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하늘은 먹물에 듬뿍 젖은 화선지 같았다. 이제 막 밝아오는가 싶던 검푸른 빛은 이내 무거운 뭉게구름 뒤로 숨어버렸다. 장예린은 도서관에서 빌린 두꺼운 화집들을 품에 안고 비의 장막 속으로 뛰어들었다. 콩알만 한 빗방울이 머리 위를 탁탁 내리치더니, 순식간에 그녀의 베이지색 트렌치코트 어깨 위로 짙은 물자국을 남기며 번져 나갔다.
중국 최고의 명문 미대 시절부터 습관처럼 해온 자료 조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예린은 황급히 걸음을 재촉해 아트디움 캠퍼스 근처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보이는 모던아트 갤러리로 몸을 피했다. 갤러리의 무거운 유리문을 열자 테레빈유와 시멘트 모르타르 향, 그리고 에어컨의 냉기가 섞인 복잡한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북경의 화려하지만 폐쇄적이었던 아파트 거실과는 전혀 다른, 날것의 예술적 공기였다.

예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문 옆 벽에 기대어 가쁜 숨을 골랐다. 젖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이마에 달라붙어 차가운 감촉을 전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품 안의 화집부터 확인했다. 다행히 표지에 물방울이 몇 개 튀었을 뿐 무사했다. 그때, 기묘한 향기가 예린의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테레빈유 특유의 자극적인 냄새였지만, 갤러리의 정제된 공기에 가려지지 않고 오히려 창밖의 빗물에 씻긴 흙내음과 어우러져 묘한 감각을 자극했다. 어제 아트디움 기숙사 화실 구역에서 방진포를 들췄을 때 느꼈던 그 기이한 온기를 머금은 냄새와 닮아 있었다. 깨끗하면서도 원시적이고, 차가우면서도 어딘가 기이한 온기를 머금은 냄새였다.
예린은 그 향기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갤러리 깊숙한 곳, 창가 구역에서 짙은 회색 면마 셔츠를 입은 남자가 등을 돌린 채 대형 액자를 조정하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에서 먼저 시선이 닿은 것은 훤칠한 키와 다부진 체격이었다. 셔츠 너머로 보이는 어깨는 군더더기 없이 벌어져 있었고, 액자의 모서리를 다루는 그의 손가락은 가늘고 마디가 뚜렷하면서도 유연한 힘이 넘쳤다. 창밖의 희뿌연 하늘빛이 그의 곧고 마른 옆모습과 건실한 실루엣을 선명하게 그려냈다. 발치에는 다 쓴 물감 튜브와 물감이 묻은 행주, 스테인리스 나이프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예린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가 만지고 있는 그림으로 향했다. 대담한 색채가 돋보이는 풍경화였다. 전경에는 비틀린 나뭇가지들이 검은 번개처럼 하늘을 찌르는 고목이 그려져 있었고, 배경은 타오르는 주황색과 짙은 자주색이 뒤섞여 마치 석양이 마지막 남은 재까지 태우는 듯한 형상이었다. 중국 최고의 명문 미대 유화계에서 정통 리얼리즘과 정교한 기교를 익혀온 예린에게, 이토록 감정을 날것 그대로 폭발시킨 색채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강렬한 시각적 장력에 예린은 순간 창밖의 폭우조차 잊어버렸다.
"특이하지 않습니까?"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어느새 남자가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직접적이고 깊었다. 예술가 특유의 관찰력이 담긴 눈길이 예린의 얼굴에 머물다 그녀가 안고 있는 화집으로 천천히 옮겨갔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오똑한 콧날, 얇지만 선이 분명한 입술. 그의 눈빛은 깊은 물을 감추고 있는 듯해 그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그를 감싼 듬직한 형상은 왠지 모를 안정감을 주었다.
"아… 네, 그렇네요." 예린은 당황해 어색하게 대꾸하며 품 안의 책을 고쳐 안았다. "저 주황색 말이에요… 꼭 하늘에 불이 붙은 것 같아요." 그녀는 방금 느낀 감정을 표현하려 애썼다. 3년 동안 북경에서 중학교 미술 교사로 재직하며 규격화된 수업만을 해온 그녀에게, 이런 본능적인 감상의 표현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서툰 한국어 탓에 문장은 짧았고, 숨이 덜 가라앉아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남자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 찰나의 미소였다. "태우는 것 같다라. 보통은 파멸이라고들 하죠." 그는 그림 쪽으로 두 걸음 다가서며 다시 캔버스를 응시했다. "하지만 저는 파멸 자체가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폭우처럼요." 그는 창밖의 비의 장막을 힐끗 보았다. "모든 것을 씻어내고 새로운 것을 잉태하는 힘 말입니다."
그의 말투에는 확고한 신념이 담겨 있었고, 그것은 그림 속의 강렬한 에너지와 닮아 있었다. 예린의 심장이 왠지 모르게 평소보다 빠르게 뛰었다. 기숙사 화실 구역에서 본, 불안과 몸부림으로 가득했던 그 미완성 추상화가 떠올랐다. 그 그림에서도 이 남자와 비슷한 냄새가 났던 것 같았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이 그림, 당신이 그린 건가요?"
남자는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발치에 놓인 걸레를 집어 들어 손가락 끝에 묻은 주황색 물감을 천천히 닦아냈다. 그 동작은 침착하고도 우아했다. 이윽고 그가 눈을 들어 예린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현수입니다."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훤칠한 키와 군더더기 없는 태도에서 예린은 그가 자신보다 꽤 어려 보인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가 내뿜는 예술적 아우라와 믿음직한 기운은 나이 따위를 따질 겨를을 주지 않았다.
"장예린입니다." 예린도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낯선 타국에서 처음으로 통성명을 한 상대가 이토록 강렬한 그림을 그리는 남자라는 사실에 묘한 긴장감이 일었다. "아트디움 신입생인가 보군요?" 현수의 시선이 그녀가 안고 있는 기초 이론서들과 도서관 대출 화집들을 스쳐 지나갔다. "나도 이번에 들어왔습니다. 어쩌면 오가며 자주 보겠네요."
현수는 상대가 연상일지도 모른다는 배려나 머뭇거림 없이, 대등한 예술가로서 말을 건넸다. 예린은 그가 자신과 같은 과 동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가슴 한구석이 울렁거렸다. 그녀는 현수의 걷어 올린 셔츠 소매 아래로 드러난 탄탄한 팔뚝 위에 코발트 블루 물감 한 점이 묻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선명한 푸른빛은 어제 보았던 캔버스의 잔상을 기묘하게 자극했지만, 예린은 그것이 단순한 우연일 것이라 생각하며 시선을 거두었다.

"그 그림 말입니다." 현수가 아까의 풍경화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 힘은 풍경이 아니라 색채 자체가 가진 정서에서 나옵니다. 주황색은 석양이 아니라 화가의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피와 같죠."
현수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기이한 침투력이 있었다. 시어머니의 중약 봉투와 왕펑의 무관심으로 점철되었던 북경의 삶에서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전율이었다. 창밖의 빗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지만, 갤러리 안에는 테레빈유 향기와 채 마르지 않은 유채 물감의 냄새, 그리고 비가 몰고 온 흙내음이 두 사람 사이를 메우며 흐르고 있었다.
예린은 이 공간의 분위기가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음을 느꼈다. 억압되었던 북경의 삶을 뒤로하고 온 이 낯선 타국에서, 예상치 못한 폭우와 함께 현수라는 강렬하고 복잡한 색채 하나가 그녀의 인생이라는 캔버스 위에 번져가고 있었다.
빗줄기가 가늘어지자 예린은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임을 직감했다. 그녀는 현수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갤러리를 나섰다. 몇 걸음 걷다 멈춘 그녀는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현수는 여전히 그 풍경화 앞에 서서 그림을 응시하고 있었다. 비의 장막을 뚫고 들어오는 희미한 빛 속에서 그의 옆모습은 유난히 단호해 보였고, 다부진 뒷모습은 믿음직한 안도감을 주었다. 예린은 심호흡을 하며 이름 모를 기대를 안고 다시 빗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つづく
「本小说为作者独立创作的虚构故事,所有人物、情节、背景均为艺术加工,与现实中的任何个人、团体或事件无任何关联。若有巧合,纯属偶然。
본 소설은 작가가 독자적으로 창작한 허구적 이야기로, 모든 인물·줄거리·배경은 예술적 가공의 결과이며, 현실 속 개인·단체·사건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혹시 유사점이 있다면 이는 순전히 우연입니다.」
금기된 캔버스
제1장: 새로운 생활의 캔버스
제2장: 빗속의 만남
제3장: 색채의 공명
제4장: 그라데이션 컬러
제5장: 심연의 대화
제6장: 기교의 감옥, 빗장 너머의 시선
제7장: 박제된 초상과 소주 한잔
제8장: 뭉개진 형상, 주체의 탄생
제9장: 비명과 침묵의 밸런스
제10장: 남편의 방문, 그리고 해석된 비명
제11장: 증명된 <갈망>, 그리고 빗속의 동행
제12장: 거짓 없는 몸, 잔인한 기적
제13장: 무너진 유예, 다시 쓴 가면
제14장: 깨진 독, 쏟아진 기만
제15장: 하늘에 흩뿌린 거짓말
제16장: 가장 안전한 공범
제17장: 지워진 흔적, 차가운 다짐
제18장: 황금 감옥의 대가
제19장: 회색의 시간을 넘어
제20장: 비로소 채워진 캔버스 (最終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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