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장마차의 새벽 공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아침, 예린은 화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날 밤 현수의 위로는 숙취처럼 무거웠지만, 그 속에 담긴 따뜻함은 여전히 가슴 한구석에 머물러 있었다. 손에 잡히지 않는 온기처럼, 사라졌으나 분명 남아 있는 감각이었다.
307호 화실에는 어젯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예린은 자신의 100호 캔버스 앞에 섰다.
캔버스 위에는 그녀가 며칠 밤을 새워 완성해 가던 그림이 있었다. 창백한 조명 아래 앉아 있는 얼굴 없는 나체의 여인. 그 여인의 앞에는 검고 투박한 약탕기가 놓여 있었고, 그 여인의 시선이 머무는 중심에는,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어떤 기척이 겹겹이 눌려 있었다.
그것은 예린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고백이었다. 자신의 몸과 삶을 둘러싸고 반복되어 온 질문들, 그리고 설명되지 않은 갈망을 그대로 쏟아부은 그림. 그러나 그 갈망은 스스로 선택한 미래라기보다, 오랜 시간 주입받아 온 상상에 가까웠다. 원해서라기보다는, 원해야만 했던 어떤 형상.

예린은 붓을 든 채 움직이지 못했다. 어젯밤 포장마차에서 토해냈던 그 뜨거운 날것의 감정과 눈앞의 그림은 너무나 달랐다. 캔버스 속의 여인은 지나치게 조형적이었고, 슬픔조차 계산된 구도로 배치된 연극 무대 같았다.
이 그림을 완성하는 순간, 자신은 또 한 번 누군가가 원하는 이야기를 대신 살아주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예린은 쥐고 있던 붓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이건… 장예린이 아니야.’
그녀는 팔레트에 검은색과 붉은색 물감을 듬뿍 짰다. 그리고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방금까지 공들여 묘사했던 얼굴 없는 여인의 몸 위로, 무자비하게 날을 박아 넣었다.
“치익, 츠우욱—”
날카로운 금속 날이 지나갈 때마다 매끄러운 살결은 뭉개졌고, 정교하게 그렸던 약탕기는 형체를 잃은 검은 얼룩으로 변해갔다. 예린은 나이프도 모자라 손바닥으로 캔버스를 문질렀다. 의미를 부여받았던 형상들 역시 검붉은 혼돈 속으로 처참히 사라졌다.
예린은 캔버스를 뒤덮은 혼돈 위에 다시 검은 물감을 끼얹었다. 그 검은색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숨 쉬듯 반복되던 말들, 언제나 곁에서 판단하던 목소리들이 엉겨 붙은 색. 그녀의 숨통을 조여 오던 공기 그 자체였다.
검은색이 캔버스를 집어삼킬 듯 번져 나갔다. 예린은 그 어둠의 한복판을 맨손으로 긁어냈다. 손톱 밑으로 물감이 파고들고 살갗이 쓸려 나갔지만 멈추지 않았다.
검은 물감이 닦여 나간 자리에 하얀 캔버스 천이 상처처럼 드러났다. 예린은 그 빈자리에 어떤 의미도 붙이지 않기로 했다. 어떤 이름도 붙이지 않은 채로. 무엇으로도 먼저 규정되지 않은 상태로 남겨두고 싶었다.
그녀는 붉은색 튜브를 집어 들었다. 뚜껑을 열고, 그 하얀 상처 위로 튜브를 통째로 짜내렸다.
툭, 투둑.
끈적한 붉은 물감이 덩어리째 떨어져 내렸다. 예린은 손가락으로 그것을 짓이겨 사방으로 퍼뜨렸다. 핏방울 같기도, 어둠을 뚫고 기어이 피어오르려는 맥박 같기도 한 붉은 점들.
설명적인 묘사는 단 한 줄도 남지 않았다. 나체도, 약탕기도 사라졌다. 캔버스 위에는 오직 서로를 집어삼키려는 검은 압박과, 그 틈을 비집고 터져 나오려는 붉은 생명력만이 엉겨 붙어 싸우고 있었다.
형태는 사라졌지만 감각은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캔버스 위에는 이제 ‘장예린’이라는 이름의 비명만이 물성을 얻어 꿈틀거리고 있었다.
현수는 자신의 이젤 앞에서 그 광경을 목격했다. 며칠째 공들여 묘사하던 <구원을 바라는 손>의 손톱 주름을 세밀하게 다듬던 중이었다.
현수의 시선이 예린의 캔버스에 박혔다. 찢기고, 뭉개지고, 피를 토하듯 쏟아져 나온 저 붉은 덩어리들. 그 압도적인 에너지 앞에서 현수는 숨을 들이켰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자신의 섬세한 묘사력, 사진보다 더 리얼한 피부 질감, 애처롭게 뻗은 손가락의 곡선…
그런데 이상했다.
방금 전까지 완벽해 보였던 그 손이, 예린의 저 처절한 핏빛 추상 옆에 놓이는 순간 마치 '죽은 밀랍 인형'처럼 생기를 잃어버렸다.
‘역겨워.’
현수는 처음으로 자신의 그림에서 구역질을 느꼈다. 그것은 타인(예린)에 대한 열등감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잘 그린다'고 믿어왔던 것이, 사실은 본질을 외면한 채 껍데기만 핥고 있었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였다.
‘나는 그동안 손을 그린 게 아니라, 손 모양을 흉내 내고 있었을 뿐이야. 진짜 절박함은… 저렇게 형태가 무너질 때 나오는 건데.’
현수는 붓을 내려놓았다. 손끝이 떨려왔다. 예린의 파괴 행위가 현수 안에 잠자고 있던 어떤 벽을 깨뜨린 것이었다.
‘지겨워, 이 얄팍한 기교들. 나도… 진짜를 그리고 싶어.’
현수는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아꼈던, 예린이 '도전하고 싶다'고 말했던 그 정교한 손가락 위로 망설임 없이 나이프를 꽂았다.
서걱.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공들여 그린 손톱이 뭉개졌다. 현수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비굴하게 구부러져 있던 손가락들을 거칠게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물감을 두껍게 발라 위로 쳐올렸다.
가느다란 손가락은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 뼈대만 남은 듯한 굵은 직선들이 들어섰다.

그것은 누군가를 잡으려는 손이 아니라, 스스로 우뚝 서려는 기둥이었다. 더 이상 무언가를 갈구하며 손을 뻗는 나약한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하게 존재하는 수직의 의지. 현수는 비로소 자신의 캔버스에서 살아있는 숨결을 느꼈다.
일주일이 지나고, 창으로 들어오는 늦은 오후의 햇살이 화실 바닥에 길게 누울 무렵,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작업을 멈췄다.
“…끝났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젖은 물감이 마르며 내는 비릿하고 미세한 향기만이 화실을 채웠다.
예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는 물감과 땀으로 범벅이 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자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현수 씨… 솔직하게 말해줘요. 이거… 그냥 흉터 같지 않아요? 그냥 속이 뒤집혀서 토해놓은 엉망진창인 것 같아서…”
현수는 대답 대신 예린의 캔버스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뒷짐을 진 채 그 붉은 덩어리들을 응시했다.
“토해놓은 거 맞아요. 그래서 압도적인 겁니다.”
현수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담담하게 말했다.
“매끈하게 포장된 건 다 가짜였어요. 누나 그림은 지금 날것 그대로예요. 불편하고, 거칠고. 그래서 눈을 뗄 수가 없네요. 솔직히… 좀 질투 날 정도로.”
현수의 말에 예린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현수의 캔버스로 시선이 옮겨갔다. 그리고 숨을 멈췄다.
그녀가 알던 그림이 아니었다. 그녀가 그토록 따라잡고 싶어 했던 섬세한 손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는 폭풍우를 뚫고 솟아오른 묵직한 푸른 기둥들이 서 있었다.
“현수 씨… 그림이…”
예린은 말을 잇지 못했다.
“왜 바꿨어요? 그 손… 내가 정말 좋아했던 그림인데. 나 그거 보고 자극받아서 시작한 건데.”
“그 손은 거짓말이었거든요.”
현수가 헝겊으로 손에 묻은 물감을 닦아내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누나가 캔버스를 찢어발길 때 깨달았어요. 나는 그동안 감정을 그린 게 아니라, 그냥 예쁜 손을 그리고 있었다는 걸. 진짜 절박하면 손 모양 따위가 중요하지 않은 건데.”
현수는 이젤에 기대어 자신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아쉬움이 아니라, 껍질을 깨고 나온 작가 특유의 후련함이 서려 있었다.
“그래서 다 지워버렸어요. 껍데기 말고, 뼈대만 남기고 싶어서. 잡으려고 애원하는 손이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 버티고 서 있는 거. 그게 진짜 내 마음 같았거든요.”
예린은 현수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가 그림을 바꾼 건 자신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예린의 파격에 자극받아, 스스로 알을 깨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간 것이었다. 그 사실이 예린을 더욱 전율하게 했다. 동정이 아닌, 치열한 예술적 동지애가 느껴졌다.

예린은 현수의 그림과 자신의 그림을 번갈아 보았다.
검붉게 요동치는 파도 같은 그녀의 캔버스. 그리고 그 바로 옆에서 묵묵히 그 파도를 견뎌내고 있는 푸른 기둥들.
전혀 다른 두 개의 추상화였지만, 각자의 처절한 싸움 끝에 도달한 지점에서 기묘한 조형적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렇네요. 이제야 진짜 현수 씨 같아요.”
예린의 말에 현수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비싼 수업료 냈다고 생각해요. 서로에게.”
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나란히 서서 각자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307호 화실, 마르지 않은 붉은 파도와 푸른 기둥이 어둠 속에서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つづく
「本小说为作者独立创作的虚构故事,所有人物、情节、背景均为艺术加工,与现实中的任何个人、团体或事件无任何关联。若有巧合,纯属偶然。
본 소설은 작가가 독자적으로 창작한 허구적 이야기로, 모든 인물·줄거리·배경은 예술적 가공의 결과이며, 현실 속 개인·단체·사건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혹시 유사점이 있다면 이는 순전히 우연입니다.」
금기된 캔버스
제1장: 새로운 생활의 캔버스
제2장: 빗속의 만남
제3장: 색채의 공명
제4장: 그라데이션 컬러
제5장: 심연의 대화
제6장: 기교의 감옥, 빗장 너머의 시선
제7장: 박제된 초상과 소주 한잔
제8장: 뭉개진 형상, 주체의 탄생
제9장: 비명과 침묵의 밸런스
제10장: 남편의 방문, 그리고 해석된 비명
제11장: 증명된 <갈망>, 그리고 빗속의 동행
제12장: 거짓 없는 몸, 잔인한 기적
제13장: 무너진 유예, 다시 쓴 가면
제14장: 깨진 독, 쏟아진 기만
제15장: 하늘에 흩뿌린 거짓말
제16장: 가장 안전한 공범
제17장: 지워진 흔적, 차가운 다짐
제18장: 황금 감옥의 대가
제19장: 회색의 시간을 넘어
제20장: 비로소 채워진 캔버스 (最終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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