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 입국장. 자동문이 열리며 수많은 인파가 쏟아져 나왔다. 그들 사이로 예린이 걸어 나왔다.

화려한 명품도, 무거운 캐리어도 없었다. 그녀의 등에는 낡은 갈대색 백팩 하나가 대롱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북경에서의 화려했던 사모님의 껍데기를 모두 벗어던지고, 핏기 없는 수척한 얼굴로 돌아온 그녀. 가진 것은 없었지만, 그 초라한 어깨는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워 보였다.

그때였다. 입국장 출구 저편에서, 익숙한 남자의 그림자가 손을 힘차게 흔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

현수였다. 그는 예린을 발견하자마자 안전 펜스 너머에서 아이처럼 펄쩍펄쩍 뛰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건강하고 활기찬 모습, 예린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그 미소였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온 예린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현수의 표정이 왈칵 일그러졌다. 움푹 패인 볼, 앙상하게 마른 손목.

“현수 씨…”

예린이 힘겹게 웃어 보이자, 현수가 달려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너무 걱정되고, 보고 싶었어… 얼굴이 많이 수척해졌네…”

현수의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그는 묻지 않았다. 왜 이렇게 말랐는지,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저 돌아와 준 것만으로 고맙다는 듯, 떨리는 팔로 그녀를 더 깊이 안을 뿐이었다.

예린은 현수의 품에 얼굴을 묻고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비로소 지옥에서 탈출해 집에 돌아왔음이 실감 났다.

“나 왔어, 현수 씨. 아주 왔어. 이제 안 가.”

두 사람은 공항 한복판에서 서로의 체온을 확인하듯 한참을 부서져라 껴안고 있었다.

서울 아트리움 대학교 예술동, 그토록 그립고 익숙했던 307호 화실. 문을 열자마자 코끝을 찌르는 알싸한 냄새.

테레빈유 냄새였다. 한때는 임신한 그녀의 속을 뒤집어놓으며 고통스러운 입덧을 유발했던 그 냄새.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예린은 눈을 감고 그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그것은 더없이 정겹고 향기로운, 진정한 나의 세계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환영의 향기였다.

창밖에는 어느덧 서울의 밤이 푸르스름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현수는 창가에 서서 어두워지는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린은 조용히 다가가, 현수의 등 뒤에서 천천히 팔을 뻗어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현수의 등이 움찔했지만, 이내 편안하게 예린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예린은 넓고 단단한 현수의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심장 소리가 등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현수 씨… 나, 사실…”

예린은 그의 등에 기댄 채, 중국에서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왕펑의 기만, 시어머니가 먹인 독극물, 그리고 그들과의 싸움.

“위자료… 두둑하게 챙겨 받았어. 그 돈으로 엄마한테 근사한 아파트 하나 사드리고, 아빠는 시설 좋은 요양병원에 모시고 왔어. 이제 두 분 걱정은 안 해도 돼.”

현수는 대답 대신 예린의 깍지 낀 손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하지만 예린에게는 아직 하지 못한 가장 무거운 고백이 남아 있었다. 떨리는 입술이 그의 등 뒤에서 웅얼거렸다.

“그리고… 거기서… 아이가 생겼었어. 당신 아이였어. 그런데… 내가 지웠어. 준비도 없이 찾아온 생명이라…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서…”

말을 마친 예린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죄책감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현수가 실망하지는 않을까, 상처받지는 않을까.

그때였다. 현수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예린의 차갑게 식은 두 손을 자신의 큰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미안해.”

현수의 목소리가 물기에 젖어 있었다. 그는 예린을 탓하는 대신, 자신의 무력함을 책망하고 있었다.

“그 무서운 곳에서, 그 힘든 결정을 혼자 하게 해서… 혼자 얼마나 아프고 무서웠을까… 내가 곁에 있어 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그의 눈빛에는 원망이나 실망은 없었다. 오로지 그 지옥 같은 시간을 홀로 견뎌낸 연인에 대한 깊은 아픔과 사랑뿐이었다. 현수는 예린의 젖은 눈가를 엄지로 조심스럽게 닦아주며, 짐짓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피식 웃어 보였다.

“근데 거봐… 예전에 누나가 피임 같은 거 안 해도 된다고 큰소리치더니.”

“…어?”

“우리 건강하다는 증거잖아. 누나 몸, 망가진 게 아니라 다시 살 수 있다는 신호니까. 오히려 다행이지 뭐야.”

무겁게 가라앉을 뻔한 공기가 현수의 농담 한마디에 따스하게 풀렸다. 그는 예린이 짊어지려 했던 ‘낙태’라는 무거운 죄의식을, ‘우리의 사랑이 건강하다’는 희망의 증거로 바꿔주었다.

현수는 멍한 표정의 예린을 와락 당겨, 깊게 품에 안았다.

“지나간 일이야. 누나가 무사히 내 옆에 와 줬으면 다야… 나머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예린은 현수의 등 뒤로 팔을 둘러 그를 더 깊이 당겨 안았다. 차가운 수술대 위에서의 기억, 시댁의 멸시, 불임이라는 낙인… 그 모든 시리고 끔찍했던 기억들이 현수의 따뜻한 체온에 의해 서서히 녹아내리고 지워졌다.

그것은 격정적인 사랑의 행위보다 더 깊은, 영혼의 치유였다. 텅 비어버린 줄 알았던 예린의 마음이, 현수라는 온기로 가득 채워지는 구원의 순간이었다.

한참 동안 이어진 침묵과 포옹. 두 사람은 젖은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이내 두 사람은 나란히 이젤 앞에 섰다. 그곳에는 현수가 준비해 둔 거대한 100호 캔버스가 놓여 있었다. 아직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새하얀 빈 캔버스였다.

현수가 팔레트를 건네려 했지만, 예린은 부드럽게 그의 손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번엔 내가 할게.”

예린은 스스로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이제 누구의 도움도, 누구의 허락도 필요 없었다. 그녀는 팔레트에 자신의 상처를 상징하는 붉은색(Crimson)을 짰다. 그리고 그 옆에, 그녀를 지켜준 현수의 코발트블루(Cobalt Blue)를 짰다.

두 가지 색이 나이프 끝에서 섞였다. 상처와 치유가 엉겨 붙어 세상에 없던 새로운 보라색의 우주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제 채우자. 우리 둘만의 색으로.”

“응. 꽉 채울 거야. 빈틈없이.”

예린의 나이프가 망설임 없이 캔버스 위를 춤추듯 움직였다. 그 뒤를 현수의 붓이 따르며 색을 입혔다. 두 가지 색이 서로 섞이고 번지며 캔버스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갈망’도, ‘비명’도 아니었다. 그것은 완벽한 충만(充滿)이었다.

지독했던 겨울이 가고, 비로소 완전한 봄이었다. 장예린과 강현수. 두 사람의 인생이라는 캔버스에, 이제야 진짜 그림이 시작되고 있었다.

最終回

「本小说为作者独立创作的虚构故事,所有人物、情节、背景均为艺术加工,与现实中的任何个人、团体或事件无任何关联。若有巧合,纯属偶然。

본 소설은 작가가 독자적으로 창작한 허구적 이야기로, 모든 인물·줄거리·배경은 예술적 가공의 결과이며, 현실 속 개인·단체·사건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혹시 유사점이 있다면 이는 순전히 우연입니다.」

금기된 캔버스

제1장: 새로운 생활의 캔버스
제2장: 빗속의 만남
제3장: 색채의 공명
제4장: 그라데이션 컬러
제5장: 심연의 대화
제6장: 기교의 감옥, 빗장 너머의 시선
제7장: 박제된 초상과 소주 한잔
제8장: 뭉개진 형상, 주체의 탄생
제9장: 비명과 침묵의 밸런스
제10장: 남편의 방문, 그리고 해석된 비명
제11장: 증명된 <갈망>, 그리고 빗속의 동행
제12장: 거짓 없는 몸, 잔인한 기적
제13장: 무너진 유예, 다시 쓴 가면
제14장: 깨진 독, 쏟아진 기만
제15장: 하늘에 흩뿌린 거짓말
제16장: 가장 안전한 공범
제17장: 지워진 흔적, 차가운 다짐
제18장: 황금 감옥의 대가
제19장: 회색의 시간을 넘어
제20장: 비로소 채워진 캔버스 (最終回)

이 글을 공유하기:

비의가을

남은 시간 ... 한땀한땀 걸어 온 길과 주변에 들은 이야기들을 글로 꾸며 가겠습니다.

작가를 응원해주세요

좋아요 좋아요
3
좋아요
오~ 오~
0
오~
토닥토닥 토닥토닥
0
토닥토닥

댓글 남기기

글쓰기
작가님의 좋은 글을 기대합니다.
1.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글의 초고는 "원고 보관함"에 저장하세요. 2. 원고가 다 완성되면 "발행하기"로 발행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