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특유의 건조하고 서늘한 9월의 바람이 일찍 떨어진 은행잎 몇 장을 휘감아 아트리움 미술대학 정문의 유리 커튼월을 신경질적으로 때렸다. 28인치 대형 캐리어를 끌고 계단 아래에 멈춰 선 장예린은 차가운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며 한참 동안 숨을 골랐다.

   사실 이 유학은 도망에 가까운 절박한 선택이었다. 하북성 인근의 작은 농촌 마을에서 태어난 예린은 오로지 천부적인 재능과 지독한 노력만으로 중국 최고의 명문 미술학원 유화과를 졸업한 수재였다. 출중한 실력에 모델처럼 헌칠한 키와 수려한 외모까지 갖춘 그녀였지만, 본가의 지독한 가난은 늘 그녀의 발목을 잡는 족쇄였다. 결국 예린은 본가의 형편을 일으키기 위해 자신의 예술적 야심을 억누르고, 조건이 압도적이었던 왕펑과 소개팅으로 만나 결혼했다.

    남편 왕펑의 집안은 북경의 근사한 아파트 단지에 거주하는 고간부 가족이었다. 왕펑은 북경의 모 기간 단위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는 안정적인 엘리트이자, 대대로 귀한 집안의 뿌리를 이을 유일한 외동아들이었다. 집안의 모든 기대와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란 그였기에, 왕펑에게 아이를 갖는 일은 단순히 개인의 소망을 넘어 가문의 대업과도 같았다. 두 사람은 신혼집을 따로 내는 대신 부유한 시부모의 넓은 아파트에서 함께 살았다. 집이 워낙 커서 방이 여러 개였기에 예린에게는 개인 작업실까지 따로 주어졌고, 그녀는 인근 중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재직하며 겉보기엔 남부러울 것 없는 북경 사모님의 삶을 누리는 듯했다.

    하지만 화려한 아파트 안에서의 삶은 색채 없는 정물화 속에 갇힌 것과 다름없었다. 거실 한쪽, 고풍스러운 목제 의자에는 시아버지가 늘 조각상처럼 앉아 있었다. 그는 집안에서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아침마다 배달되는 인민일보를 빳빳하게 펴 들고, 찻잔 속의 찻잎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신문 너머로 예린을 무심히 관조할 뿐이었다. 시어머니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예린에게 서슬 퍼런 훈계를 늘어놓을 때도, 시아버지는 그저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신문 페이지를 거칠게 넘겼다. 그 규칙적인 종이 마찰음은 예린에게 이 집안에서 네가 해야 할 유일한 가치는 대를 잇는 것뿐이라는 무언의 선고처럼 들렸다.

    그 사이에서 남편 왕펑은 다정한 방관자로 일관했다. 그는 퇴근 후 작업실에 있는 예린의 어깨를 짚어주며 늘 같은 말을 반복했다. "린린, 어머니 말씀 들어서 나쁠 거 없어. 다 우리 가족과 아이를 위해서야." 귀하게 자란 외동아들의 그 매끄러운 다정함은 오히려 예린의 영혼을 조금씩 갉아먹었다.

    지옥 같은 일상 속에서 예린은 죽지 않기 위해 남몰래 붓을 들었다. 그때 그녀의 구원자가 되어준 것은 대학 선배 리링링이었다. 아트리움에서 박사 과정을 마친 후 현지에서 큐레이터로 활동하던 링링은 왕펑의 집안과도 오랜 친분이 있어 남편조차 그녀의 말을 함부로 무시하지 못했다. 링링은 예린이 보내오는 작품들을 보며 탄식 섞인 권유를 멈추지 않았다. "예린아, 명문미대 수석 졸업생인 네가 북경 시어머니 수발들고 있을 애가 아니야. 이건 네 인생의 마지막 비상구야. 당장 짐 싸서 한국으로 와."

    리링링의 적극적인 알선과 치밀한 준비, 그리고 시집의 눈을 피해 준비한 예린의 간절함이 맞물려 기적처럼 합격 통지서를 받아낼 수 있었다. 예린은 캠퍼스 안에서 풍겨오는 고소한 빵 향기와 희미한 테레빈유 냄새를 맡았다. 이 이국적인 공기는 마치 열쇠처럼 지난 3년 동안 북경의 화려한 감옥 속에 굳게 잠겨 있던 그녀의 마음 상자를 단숨에 열어젖혔다. "자유, 이제야 정말 자유로워." 그녀는 서툰 한국어 대신 익숙한 모국어로 나직이 읊조렸다.

    하지만 여행 가방 위에 얹힌 중약 꾸러미를 보는 순간, 그녀의 손끝은 무의식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집을 떠나기 직전 시어머니가 가방 틈새에 억지로 밀어 넣은 그 봉지에는 강신난궁방(降神暖宫方)이라는 퇴색된 라벨이 선명했다. 중약의 쓴맛으로 가득했던 새벽, 이것만 먹으면 아이가 생길 게다라던 시어머니의 잔소리와 남편 왕펑의 무심한 눈빛이 환청처럼 들려왔다. "마셔, 다 우리 가족을 위해서야." 그 목소리들이 캐리어 바퀴 소리와 섞여 그녀를 과거의 억압 속으로 거칠게 밀어냈다.

    예린은 가장 먼저 대학원 학과 사무실을 찾아 입학 등록 절차를 밟았다. 사무실 직원이 건네준 학생증의 [아트리움대학교 미술대학원, 전공: 유화창작]이라는 글자를 손가락으로 가만히 쓸어본 후에야 그녀는 자신이 정말로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배정받은 기숙사는 북경의 넓은 아파트에 비하면 말할 수 없이 비좁고 적막했다. 예린은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침대 위에 짐을 던져두고 곧장 남쪽 창문으로 달려가 낡은 커튼을 젖혔다. 황금빛 햇살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와 찬란한 희망을 흩뿌렸다. "드디어 내가 그리고 싶은 걸 그릴 수 있게 됐어."

    짐 정리를 대강 마친 예린은 리링링의 조언대로 전공 화실을 미리 확인하기 위해 예술동으로 향했다. 방학 끝자락의 화실 복도는 고요함 속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예린은 자신의 이름이 붙은 화실 구역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창고처럼 쓰이던 공간 구석에는 회색 방진 천으로 덮인 커다란 액자가 벽을 등지고 세워져 있었다. 예린은 다가가 방진포의 한쪽 귀퉁이를 잡고 조심스럽게 들춰보았다.

    먼지가 햇살 속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캔버스 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미완성의 추상화였다. 깊은 바다의 소용돌이 같은 코발트 블루와 군청색, 그 가장자리로 찢어진 상처처럼 튀어나온 주홍색과 크롬 옐로. 그림 전체에는 강렬한 불안과 몸부림, 그리고 원시적인 생명력이 동시에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마치 화가의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열정과 고통을 캔버스 위에 그대로 쏟아부어 굳힌 것만 같았다.

    예린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중국 명문미대에서도 이토록 직설적이고 파괴적인 색채는 본 적이 없었다. "이 그림은… 갇힌 사람을 그린 걸까?" 그녀는 홀린 듯 손을 뻗었지만, 손가락이 캔버스에 닿기 직전 멈칫하며 손을 거두었다. 차가운 타국의 공기가 전해지자 마음속의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이 가라앉았다.

    "됐어, 어차피 내 것도 아닌데." 그녀는 자조 섞인 혼잣말을 내뱉으며 다시 방진포를 덮었다. 하지만 몸을 돌리려는 찰나, 캔버스 가장자리에 남은 작은 세부 묘사가 시야에 걸렸다. 군청과 코발트 블루가 만나는 지점에 흰색 물감으로 아주 옅게 그려진 형체 하나가 있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숨겨놓은 듯한 그 모양은… 마치 살기 위해 벽을 긁다 잔뜩 오그라든 손 하나처럼 보였다.

    예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가 급히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곳에는 회색 방진포만이 고요하게 드리워져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예린의 손등에는 그 그림에서 뿜어져 나온 차가운 열기가 여전히 화끈거리고 있었다.

つづく

「本小说为作者独立创作的虚构故事,所有人物、情节、背景均为艺术加工,与现实中的任何个人、团体或事件无任何关联。若有巧合,纯属偶然。

본 소설은 작가가 독자적으로 창작한 허구적 이야기로, 모든 인물·줄거리·배경은 예술적 가공의 결과이며, 현실 속 개인·단체·사건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혹시 유사점이 있다면 이는 순전히 우연입니다.」

금기된 캔버스

제1장: 새로운 생활의 캔버스
제2장: 빗속의 만남
제3장: 색채의 공명
제4장: 그라데이션 컬러
제5장: 심연의 대화
제6장: 기교의 감옥, 빗장 너머의 시선
제7장: 박제된 초상과 소주 한잔
제8장: 뭉개진 형상, 주체의 탄생
제9장: 비명과 침묵의 밸런스
제10장: 남편의 방문, 그리고 해석된 비명
제11장: 증명된 <갈망>, 그리고 빗속의 동행
제12장: 거짓 없는 몸, 잔인한 기적
제13장: 무너진 유예, 다시 쓴 가면
제14장: 깨진 독, 쏟아진 기만
제15장: 하늘에 흩뿌린 거짓말
제16장: 가장 안전한 공범
제17장: 지워진 흔적, 차가운 다짐
제18장: 황금 감옥의 대가
제19장: 회색의 시간을 넘어
제20장: 비로소 채워진 캔버스 (最終回)

이 글을 공유하기:

비의가을

남은 시간 ... 한땀한땀 걸어 온 길과 주변에 들은 이야기들을 글로 꾸며 가겠습니다.

작가를 응원해주세요

좋아요 좋아요
4
좋아요
오~ 오~
2
오~
토닥토닥 토닥토닥
0
토닥토닥

댓글 남기기

글쓰기
작가님의 좋은 글을 기대합니다.
1.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글의 초고는 "원고 보관함"에 저장하세요. 2. 원고가 다 완성되면 "발행하기"로 발행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