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밤새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휘장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유난히도 부드럽다. 서은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후 천천히 휘장을 걷어올렸다. 밤새 잠을 자지도 않았는지 나치야가 어제밤 모습 그대로 휘장밖에 대령해 있는게 보였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나치야는 살풋이 웃어보이며 말했다.

“교군군들을 번거롭게 하지 말고 우린 말을 타고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서은의 대답이 끝나기 바쁘게 누군가가 앞에 나서서 그녀의 시중을 들었다. 눈을 든 서은은 그만 몸을 흠칫했다.

“소홍…”
“오늘은 제가 아씨님의 소세 시중을 들겠사옵니다. 그동안 지은 죄는 너그러이 용서해주시옵소서.”

소홍이 다소곳이 눈을 내리깔았다. 서은은 그녀의 반상적인 거동에 살짝 의혹이 들었지만, 금세 불안한 마음을 털어버리고 말했다.

“괜찮다. 네 마음이 편안해지기만 했다면…”

준비를 끝낸 셋은 날이 채 밝기도 전에 봉선각을 나섰다. 단잠이 든 봉선에게는 작별인사도 건네지 않은 채였다. 소홍의 부축을 받아 서은은 등자를 밟고 말에 올라탔다. 하지만 바로 그때 느닷없이 머리를 스치는 현훈증에 그녀는 하마터면 말위에서 떨어질뻔 하였다. 하도 빠른 동작으로 손을 내밀어 말고삐를 잡아채지 않았다면, 그 어떤 불상사가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치야가 걱정어린 얼굴로 서은을 돌아보았다.

“여러날 침식을 거르시더니 몸이 많이 허약해지셨나 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서은은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어느 절로 가는것입니까.”
“성밖의 광녕사로 가는 길입니다. 제가 전에도 자주 들리던 곳이었습니다.”

나치야의 말에 서은은 머리를 끄덕였다. 말을 달려 얼마 지나지 않아 성밖에 이르자 광녕사의 윤곽이 어렴풋이 산위에 보였고, 그들이 사찰 대문밖에 도착하자 미리 연통을 받은 모양으로 스님 한사람이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소홍을 밖에서 기다리라 한 후, 둘은 안으로 들어가서 스님이 내온 소식으로 간단한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사찰 풍경을 둘러보자는 나치야의 청에 서은은 그녀를 따라 사찰 곳곳을 거닐었다. 둘이 한참 걸어 사찰 뒤쪽의 으슥한 숲속에 이르자, 나치야는 그녀를 향해 문득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에도 가끔 이렇게 와서 앉아있다가, 스님들께 소식을 얻어먹고 가군 했습니다.”
“나치야에겐 그런 초연한 기품이 보입니다.”

서은이 동조하는 말에 나치야는 얼굴을 숙이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표정이 착잡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서은은 아무 말 없이 산밑의 풍경을 내려다 보았다. 바로 그때, 나치야의 냉랭한 목소리가 귀전을 파고들었다.

“사실 저는, 전혀 초연하지가 않습니다.”
“…”
“당신을 만나는 순간…아니…당신과 이 모든 것이 엮이는 순간부터 저는 초연해 질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설사 저희가 연적이 아니라, 각자 마음에 두고있는 사람이 다르다고 해도 말입니다.”

섬광처럼, 그 어떤 생각이 서은의 머리를 스쳤다. 왜 하필 지금일까, 그것도 이런 청정한 곳에서, 이별을 앞두고 서로의 부담감을 덜어버리려는 시점에서…나치야는 왜 이렇듯 쌀쌀한 말을 내뱉는 것일까.

“나치야…”

산아래서 시선을 거둔 그녀의 눈빛이 차츰 서글퍼졌다. 하지만 나치야는 아랑곳하지 않은 듯 계속해서 말했다.

“여자들의 질투와 시기심은, 꼭 서로가 정적(情敌)이어서 생기는 감정이 아닙니다.”
“…”
“아버지가 임종때 남기신 말씀, 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늘은 왜 이미 나치야를 내시고, 또 당신을 보내신 것입니까.”

서은은 잠시 시선을 내렸다.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뭔가 울컥하고 괴어오른다. 이건 아닌데…그동안 줄곧 나치야에게 가져왔던 측은지심이…이런 결과를 원한 것은 절대 아닌데…머리를 흔들며 서은은 나치야를 바라보았다.

“나치야…그 어떤 깊은 오해가 있다 해도, 그 어떤 시기와 질투의 감정도 우리 사이를 갈라놓아선 안됩니다. 우린…우린 이런 사이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지금 와서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나치야는 싸늘하게 웃은 후, 꼭 마치 낯선 사람을 보는 듯한 눈길로 그녀를 응시했다.

“다 끝난 얘기입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저와는 달리, 모든 것을 버리고 가는 당신…당신이란 존재가 제게 이렇게 큰 상처가 될줄은.”
“…”
“가족도 사랑도 살아갈 희망까지도 다 잃은 사람이…마지막 남은 의리까지 버린다 해도…별로 과한 것이 아니겠지요.”

서은은 슬픈 눈빛으로 나치야를 바라보았다.

“나치야…그동안 당신에게 줄곧 미안했던 건 인정합니다. 제 이기심 때문에 일이 이 지경까지 온 것도 죄스럽게 생각하고 있구요. 하지만 저 역시 제것을 지키기 위해, 제게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그랬다는 걸…이해해주세요.”
“이해합니다. 공주님…사람이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으면, 하늘과 땅이 함께 주살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미안한 마음 안가지셔도 됩니다.”

나치야의 어조는 평온했으나, 그 말속에 풍기는 냉기와 불신은 서은의 심장을 날카롭게 찌르는 느낌이었다. 그런 나치야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서은은 시선을 내렸다.

“아니면 제가…무릎이라도 꿇어 당신께 사죄할까요? 이렇게 하면…이렇게 되면 당신 마음이 편해질런지요.”
“제가 어찌 감히 공주마마께 불경의 죄를 짓겠습니까.”

나치야는 쌀쌀하게 웃은 후 산밑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다음 생에는…절대 이런 사이로 만나지 맙시다. 누르하치가…당신 목숨을 해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치야의 말이 무슨 뜻인지 되새기기전에, 문득 휘파람 소리가 울리며 한무리 군사들이 그들이 있는 자리로 들이닥쳤다. 서은은 눈앞에 벌어진 상황이 무슨 영문인지 몰랐지만, 나치야는 미리 준비가 있은 듯 번개같이 몸을 날렸다. 옆의 나무뒤에 준비해둔 말을 올라탄 그녀는 서은에게 고개를 돌리며 크게 소리쳤다.

“제가 가서 사람들을 불러오겠어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나치야아씨…”
“잡아라! 이쪽이 나치야 부인이다. 포위해라!”

군사중 우두머리인 듯 한자가 호령을 내리자 군사들은 서은을 향해 서서히 포위권을 좁히기 시작했다. 나치야는 말에 채찍을 가하더니 어느새 까마득히 사라져버렸다. 뒤늦게 상황파악이 된 서은은 천천히 뒤로 물러선 후, 옆에 있는 나뭇가지를 주어 우두머리를 향했다.

“웬놈들이냐.”
“누르하치 추장님의 분부를 받들어 나치야부인을 뫼시러 왔습니다.”

우두머리가 깍듯이 머리를 숙였다. 바로 그 순간 손에 든 나뭇가지 끝이 흐릿해지며, 아까보다 더 심한 현기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른 후 우두머리를 보았다.

“너희들은 금선탈각(金蝉脱殻)에 속았다. 난 나치야가 아니다. 금방 떠난 그 분이 바로 나치야아가씨다.”
“일단 저희와 같이 걸음하시면 다 알게 될 것을…”

우두머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은은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천천히 한쪽 무릎을 굽혔다. 마른 나뭇잎이 쌓인 푸석푸석한 땅을 나뭇가지로 짚은 후, 그녀는 한참후에야 머리를 들었다.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군사들을 바라보다가 돌연 참담한 미소를 지었다.

“윤아야…네가 어떻게 나한테…이럴수 있는 거니…”

차거운 비바람이 분다. 불러 멈춰세우고 싶은, 그러한 우정의 한때를 떠올리며 그녀는 까무룩 정신줄을 놓았다.

……

모든 것이 가물가물하다.

방도, 의상도, 그리고 침상앞의 낯선 얼굴까지도.

어떻게 된 것일까…그녀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나치야, 광녕사, 여진인 군사들…그리고 우두머리의 말…누르하치!

눈을 뜨자 침대옆의 여인이 반색하면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 보는 게 눈에 들어온다. 어딘가…눈에 익었다.  아름다운 얼굴, 화려한 복색…그리고 나이에 비해 위엄있는 눈매…분명 그녀였다.

“맹고?”
“절 기억하십니까.”

잊을리 없다. 예허나라씨 맹고…지금쯤은 누르하치의 대푸진 자리를 노리고있을 그녀…총애를 독차지하기 위해 나치야를 헤투알라성에서 밀어냈을 그녀…하여 그녀의 부드러운 미소에 서은은 냉랭한 말투로 답했다.

“제가 왜 여기 있는 겁니까.”
“절에서 쓰러지신 걸 추장님이 보낸 사람들이 모셔왔습니다.”
“납치라는 말을 잘도 그렇게 포장하시는 군요.”

서은은 쌀쌀하게 웃으면서 맹고를 보았다. 하지만 전자에 비해 후자의 태도는 아주 담담했다.

“납치를 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잘못 모셔왔다는 편이 더 정확하겠지요.”

서은은 뭔가 알듯말듯한 기분이 들었다. 광녕사에서도 느낀적 있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머리를 들어 맹고를 주시했다.

“그 말은즉…”
“저희는 나치야를 데려오려고 했을뿐입니다.”

맹고는 그녀의 생각을 긍정해주기라도 하는 듯 차분하게  말했다.

“나치야를 본적 없는 수하를 보냈기에 그만 일을 그르쳤습니다. 어찌 그곳에 계신 겁니까. 저희가 입수한 정보에는 광녕사에 나치야만 간다는 소식이었습니다.”
“…”
“하지만 당신을 모셔와도 저희의 목적을 이룰수 있기에…당분간은 불편하시더라도 여기서 기거하셔야 하겠습니다.”

나치야가 위기의 순간에 일부러 소리높여 했던 말이 새삼스레 머리에 떠올랐다. 바로 그것이다…지금까지 벌어졌던 일들이 비로소 꿰어져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알고보면 각자의 이기심으로 벌어진 일이었고, 지금 와서 상황이 제일 우습게 된 것은 그녀 한사람뿐이었다. 그녀는 허탈한 기색으로 머리를 숙였다가, 문득 맹고를 쳐다보면서 조용히 웃었다. 그녀의 말투는 또렷했다.

“당신들은…나치야를 이런 식으로 데려오면…그녀가 말을 들을수 있다고 생각하는가요?”
“…”
“나치야는 되돌아오기를 원치 않는 것이 분명합니다…나를 유인해서 그곳에 데려가고, 본인이 몸을 뺀 것을 보면 알수 있지 않겠습니까.”
“…”
“당신들이 내쫓고 당신들이 다시 데려오려고 하다니…대체 어떤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이시는 겁니까.”
“저희로서는 자연 저희의 도리가 있습니다.”

맹고의 표정은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하지만 서은은 그녀의 눈동자를 보면서 여전히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또한 나치야를 데려오면, 이 헤투알라성에서 당신의 위치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당신은 대푸진이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누르하치에게 부인이 한사람이라도 적을수록, 당신이 총애받을 기회는 더 많지 않겠습니까.”
“그건 굳이 말씀 안하셔도…”
“게다가 당신은 아이까지 있으니, 제가 보기엔 대푸진의 자리는 지금도, 앞으로도 당신외에는 그 누구도 쳐다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젠 나치야를 데려오려는 헛된 생각은 접으십시오.”
“당신의 말은 한낱 짧은 생각에 불과합니다.”

맹고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서은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맹고의 하얀 얼굴에 언뜻 쓴웃음이 스쳤다.

“당신이 아시겠는지 모르겠지만, 추장님께는 정실부인이 여러분 계십니다. 저를 제외하고도 첫째부인 동가, 둘째부인 군다이외에 각 부락에서 데려온 여러 첩부인들도 계십니다.”
“…”
“동가부인님은 추잉(褚英)을 제외하고도 작년에 대선(代善)을 낳으셨습니다. 하지만 한인이여서 대푸진(大福晋)의 자리를 탐할수 없었습니다. 둘째부인님은 재가로 추장님께 시집오신 분인데 아직 태기가 없으시고 여러가지로 실수가 빈번하여 역시 대푸진이 되기가 어렵습니다. 저 또한 나이가 너무 어리고 작년말에 아이를 잃기까지 했기때문에 추장님께서는 아직 대푸진의 자리를 비워두고 계십니다.”

서은의 시선은 맹고의 얼굴에서 다시 그녀의 몸에 옮겨졌다. 아닌게 아니라 시간을 따지면 지금쯤 만삭이 되어야 할 몸이 여전히 날씬한 그대로였다. 그러고 보니 맹고의 얼굴에 나이에 비해 조숙한, 그 어떤 깊은 슬픔이 묻어있는 듯 느껴졌다. 그녀는 시선을 거두었다.

“죄송합니다. 전 그런줄도 모르고…”
“아닙니다. 이것이 제 팔자인 것을 어떡하겠습니까.”

맹고는 머리를 가로저은후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당신은, 제가 왜 나치야를 꼭 데려오려고 하는지…무척이나 궁금하겠지요.”

서은은 아무 말없이 맹고를 바라보았고, 맹고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말을 이었다.

“툭 털어 말씀 드려도 무방합니다. 나치야로 놓고 말하면 추장님과 서로 뜻이 통하여, 추장님은 아직도 마지막 넷째 부인의 자리를 나치야에게 남겨두고있습니다. 또한 나치야는 저희 넷중에서 저빼고 대푸진으로 될수 있는 적임자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이유라면 이유겠지요.”
“대푸진…”
“저 또한 대푸진의 자리가 저 말고 다른 부인에게 넘어가는걸 볼순 없습니다. 다만 나치야를 제외하구요.”

서은은 그녀의 말이 이해되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 역사에서 맹고는 홍타이지의 어머니가 아니었던가.

“너무 소극적인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맹고…당신은 아직 젊어서 한번 아기를 잃었다 하여 다시 회임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위로의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위로가 아닙니다. 당신은 앞으로 아주 강한 아들을 두게 될 것이며 대푸진의 자리에도 오르게 될 것입니다…”

서은은 여기까지 말하다가 문득 역사에 기재한, 28세에 병으로 죽게 되는 맹고의 운명을 떠올리자 그만 입을 다물어버렸다. 맹고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한가닥 옅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그래서 뭐합니까. 저처럼 명이 길지 못한 사람에게는.”

서은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미처 말을 잇지 못하자, 맹고는 웃으면서 침상옆으로 다가왔다.

“그리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뭐 어때서요. 그보다 더 놀라운 일도 있습니다. 얼마전 의원이 맥을 보았는데, 제가 두번째 회임을 했다고 합니다. 지금이 두달째입니다.”
“아…”
“하지만 그번 진맥에서 저의 병도 같이 발견했습니다. 이 아기를 낳게 되면 저는 아마 앞으로 몇년의 수명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더이상 아기를 포기할수 없습니다. 제가 대푸진이 될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데…”
“맹고…왜 꼭 대푸진이 되어야 합니까?”

서은의 의혹어린 말에 맹고는 쌀쌀한 미소를 지었다.

“왜라니요? 우리 예허의 부족과 누르하치가 앞으로 평화롭게 지내려면 제가 대푸진이 되는 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요.”
“…”
“하지만 하늘이 시기하여 명을 짧게 준 것을 어떡합니까. 해서 저는 꼭 나치야를 데려와야 합니다.”
“그건 왜서입니까.”

서은이 조심스럽게 묻자, 맹고는 슬픈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다른 부인님들은…제가 탁고(托孤)를 할 적임자가 못되기 때문입니다…제가 가면, 나치야가 제 아이를 보살펴 줄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나치야도 앞으로 아이가 생긴다면요…누구나 다 자기 친자식이 더 소중한 법입니다.”

서은의 말에 맹고는 알릴락말락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웬지 그 미소가 소름 끼친다는 생각이 들어 서은은 천천히 미간을 구겼다. 그리고 여전히 그녀 특유의 담담한 어조로, 맹고가 말했다.

“나치야는…회임을 할수 없습니다. 그녀가 헤투알라성을 떠난 이유도…바로 그때문입니다.”
“당신이…그렇게 만들었나요?”

서은은 머리를 들었다. 새삼 나치야의 원망어린 말이 귀가에 들려오는 듯 싶었다.

“전 그래도…당신을 믿었습니다. 저 헤투알라성의 누르하치의 총애를 다투는 여인들보단…당신은 근본부터 다를줄 알았습니다.”

그래서였구나. 그녀에 대한 불신도…세상을 향한 원망도…그래서 그런 큰 상처를 안고 그런 말을 했었구나.

서은은 다시 맹고를 보았다. 담담한 미소를 띈 맹고의 얼굴에는 그 어떤 험난한 길이 가로막아도, 기어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가 어려있었다.

자신의 질문에 구태여 맹고가 대답하지 않았지만 서은은 그 답을 알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가슴은 비릿한, 그리고 생경한 그 어떤 느낌으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질린다…이젠 사람들이 이기심이…

버겁다…이런 고달픈 삶의 무게가…

그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왠지 방금까지 자신의 머리에 떠올랐던 수많은 비난들이, 그대로 자신에게 차갑게 꽂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녀 역시 이런 이기심으로, 지금껏 전생의 시간을 지내왔던 것이 아닌가. 그녀는 문득 숨이 막혀왔다.

“이것이 염라대왕의 한수였어…사람들이 자신의 이기심을 버리지 않는 한, 명부는 영원한 승자가 되는 신의 한수…”

그녀는 자조섞인 어조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말의 끝은 시리고 무거웠다.

그리고 비수에 베인 것처럼 뼈저리기도 했다.

지치고, 힘들었다.

쓸쓸한 미소를 입가에 띄우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의식이 차츰 희미해졌다. 그리고 그 희미한 끝자락에는, 지독한 암흑이, 그러나 기이하게 편안한 암흑이 그녀를 뒤덮고 있었다.

……

서은은 눈을 감고있었다. 걷잡을수 없는 먹먹함이 그녀의 목을 옥죄었다. 그 느낌은 오래동안 잊고 있었던, 하지만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더 강렬해졌다.

그 어떤 것과도 비길수 없는 강한 무게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것은 이여백의 차분한 느낌과는 전혀 다른 위협적인 것이어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그 목소리의 뒤를 이어 맹고가 나직히 한숨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의원과 식사를 완전히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냥 이런다면 건강이…”
“억지로라도 먹이시오.”

누르하치, 그의 목소리였다. 탁하게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는 알지 못할 분노가 섞여있었다.

“언제 그 고집을 꺾는지 어디 한번 보겠소.”

서은은 휘장안에서 입술을 깨물었다. 여러날 물 한모금 입에 대지 않았는지라 몸은 거의 탈진 상태였지만 의식만은 또렷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하지만 그때 하필 휘장을 걷는 누르하치의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누르하치가 잠깐 눈섭을 꿈틀했고,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가주세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인사가 고작 이렇습니까.”

누르하치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섞였다. 얼핏 보았지만 그의 구리빛 얼굴이 전보다는 더욱 강인해진 듯 했다.

“전보다는 많이 달라 보이십니다, 부인.”

그녀를 부르는 호칭도 어느새 달라져 있었다. 그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허나 병중의 청초한 얼굴이 더 아름다워 보이십니다.”
“아무리 남여유별이 없는 여진부락이라 할지라도 예의는 지켜주시지요.”

눈을 감은채 하는 그녀의 말에 누르하치가 휘장을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가 휘장밖에서 말했다.

“의원을 들이겠습니다.”
“싫습니다.”

그녀가 깔끔하게 거절했다. 하도 냉랭한 말투에 누르하치가 침묵하는게 느껴졌다. 그녀는 눈을 뜨고 휘장밖의 크다란 그림자에 시선을 주었다.

“사람을 감금하고는 의원을 들여 무엇합니까. 그런 자비는 싫습니다. 누르하치, 당신은 역시 변하지 않았군요.”

누르하치는 한참 침묵하다가 허구픈 웃음소리를 냈다.

“저야 항상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인…”

그가 부인이라는 말에 굉장히 힘을 주는게 느껴졌다. 서은은 크게 숨을 들이쉰 후 다시 한마디한마디 말했다.

“누르하치, 왜 날 감금하는 것입니까.”

누르하치가 휘장밖에서 피씩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글쎄요…따지고보면 부인과는 참으로 깊은 인연입니다. 그래서 섣뿔리 놓아주기 싫어졌다고 해두지요.”
“그게 무슨…”
“부인께선 제 목숨을 구해주신 은인이기도 하지만…지금은 저와 대립관계에 있는 사람의 부인이자 제게 아주 중요한 사람들을 불러올수 있는 담보이기도 합니다.”
“…”
“그러니 왜 부인을 이곳에 억류하는지 아시겠습니까.”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라면서…그 은혜를 이렇게 보답하는 건가요?”

서은의 말투는 쌀쌀했다. 하지만 어깨에서 느껴지는 떨림, 손끝에 닿는 공포를 그녀는 분명히 감지하고 있었다.

누르하치…지금의 그는 무서운 인물이었다. 단순히 몇마디만 오고 갔지만 그녀는 느낄수 있었다.

눈앞의 누르하치는 전에 고륵성에서 탈출하고 헤투알라성을  방문할때 보았던 그의 앳된 모습들과는 확연히 구분되었다. 일년이 지난 사이 그는 퍼그나 냉정하고 잔인한 인물이 되어있었다.

“나치야를 찾아올 때까진, 부인께선 불편하시더라도 잠시 여기 계셔야겠습니다.”
“헛된 꿈은 버리세요. 나치야도, 나도 결코 당신 마음대로 조종당하진 않을 거니까요.”

서은의 단호한 말에 누르하치는 피씩 웃으며 말했다.

“제가 부인이라면…하루빨리 나치야가 잡혀오고 부인이 풀려나길 기도하겠습니다.”
“누르하치!”

서은은 머리를 돌려 휘장밖의 그를 노려보았다.

“당신 마음속의 야망과 명에 대한 원한은 잘 알고있습니다. 하지만 부디 내 말을 잘 기억하십시오.”
“…”
“무력으로만 천하를 정복하려 말고 마음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법을 먼저 익히십시오.”
“천하를 정복하다니요…”

누르하치가 여전히 웃음띈 목소리로 말했다. 어렴풋하지만 그의 어조에 언뜻 독기가 느껴졌다.

“소인은 다만 건주좌위 도독이고 일개 작은 여진부락 추장일뿐입니다. 야망이니 천하니…부인께서 너무 넘겨짚으시는 게 아닙니까.”
“지난 1년동안 당신의 움직임이 요동지역 작은 추장 자리를 지키기 위함일까요? 누르하치, 당신의 야망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있습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녀의 날카로운 말에 누르하치의 다시 침묵했다. 방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흘렀고 그들사이의 공기는 터질듯 팽팽해져 있었다. 그렇게 휘장을 사이두고 한참 노려보다가, 누르하치는 몸을 홱 돌려 방문을 나섰다.

서은은 온몸의 탕개가 풀렸다. 맹고가 휘장을 젖히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억지로 정신을 가다듬었다.

“날…상관하지 마세요.”
“왜 이렇게 자신의 몸을 허타이 구십니까.”

맹고의 어조에 안타까움이 서렸다. 서은의 창백한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맹고…저번에 제게 말씀하시기를…아기를 잃으셨다고 했지요…”

맹고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곧 체념하고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네…그뒤로 줄곧 건강이 회복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서은은 허구픈 미소를 지었다. 언젠가 신충일과 이여백이 헤투알라성을 방문했을 때, 자신이 뒤따라와 맹고의 회임을 알고 그녀의 처소에 잠복했던 일이 머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그때의 자신은 얼마나 단순하고 저돌적이었던가. 이상한 사람들이 저택에 드나들어 맹고가 누르하치의 신임과 총애를 잃게 된다면 나중에 홍타이지가 태어나지 않을수고 있고 그로 인해 역사에 변화를 줄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 보면 맹고에 대한 누르하치의 사랑은 결코 쉬이 줄어들지 않는 것을. 그때의 무모했던 자신의 열정을 떠올리며 그녀는 힘없이 웃었다.

“아마도 벌을 받나 봅니다.”
“네?”
“감히 천기를 거스르려는 벌,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은 한낱 아기의 존재도 탐탁치 않아한 죄…제가 그때의 벌을…지금 받나 봅니다.”

겨우 이 한마디를 내뱉은 후 그녀는 다시 의식을 잃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휘장에 길게 비쳐져 있었다. 하나는 누르하치의 그림자인 듯 했고, 하나는 자그마한 약상자를 메고있는걸 보아 여진부락의 의원인 듯 했다. 그녀는 모지름을 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러…가십시오.”

그녀의 무기력한 말에 누르하치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손을 내밀어 휘장을 걷어올렸다. 그의 눈길이 서은의 창백한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꼭 이렇게 하셔야 합니까.”
“내가 여기서 죽는 걸…보고싶지 않거든 이젠 그만 보내주시죠.”
“광녕성밖을 홀로 나오셨으면 부인께서 이여백을 떠난 것이 아닙니까. 대체 어디를 보내달라는 말입니까.”

서은은 고개를 들어 누르하치를 보았다. 그녀의 눈빛에서 짙은 슬픔이 보였다. 그녀는 그런 눈빛으로 누르하치를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당신이…뭘 안다고 그럽니까.”
“…”
“나치야를…이런 식으로밖에 데려오지 못하는 당신이…사람의 감정을…알면 얼마나 안다고…”
“…”
“나치야의 입장을…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일을…일을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 애초에…도륜성을 도륙내지도 않았을…것입니다.”
“…”
“당신에게 있어선…여인보단 천하가 우선이고…감정보단 무력이 우선입니다.”
“…”
“나치야의 마음을 얻으려면…우선은 나치야가 더이상 눈물 흘리지 말게 해야 하는 것을…당신이…당신이 그런 걸 알기나 합니까.”
“부인의 말이 지당합니다.”

뜻밖에도 누르하치가 순순히 대답을 했다.

“저는 여인의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저는 여인의 마음보단 천하가 우선이고, 제 자신의 감정보단 요동의 강산이 우선입니다. 그 다음 순서로는 명을 향한 원한이 있고, 요동 총병과 그 후계자에 대한 견제도 시급합니다. 그게 뭐가 잘못이란 말입니까.”
“잘못…잘못은 아니겠죠.”

서은은 여전히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의 눈길은 누르하치를 넘어 잠시 허공에 초점을 두었다.

“그런 식으로 따진다면, 이 세상…그 누구도 잘못이 없습니다…다들…자신의 입장이 있고…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까지…서슴치 않고 있지요…단…한사람도…그 누구도…이런 이기심을 버릴수는 없나봅니다…그래서 우리는…윤회를 거듭하고 있고…생과 사를…반복하면서 죄를 쌓고있는 것입니다.”

누르하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잠시 멍해 있다가, 고개를 돌려 의원에게 물었다.

“괜찮겠소?”
“일단 진맥을 할수 없어 자세한 상황은 알수 없으나…안색과 기력을 보아하니 더이상 음식을 들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누르하치가 손을 젓자 맹고가 쟁반을 받쳐들고 앞으로 다가왔다. 누르하치는 쟁반위의 죽그릇을 받아들고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침상옆으로 다가왔다. 서은은 그제야 그의 거동을 알아차리고 침상안으로 몸을 움츠렸다.

“뭐하자는…겁니까.”
“조금이라도 드셔야 합니다.”

그녀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리고 외면하자, 누르하치의 눈길이 삽시에 싸늘해졌다. 뒤이어 그는 죽그릇을 들지 않은 한손을 내밀어 그녀의 턱을 움켜잡았다. 거친 행동이었다. 그의 억센 손아귀에 서은은 미처 반항할 힘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몸을 뒤틀며 그의 손을 쳐냈다.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놓으세요…”
“억지로라도 먹이겠습니다.”

누르하치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서은은 팔에 힘을 주어 그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 쟁강 소리와 함께 죽그릇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누르하치는 깨어진 그릇을 잠시 내려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의 눈빛은 분노로 인해 섬뜩한 기운을 풍겼다.

“지금까지 이렇게 제게 반발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내 몸에 손대지 말아.”

서은은 이를 악물고 누르하치를 노려보았다. 누르하치는 그런 그녀를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 분을 떠나고도, 설마 그 분이 와서 구해주길 기다리는 건 아니겠지요.”
“…”
“이 누르하치의 세작도 허술히 보지 마십시오. 공주님…”

그녀가 여전히 그를 노려보며 잠자코 있자, 그는 불현듯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니면 차라리 그 분에게 알려서 나치야와 부인을 바꾸는 건 어떨 것 같습니까. 부인이 여기 있다는걸 알면, 이도련님은 당장 나치야를 묶어서라도 보내올테니까요.”
“그 사람에게 알리면…넌 내 주검을 거두게 될 것이다.”

그녀가 이를 부드득 갈며 하는 말에, 누르하치는 머리를 젖히고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야 부인이 무엇을 두려워 하시는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어떡합니까. 이미 사람을 총병부에 보냈는 걸요.”

서은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누르하치는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당신의 이여백은 내일까지 이곳에 와야 할 것입니다. 군사 한명 데리고 와서는 안되고, 꼭 필마단기로 오라고 신신당부 하였지요. 아주 놀라운 것을 보여드린다고.”
“나쁜자식…”

서은이 이 한마디를 내뱉자, 누르하치는 한결 싸늘하게 웃었다.

“제가 이런 좋은 기회를 왜 놓치겠습니까. 요동 총병님과 그 총병님께서 제일 사랑하는 아드님이 제 손아귀에서 놀아날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
“물론 이여백은 나치야를 당신과 맞바꾸자고 하겠지요. 부인께선 제가 어떻게 대답할 것 같습니까.”

서은은 아예 듣기조차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누르하치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말했다.

“물론 좋다고 대답하겠습니다. 이여백의 무예로 나치야를 찾아오는 것 정도는 주머니에서 물건 꺼내기와도 같은 일이니까요. 그다음 나치야는 저의 네번째 푸진이 될 것이고…”

누르하치는 잠시 말을 끊고 그녀를 보다가 다시 유유하게 말을 이었다.

“부인은 어차피 광녕성을 떠나 갈곳도 없어보이니 차라리 저의 다섯번째 푸진의 자리는 어떠실지.”

서은은 피가 터지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역사에 기재된 누르하치처럼…지금 그녀에게 이토록 냉혹한 말들을 내뱉는 눈앞의 누르하치는 포악하고 잔인한 군주가 되기에 전혀 손색이 없어보였다. 누르하치는 계속 말했다.

“결국 나치야는 제 곁으로 올 것이고, 이여백은 부인이 여기 있는 한 헤투알라성을 빠져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 아드님때문에 총병님은 바로 군사를 동원할 것이고, 또 부인의 그 오라버니…금상폐하께서도 지금쯤이면 수렵을 끝내셨을 터이니, 당신의 친여동생의 일을 절대 수수방관하진 않을테지요.”
“…”
“요동 총병과 만력황제만 손에 넣으면…중원은 떼놓은 당상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당신은…역모의 길로 가는 건가요.”

그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만력의 행방까지 아는 누르하치에게 경외심이 들었지만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다. 어렵게 냉정을 되찾은 듯 그녀의 어조가 한결 차분하게 들렸다.

“요동에서 총병 하나를 잃고, 조정에서 황제 하나를 잃었다 하여, 나라를 들어다 통채로 바치지는 않을텐데요.”

누르하치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역모? 명조정은 저의 조정이 아닌데, 여기서 왜 역모라는 말이 나와야 합니까.”
“…”
“명조정이 지금까지 저한테 해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명조정이 요동지역 여진 민족에게 베푼 것은 또 무엇이 있습니까.”
“…”
“이건 역모가 아니라, 우리 여진인의 각성입니다.”
“당신의 야망을…그런 말들로 포장하려 들지 마세요.”

그녀는 여전히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는 잠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누르하치를 보았다. 그녀의 눈빛에 담긴 이름못할 서글픔에, 누르하치는 살짝 망연해진 듯 보였다.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누르하치, 당신은…한 사람을 사랑해본 적 있나요?”
“…”
“진심으로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구경 어떤 느낌인지 알고는 있나요?”
“…”
“나치야가 당신을 떠난 것이…바로 그 이유입니다.”
“…”
“당신은…사랑이 뭔지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나치야를 사랑하지 않았고…다른 사람을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
“당신은…천하를 정복하기 좋아하고, 여인을 품에 안기 좋아할 뿐입니다. 당신은 여인을 아끼기보다는, 여인을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부인…”

누르하치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고, 서은은 문득 그를 향하여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보었다.

“그래서 당신은 쉽게 그런 말을 할수 있습니다. 맹고를 옆에 두고, 나치야를 데려오려는 마당에, 또 저한테 다섯번째 푸진의 제의를 하는 것 말입니다.”
“…”
“사랑은 소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놓아줄줄도 알아야 합니다.”
“…”
“이젠 제가 알려드리지요…사랑이란…진정한 사랑이란 대체 무엇인지를…”

그녀의 찬연한 미소가, 사람의 넋을 빼놓을 듯한 눈부신 미소가 그녀의 단검속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그 단검의 단면에 누르하치의 사색이 된 얼굴이 고스란히 담겼다.

“부인!”

그녀는 천천히 쓰러졌다. 빨간 피가, 마치 붉은 꽃잎을 방불케 하는 피가 그녀의 옷 앞섶을 수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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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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