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남역을 출발한 탕산행 고속열차. 창가 좌석에 몸을 기댄 예린은 열차가 출발하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수술대에서 내려오자마자 제대로 된 몸조리 한번 하지 못한 채, 변호사를 만나고 증거를 수집하느라 탕산과 북경을 오갔던 살인적인 강행군이었다. 찢겨 나간 몸과 바닥난 체력으로 버티던 긴장의 끈이 툭 끊어지자, 기절하듯 잠이 쏟아졌다. 꿈도 꾸지 않는, 달콤하고 깊은 단잠이었다.

“탕산, 탕산역입니다.”
안내 방송에 예린은 퍼뜩 눈을 떴다. 창밖은 이미 익숙한 회색빛 풍경으로 변해 있었다. 그녀는 지체 없이 짐을 챙겨 열차에서 내렸다.
탕산 구예구의 낡은 친정집. 골목 끝에 위태롭게 서 있는 녹슨 철대문. 칠이 다 벗겨져 붉게 녹이 슨 문은 예나 지금이나 굳게 닫혀 있었다.
끼이익—
빗장이 풀린 문을 밀자, 낡은 경첩이 비명을 지르듯 날카로운 쇳소리를 냈다. 도어록은커녕 초인종조차 없는 이 집에서, 이 거슬리는 소음만이 유일한 방문 알림이었다.
예린이 대문을 밀고 들어서자, 코끝이 먼저 반응했다. 매캐한 연탄 냄새와 오래된 집 특유의 눅눅한 곰팡내. 화려한 향수 대신, 환자가 있는 집에서만 맡을 수 있는 무겁고 가라앉은 공기가 폐부로 들어왔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가난의 냄새였다.
마당 한구석, 수돗가에 쭈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빨고 있던 림 여사(친정엄마)가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며칠 사이 더 마른 듯한 얼굴, 푸석한 머리카락. 엄마는 차가운 수돗물에 중풍 든 남편의 기저귀 천을 비벼 빨고 있었다.
“엄마…”
예린의 목소리에 거친 솔질 소리가 뚝 멈췄다. 엄마는 대문 앞에 서 있는 예린을 보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반가움보다는 덜컥, 겁이 먼저 내려앉은 표정이었다.
“린린아…!”
엄마는 젖은 손을 앞치마에 황급히 문질러 닦으며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왔다. 딸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부터 그렁그렁 맺혔다.
“어떻게 됐니? 그 사람들 만났어? 그 독한 시어머니가 가만히 있더냐? 왕 서방은? 너한테 해코지라도 한 건 아니지?”
엄마는 딸의 어깨와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며 안절부절못했다. 북경의 권력가인 시댁이 혹시라도 소송을 건 딸에게 보복하지는 않았을지, 험한 꼴을 당하고 쫓겨난 건 아닐지 피가 마르는 심정이었던 것이다. 예린이 입을 열 틈도 없이 엄마의 질문이 폭탄처럼 쏟아졌다.

“소송은…? 변호사 친구가 도와준다고는 했지만… 그 집안이 워낙 무서운 사람들 아니냐. 혹시라도 꼬투리 잡혀서 더 괴롭힘당하는 건 아닌지…”
엄마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예린은 그런 엄마의 거칠고 젖은 두 손을 와락 맞잡았다. 차가운 물에 불어 터진 엄마의 손마디가 예린의 가슴을 찔렀다.
“엄마. 진정해. 나 봐봐.”
예린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고 맑았다.
“나 괜찮아. 해코지 안 당했어. 그리고 소송 갈 것도 없이 다 잘 끝났어.”
“끝… 났다니?”
예린은 엄마의 손을 꼭 쥐며 안심시키듯 미소 지었다.
“환환이가 소개해 준 북경 변호사가 일을 아주 잘 처리해 줬어. 합의했어. 그 사람들이 자기네 체면 지키겠다고 꼬리를 내렸어. 위자료… 아주 두둑하게 받아왔어. 우리가 이겼어.”
“세상에… 정말이니? 정말 다 끝난 거야?”
“응. 그러니까 엄마, 이제 아빠 기저귀 그만 빨아도 돼. 받아온 돈이면 아빠 병원비, 엄마 노후… 그리고 우리 가족 다시 시작하는 거, 부족하지 않게 다 할 수 있어. 평생 돈 걱정 안 해도 돼. 그 지옥에서 내가 받아온 대가야.”
그제야 엄마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흙바닥에 주저앉아 펑펑 눈물을 쏟았다. 두둑한 위자료를 받아왔다는 사실보다, 그저 딸이 그 무서운 곳에서 다치지 않고 무사히 살아서 돌아왔다는 것, 오직 그 안도감 하나뿐인 눈물이었다.
예린은 주저앉은 엄마를 말없이, 아주 꽉 안아주었다.
예린은 안방으로 들어갔다. 낡은 침대에 누워 있는 아빠는 인기척에 힘겹게 눈을 떴다.
“아빠, 나 왔어.”

예린은 침대 곁에 앉아 거칠고 메마른 아빠의 손등에 자신의 얼굴을 비볐다. 까칠한 아빠의 피부 감촉에 참았던 눈물이 핑 돌았다. 시댁의 그 화려한 대리석 바닥보다, 이 거친 손등이 훨씬 따뜻했다.
‘고생했다… 우리 딸… 내 새끼, 내 귀여운 딸…’
아빠는 말은 하지 못했지만, 그 흐릿하고 깊은 눈빛만으로 딸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예린은 아빠의 손을 꼭 잡으며 속으로 맹세했다.
‘이제 아빠 아프게 안 할게. 내가 지킬게.’
다음 날부터 예린은 일사천리로 움직였다. 친구이자 변호사인 환환이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주었다. 환환의 도움으로 예린은 탕산 시내에 깨끗하고 볕이 잘 드는 새집으로 이사하기로 했다. 예린의 까다로운 조건에 맞는 집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있고, 난방이 잘 되며, 무엇보다 햇볕이 하루 종일 들어오는 남향집.
그리고 아빠를 모실 시설 좋은 전문 요양병원도 수속을 마쳤다. 돈이 있으니 그동안 넘을 수 없었던 벽들이 종이장처럼 쉽게 열렸다.
일주일 뒤, 이사하던 날. 새집 거실에 앉은 림 여사는 믿기지 않는 듯 연신 집 안을 둘러보았다. 바닥은 윤이 났고, 창문 너머로는 탕산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하지만 엄마의 표정은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요양병원에 모신 아빠 생각 때문이었다.
“엄마, 죄책감 갖지 마.”
예린이 엄마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전문 간병인들이 24시간 돌봐주는 게 아빠한테도 훨씬 좋아. 엄마가 골병들어가며 집에서 모시는 것보다, 깨끗한 환경에서 치료받으시는 게 아빠도 마음 편하실 거야.”
“그래도… 부부인데… 그 영감, 내 손길을 더 그리워할 텐데…”
“그러니까 엄마가 더 건강하게 살아야지. 엄마는 이제 엄마 인생 살아. 아빠한테만 매달리지 말고, 엄마도 친구들 만나고 맛있는 거 먹고 여행도 다니고. 엄마가 행복해야 아빠도 좋아하실 거야.”
엄마는 그제야 젖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린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슬쩍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엄마, 여권 만들어 놔.”
“여권은 뭐 하러?”
“나 한국 돌아가면 자주 놀러 오셔야지. 딸이 유학 가 있는데 한 번도 안 와볼 거야? 비행기 표는 내가 다 끊어줄 테니까, 엄마는 몸만 오면 돼.”
“아이고, 내가 말도 안 통하는 남의 나라를 어떻게…”
엄마가 손사래를 쳤지만,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예린은 엄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속삭였다.
“그리고… 어쩌면 엄마한테 ‘새 신랑’ 얼굴 보여줄 날이 올지도 모르잖아?”
“뭐? 새 신랑? 너 혹시…”
엄마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아니, 아직은 아니고! 그냥… 아주 멋진 사람이 있다고. 나중에, 정말 나중에… 기회 되면 소개해 줄게.”
예린은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엄마의 얼굴에도 모처럼 화색이 돌았다.

모든 정리를 마친 예린은 림 여사와 함께 천진국제공항으로 향하는 고속열차를 탔다. 엄마가 직접 공항까지 배웅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천진국제공항 출국 게이트 앞. 림 여사는 딸의 옷매를 다듬어주며 눈시울을 붉혔다.
“가서 밥 잘 챙겨 먹고… 아프지 말고… 그림도 마음껏 그리고… ”
“알았어, 엄마. 아빠 면회 자주 가고, 내 걱정은 하지 마.”
엄마를 뒤로하고 돌아서는 예린의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탑승 전, 예린은 휴대폰을 꺼내 현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현수 씨. 나, 지금 비행기에 막 탑승했어.]
비행기가 이륙했다. 거대한 대륙이 발아래로 멀어지고, 창밖으로 구름 위 파란 하늘이 펼쳐졌다.
예린은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누군가의 아내도, 며느리도 아닌 얼굴.
つづく
「本小说为作者独立创作的虚构故事,所有人物、情节、背景均为艺术加工,与现实中的任何个人、团体或事件无任何关联。若有巧合,纯属偶然。
본 소설은 작가가 독자적으로 창작한 허구적 이야기로, 모든 인물·줄거리·배경은 예술적 가공의 결과이며, 현실 속 개인·단체·사건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혹시 유사점이 있다면 이는 순전히 우연입니다.」
금기된 캔버스
제1장: 새로운 생활의 캔버스
제2장: 빗속의 만남
제3장: 색채의 공명
제4장: 그라데이션 컬러
제5장: 심연의 대화
제6장: 기교의 감옥, 빗장 너머의 시선
제7장: 박제된 초상과 소주 한잔
제8장: 뭉개진 형상, 주체의 탄생
제9장: 비명과 침묵의 밸런스
제10장: 남편의 방문, 그리고 해석된 비명
제11장: 증명된 <갈망>, 그리고 빗속의 동행
제12장: 거짓 없는 몸, 잔인한 기적
제13장: 무너진 유예, 다시 쓴 가면
제14장: 깨진 독, 쏟아진 기만
제15장: 하늘에 흩뿌린 거짓말
제16장: 가장 안전한 공범
제17장: 지워진 흔적, 차가운 다짐
제18장: 황금 감옥의 대가
제19장: 회색의 시간을 넘어
제20장: 비로소 채워진 캔버스 (最終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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