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 오늘따라 서울의 밤하늘은 유난히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달은 시리도록 밝았으나, 수시로 지나가는 짙은 구름에 가려져 화실 앞거리에 불안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현수 씨, 나 조금 어지러워서 그래. 오늘은 식당 말고… 그냥 좀 걷고 싶어.”

예린의 목소리는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하지만 곁에 선 현수는 그녀의 창백한 안색을 그저 전시회의 여독 정도로만 여길 뿐, 그녀의 주머니 속에 어떤 진실이 들어있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캠퍼스의 늦가을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가 들릴 때마다 주머니 속의 차가운 플라스틱 막대가 예린의 허벅지를 찔러왔다. 그것은 지난 3년간 그녀를 옭아맸던 거짓된 병명을 깨뜨린 유일한 증거였으나, 동시에 그녀를 단단히 지탱해주던 이 안식처를 산산조각 낼 시한폭탄이기도 했다.

“누나, 다음 전시회 때는 우리 설치 미술을 좀 더 과감하게 해보는 거 어때? 이번 대상 덕분에 학교에서 지원금도 나올 거야. 내가 캔버스 프레임부터 완전히 새로 짜볼게. 누나는 그냥 그림만 그려. 뒤치다꺼리는 내가 다 할 테니까.”

현수는 아이처럼 들뜬 목소리로 미래를 재잘거렸다. 왕펑이 만들어준 유리 진열장이 숨 막히는 안락함이었다면, 현수가 그려주는 미래는 거칠지만 살아 숨 쉬는 날것의 캔버스였다.

하지만 현수의 말들은 예린의 귀에 닿지 못하고 허공으로 흩어졌다. 현수의 저 맑고 순수한 눈동자가, 지금 예린에게는 가장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가슴을 후벼팠다.

그때였다. 저 멀리 교정 언덕길에서 누군가 사색이 된 얼굴로 헐레벌떡 뛰어 내려오고 있었다.

“张艺琳! 哎呀,急死我了!” (장예린! 아이고, 내가 너 때문에 정말 미치겠다!)

익숙한 중국어 억양이 고막을 때렸다. 리링링이었다.

그녀는 예린의 대학원 직속 선배이자, 이곳 아트리움 석사 과정에 들어올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준 은인이었다. 늘 우아하고 여유롭던 그녀가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줄도 모르고 숨을 몰아쉬며 달려오고 있었다.

링링은 예린 곁에 선 현수를 보고 흠칫 놀라는 눈치였으나, 지금은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곧바로 예린의 팔을 덥석 잡았다. 손이 차갑게 떨리고 있었다.

“琳琳,你怎么把手机关了?我也联系不上你,真以为出什么事了呢。” (린린아, 너 왜 휴대폰을 꺼놨어? 나까지 연락이 안 되니까 진짜 무슨 일 난 줄 알았잖아.)

“언니… 무슨 일이에요? 왜 이렇게…”

리링링은 현수의 눈치를 한번 살피더니, 예린에게 휴대폰 화면을 들이밀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중국어였지만, 그 내용은 비명처럼 날카로웠다.

“큰일 났어. 왕펑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왔어. 지금 서울에 도착했대.”

[玲姐,琳琳联系不上。母亲很担心,所以我亲自陪母亲来韩国了。现在在首尔玛杰斯蒂酒店,能帮忙转达一下琳琳吗?拜托了。] (링 언니, 린린이가 연락이 안 되네요. 어머니께서 걱정이 많으셔서 직접 제가 어머님 모시고 한국에 왔습니다. 지금 서울 마제스티 호텔에 있으니 린린이에게 좀 전해줄 수 있나요? 부탁드립니다.)

링링은 예린의 창백해진 손을 꼭 쥐며 간곡하게 말했다.

“艺琳啊,快去吧。你知道婆婆的脾气。要是让她知道你在外面晃荡还不接电话,不仅是你,连这学校都要被翻个底朝天。我是为了你好,快去露个面,哪怕是装装样子也好。” (예린아, 어서 가봐. 시어머니 성격 알잖아. 밖에서 연락 두절된 거 알면 너는 물론이고 이 학교까지 뒤집어 놓으실 분이야.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가서 얼굴이라도 비춰. 시늉이라도 해야 무사히 넘어가지.)

그것은 경고가 아니라, 예린이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언니로서의 간절한 조언이었다.

예린과 리링링이 나누는 심상치 않은 중국어 대화, 그리고 공포에 질린 예린의 표정을 지켜보던 현수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그는 불길한 예감을 감지한 듯 거칠게 끼어들었다.

“잠깐만요.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누나 지금 몸도 안 좋은데 어딜 간다는 거야? 무슨 집안 어른이 예고도 없이 이래요? 연락 안 되면 안 되는 거지, 사람을 잡으러 온 것도 아니고!”

현수의 눈에는 당혹감과 질투, 그리고 예린을 지키고 싶은 무모한 열망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예린을 보호하려는 듯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리링링은 그런 현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현수 씨, 그게 아니야!”

예린은 현수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예린은 리링링이 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며, 짐짓 더 표독스럽고 차갑게 현수를 밀쳐냈다.

“내 남편이… 집안 어르신을 모시고 오셔서 가봐야 한다고! 넌 빠져!”

남편이라는 단어가 현수의 가슴을 정통으로 찔렀다. 현수의 표정이 멍하게 굳어졌다. 상처받은 그의 눈동자를 보는 것이 지옥 같았지만, 예린은 멈추지 않고 리링링에게 짧은 눈짓을 보냈다.

예린은 도망치듯 도로변으로 뛰어 나가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가 급하게 출발했다. 차창 밖으로, 멍하니 서 있는 현수와 그를 바라보는 리링링의 모습이 빠르게 멀어졌다. 백미러 속에 비친 현수의 상처 입은 얼굴이 점 하나가 되어 사라질 때까지, 예린은 차마 눈을 감지 못했다.

택시 안의 공기는 질식할 듯 무거웠다. 예린은 주머니 속의 차가운 플라스틱 테스트기를 손가락이 하얗게 질리도록 꽉 움켜쥐었다.

문득, 입안에서 지독한 쓴맛이 올라왔다. 3년 내내 특효약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받았던 그 검고 끈적한 액체들의 기억이었다. 시어머니 앞에 사실을 털어놓고 테스트기를 근거로 따져야 할지, 아니면 그 중약의 효험이라며 찬양을 해야 할지 착잡했다.

'설마… 그 약이…'

서늘한 의심이 비수처럼 스쳤다.

그것은 메마른 땅을 적시는 단비가 아니라, 오히려 싹이 트지 못하게 누르는 제초제였던 것은 아닐까. 그녀를 얌전하게 다듬어 그들의 진열장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장식품으로 만들기 위한, 아주 은밀하고도 지속적인 마취제.

정성으로 포장된 그 쓴맛이 몸을 재우고 있었고, 금기라고 믿었던 일탈이 도리어 몸을 깨웠다.

이 잔인한 모순 앞에서 예린은 헛웃음을 삼켰다. 안도감보다는 사무치는 배신감이 먼저였다. 그녀는 고장 난 것이 아니었다. 그저 타인의 욕망에 의해 철저히 옥죄여지고 억압받아왔을 뿐이었다.

택시가 도심의 화려한 네온사인을 지나 호텔 입구의 회전문 앞에 멈춰 섰다. 거대한 호텔 건물은 마치 그녀를 다시 삼키기 위해 입을 벌린 북경의 대저택처럼 보였다.

예린은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차 문을 열었다.

이제부터는 자유로운 영혼의 작가 장예린이 아니었다. 감정을 거세당한 인형, 시댁의 가스라이팅에 순종하는 며느리라는 가면을 다시 써야 할 시간이었다.

이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은밀한 혁명이 함부로 해석되지 않기를, 그리고 이 예고 없는 폭풍이 무사히 지나가기만을 간절히 빌며, 그녀는 차가운 대리석 로비로 발을 내디뎠다.

つづく

「本小说为作者独立创作的虚构故事,所有人物、情节、背景均为艺术加工,与现实中的任何个人、团体或事件无任何关联。若有巧合,纯属偶然。

본 소설은 작가가 독자적으로 창작한 허구적 이야기로, 모든 인물·줄거리·배경은 예술적 가공의 결과이며, 현실 속 개인·단체·사건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혹시 유사점이 있다면 이는 순전히 우연입니다.」

금기된 캔버스

제1장: 새로운 생활의 캔버스
제2장: 빗속의 만남
제3장: 색채의 공명
제4장: 그라데이션 컬러
제5장: 심연의 대화
제6장: 기교의 감옥, 빗장 너머의 시선
제7장: 박제된 초상과 소주 한잔
제8장: 뭉개진 형상, 주체의 탄생
제9장: 비명과 침묵의 밸런스
제10장: 남편의 방문, 그리고 해석된 비명
제11장: 증명된 <갈망>, 그리고 빗속의 동행
제12장: 거짓 없는 몸, 잔인한 기적
제13장: 무너진 유예, 다시 쓴 가면
제14장: 깨진 독, 쏟아진 기만
제15장: 하늘에 흩뿌린 거짓말
제16장: 가장 안전한 공범
제17장: 지워진 흔적, 차가운 다짐
제18장: 황금 감옥의 대가
제19장: 회색의 시간을 넘어
제20장: 비로소 채워진 캔버스 (最終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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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가을

남은 시간 ... 한땀한땀 걸어 온 길과 주변에 들은 이야기들을 글로 꾸며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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