명…"
"아버지…"
"잊지…말거라…원수는…명…명…"

꺽…하는 소리와 함께 타쿠시의 손이 스르르 아래로 미끌어져내렸다. 누르하치는 피가 터지도록 이를 악물더니 주먹으로 땅을 힘주어 내리쳤다. 그의 주먹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피가 땅에 스며들었고, 그녀는 그의 눈에서 타오르는 황황한 불길에 흠칫 몸을 떨었다.

……

"아니야."

영채에 돌아와서도 그녀는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녀의 중얼거림에 이여백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한참 생각하다가 다시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럴순 없어. 이건 분명 아니야."
"뭐가 아닌가?"

이여백이 물어오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타쿠시가 지목한 원수 말입니다. 명이 아닙니다."

그녀는 머리를 돌려 장막밖의 누르하치를 바라보았다. 누르하치의 앞에는 흰 천을 덮은 두구의 시신이 놓여있었다. 타쿠시와 교행가의 시신이였다. 누르하치는 그앞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있었고, 장막 안쪽에서 니칸외란은 사색이 되어 이성량의 곁에 바싹 붙어있었다. 그는 머리를 가로저으며 이성량에게 몇번이고 되뇌였다.

"이렇게 될줄은…세상에 어쩌면 이런 일이…성채에, 그것도 대낮에 어찌 자객이 성안에 출몰할수 있단 말입니까."
"당장 말을 돌리라 하였는데 어찌 지체하였는가."

이성량의 냉랭한 말에 니칸외란은 두손을 마주잡았다.

"총병님, 억울합니다. 도련님의 명을 받잡고 말을 돌리려고 하는데 바로 그때 자객이 나타났으니…"
"흠."
"소인이 보기에는 꼭 아타이가 보낸 자객입니다."
"근거없는 소리는 하지 않는게 좋을 듯 싶소. 출전을 앞두고 자기 성안에서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는 건 그 누구도 바라지 않을터."

이성량의 무거운 말을 니칸외란이 늦을새라 받았다.

"바로 그렇기때문에 오히려 손을 쓴게 아닙니까. 이렇게 되면 아타이 자신은 그 혐의를 벗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이성량은 그를 상대하지 않고 장막안으로 들어온 군의에게 시선을 주었다.

"사인은 무엇이냐."
"극독입니다. 시신에서 이것을 발견했습니다."

군의가 내민 손바닥에는 털끝만한 침이 놓여져있었다. 고개를 들어 그것을 보는 순간 서은은 깜짝 놀라 이여백을 바라보았다. 이여백도 놀란 기색이었지만 바로 냉정을 회복하고 그녀를 향해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극독…"

이여백의 제지에 그녀가 말을 중단해버리자 이성량은 눈을 들어 그녀를 보았다.

"뭐라 하셨소?"
"아닙니다. 독이라니 놀라워서 그럽니다."

그녀가 이성량에게 대답했다. 바로 그때 누르하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러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누르하치에게로 향했다. 누르하치는 그대로 쥉쥉 장막안으로 들어오더니 곧바로 칼을 뽑아 니칸외란의 목을 겨누었다.

누르하치의 표정은 살벌했다. 다들 크게 숨을 들이켰고 니칸외란은 온몸을 와들와들 떨면서 이성량을 보았다.

"총병님…저를…저를 구해주십시오."
"누르하치, 칼을 내려놓거라."

이성량이 조용히 명령했다. 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네게 도륜성 성주를 치죄할 권한은 없다."
"저는 이 원숭이 같은놈을 반드시 죽이고 말 것입니다…!"

누르하치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그녀는 가슴을 졸이며 눈앞의 상황을 지켜보았다. 이여백이 누르하치의 앞으로 한걸음 다가갔다.

"칼을 놓거라, 누르하치."
"도련님…"
"출전도 하기전에 아버님의 영채를 피로 씻을 생각이더냐."
"…"
"아비를 잃은 너의 마음을 모르는바 아니다. 하지만 너의 무모한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생각해보았느냐."
"소인을 거두어주신 총병님과 도련님의 은덕은 다음생에 갚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더 이상 할말이 없습니다. 그저 이 소인배를 죽이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자결하게 해주십시오."

어쩌면 나쁘지 않은 결과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니칸외란을 죽이고 누르하치가 자결을 한다면 후금이 일어설수 없고 명나라가 그대로 남아있을지도 모를 일이였다. 어쩌면 역사를 바꿀수 없다는 염라대왕의 말은 그녀 내면속의 오기 비슷한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오감독을 닮은 만력황제가 만인이 손가락질하는 태정의 황제가 되는 것도, 아버지를 닮은 이성량이 만주 반란을 방관하여 후세의 비난을 받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역사는, 대체 어떤 것이 정답인 걸까.

누르하치의 칼은 흰 빛을 번뜩이며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이여백이 늦을새라 몸을 움직였고 니칸외란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바로 이때 장막안에 한 가녀린 그림자가 나타났다. 누르하치의 칼은 그만 반공중에 멈춰버렸다.

"누르하치…안돼."

언제 왔는지 미모의 한 여인이 니칸외란을 자기 몸으로 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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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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