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실의 밤은 잔인할 만큼 무거웠다. 100호 캔버스 위에는 인디고와 아이보리 블랙이 뒤섞인 기괴한 얼룩들이 유령처럼 층층이 굳어 있었다. 예린은 며칠째 같은 자리를 맴돌며 자신을 거대한 백색 사각형 안에 유폐시켰다.
붓을 잡은 예린의 손은 경련하듯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형상화하려 했다. 하지만 붓끝이 캔버스에 닿는 순간, 북경에서 십수 년간 길들여진 우아한 절제가 마치 저주받은 습관처럼 튀어나와 선을 정갈하게 다듬어버렸다. 그 가식적인 매끄러움이 보일 때마다 예린은 구역질을 느꼈다.
“아니야, 이게 아니야…!”
예린은 붓을 내던지고 옆에 있던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치익, 츠우욱-
날카로운 금속 날이 아직 마르지 않은 유화 물감의 표면을 잔인하게 긁어냈다. 캔버스 천의 거친 조직이 드러날 때까지 살점을 도려내듯 나이프를 휘둘렀다. 긁혀 나간 물감 덩어리들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하지만 긁어내면 긁어낼수록, 그 밑에서 드러나는 것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자신의 위선적인 그림자뿐이었다.
예린은 갑자기 손바닥에 물감을 묻혀 캔버스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도구조차 거추장스럽다는 듯, 맨손으로 인디고 물감을 퍼서 화면에 짓이겼다. 늘 티끌 하나 없이 희고 깨끗했던 손톱 사이에 검푸른 물감이 끼어들고, 손등이 거친 캔버스 결에 쓸려 붉게 달아올랐지만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다 돌연, 예린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녀는 물감이 덕지덕지 묻은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거칠게 감싸 쥐었다. 손바닥에 남은 축축한 물감이 이마와 뺨으로 번져나갔다. 그 어둡고 끈적한 촉감이 마치 북경 집 안방의 눅눅한 공기처럼 그녀를 조여왔다.
“흑, 흐으…”

처음에는 작은 떨림이었다. 하지만 이내 어깨가 들썩이더니, 손바닥 너머로 짐승의 울음 같은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예린은 캔버스 앞에 무너져 내린 채 얼굴을 가리고 한참을 울었다. 그 울음소리는 화실의 높은 천장에 부딪혀 기괴한 메아리로 돌아왔다. 닦아내지 못한 눈물이 뺨에 묻은 인디고 물감과 섞여 턱 끝으로 검은 줄기를 그리며 흘러내렸다.
현수는 멀리서 이 모든 과정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움직여 화실 구석, 오랫동안 회색 방진포에 싸여 있던 자신의 화대로 향했다. 현수가 천천히 천을 걷어내자 억눌려 있던 먼지가 조명 아래 흩날리며 거대한 미완성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예린은 눈물을 닦으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현수의 그림은 파괴적인 붓질과 규정할 수 없는 색채들이 뒤엉킨 광기의 기록이었다. 현수는 말없이 그 그림 앞에 서 있었다. 마치 나도 당신처럼 엉망진창이다라고 말해주는 듯한 침묵의 위로였다.
“그만해요. 지금은 그림이 누나를 잡아먹고 있어요. 이대로는 작가가 아니라 제물이 될 뿐입니다.”
현수는 바닥에 뒹구는 나이프를 치우고 예린의 손등에 묻은 물감을 헝겊으로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예린은 넋이 나간 듯 그 손길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오늘 작업은 여기까지 하죠. 누나, 소주 한잔 어때요? 지금 누나한테 필요한 건 테레빈유 냄새가 아니라 사람 냄새인 것 같아서요.”
현수의 제안에 예린은 멈칫했다. 북경의 엄격한 가풍, 그리고 유부녀라는 자신의 신분이 조건반사처럼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낯선 타국에서, 그것도 밤늦은 시각에 젊은 남자와 단둘이 술을 마시러 간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탈이었다. 시어머니가 알았다면 당장 불호령이 떨어졌을 것이고, 남편 왕펑조차 조용히 미간을 찌푸렸을 상황이었다.
예린은 거절의 말을 찾으려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코끝에 감도는 지독한 유화 물감 냄새와, 자신을 옭아매는 캔버스 속의 정교한 감옥이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지금 이 307호 화실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저 캔버스 속의 유령들에게 잡아먹혀 그대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도덕적 망설임보다 생존을 향한 본능이 더 앞섰다. 예린은 떨리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딱 한 잔만요.”
그것은 승낙이라기보다, 숨을 쉬기 위해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미는 절박한 몸부림에 가까웠다.
학교 근처의 낡은 포장마차. 바람에 펄럭이는 주황색 비닐 천막 안으로 들어서자, 낯선 풍경이 예린을 맞이했다. 드럼통을 개조한 둥근 테이블, 등받이 없는 플라스틱 의자, 그리고 좁은 공간을 가득 메운 매캐한 연탄 냄새와 구수한 멸치 육수 냄새가 훅 끼쳐왔다. 화실의 서늘한 적막과는 정반대의 소란스러운 온기였다.
테이블 위에는 꼬불꼬불하게 꽂힌 오뎅이 담긴 양은 냄비가 뽀얀 김을 뿜어내고 있었고, 그 옆에는 현수가 주문한 새빨간 떡볶이가 붉은 윤기를 번들거리며 놓여 있었다. 찐득한 고추장 소스와 멸치 국물의 향이 어우러져 코끝을 찔렀다. 북경 시댁의 정갈하고 풍성한 식탁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투박하면서도 간소하고, 거칠면서도 상큼한 밥상이었다.
자리에 앉자 현수가 익숙하게 초록색 병을 흔들어 땄다.
“이게 소주라는 거예요. 한국 사람들의 눈물약 같은 거죠.”
현수가 투명한 작은 잔에 술을 채워 건넸다. 예린은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잔을 받았다. 맑고 투명한 액체에서 알코올 특유의 톡 쏘는 향이 올라왔다. 태어나서 처음 마셔보는 한국의 술. 그녀는 현수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잔을 기울였다.
‘독해…!’
혀끝에 닿는 순간 찌릿한 자극이 느껴졌고, 목구멍을 넘어갈 때는 마치 불덩이를 삼킨 듯 식도가 뜨거워졌다. 북경에서 마시던 향긋한 배갈이나 부드러운 와인과는 전혀 다른, 거칠고 화학적인 맛이었다.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지만, 이상하게도 그 타는 듯한 통증이 뱃속에 도달하자 묘한 시원함으로 변했다.
“크으… 어때요? 좀 쓰죠?”
현수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오뎅 국물을 떠주었다. 예린은 따뜻한 국물로 쓴 입맛을 달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치 소독약 같아요. 그런데 이상하게… 속이 좀 뚫리는 것 같기도 하네요.”
“그 맛에 마시는 거예요. 속이 썩어 문드러질 때 소독하려고.”
현수의 말에 예린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소독약이라니. 어쩌면 지금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처방전일지도 몰랐다. 두 잔, 세 잔. 잔이 비워질수록 예린의 하얗게 질렸던 얼굴에 점차 기이한 미열이 돋기 시작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이성의 빗장이 알코올에 녹아내리자, 참아왔던 감정들이 둑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마침내 툭, 소리 없이 참아왔던 눈물 한 방울이 소주잔 속으로 다시 추락했다. 예린은 젖은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며,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던 북경의 삶을 토해내듯 쏟아냈다.
“남편 왕펑은 다정했지만, 그 다정함이 가장 견고한 창살이었어요. 시어머니가 매일 아침 안방으로 들여보내던 그 쓴 중약 냄새가 아직도 코끝을 맴돌아요. 그건 약이 아니라 내가 그 집안의 소유물, 아이 낳는 도구라는 증명서였으니까.”
묵묵히 떡볶이를 집어 먹던 현수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는 안타까움과 답답함이 섞인 눈빛으로 예린을 쳐다보았다.
“누나, 듣다 보니 좀 화나려고 하네요. 그거, 가스라이팅 당하면서 산 거나 다름없어요. 좀 더 좋고 유명한 병원에 가서 제대로 진단받아보지 그랬어요. 무턱대고 남편이랑 시어머니 말만 믿고 죄인처럼 살 수는 없는 거잖아요.”
현수는 씁쓸한 표정으로 자신의 잔을 채워 단숨에 털어 넣었다. 예린이 힘없이 고개를 저으며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아니, 그게 아니라… 사실 나도 검사는 해 봤어요. 유명하다는 병원은 다 다녀봤죠. 그런데 산부인과에서도 딱히 불임 이유는 모르겠대요. 원인 불명이라나… 차라리 내 몸 어디가 고장 난 거라면 고치기라도 할 텐데.”
예린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런데 시댁에서는 그 애매한 결과마저 다 내 탓으로 몰았어요. 내가 부족해서, 내가 예민해서 그렇다고. 숨 막혀 죽을 것 같았어요. 이번 유학도…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공부 같은 건 핑계였어요. 그 숨 막히는 금색 새장에서 도망칠 구실이 필요했던 거죠.”
예린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오뎅탕 너머의 현수를 응시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죠? 여기 와서 유별난 스승 같은 현수 씨를 만나고, 또 교수님들한테 발가벗겨지듯 지적을 받다 보니까… 잊고 살았던 예술에 대한 열정이 다시 끓어올라요. 꼭 대학 시절, 아무것도 모르고 붓만 잡았던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요. 이젠 도망이 아니라, 진짜 나를 캔버스에 녹여내고 싶어요.”
예린의 고백에 현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후, 그가 자신의 잔을 채우며 나직하게 입을 뗐다.
“누나만 그런 비밀이 있는 건 아니에요. 아까 본 내 그림 말이죠, 사실 제 태생이랑 닮아 있어요. 저는 흔히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사생아예요. 아버지가 누구인지, 살아는 있는지조차 모르죠.”
예린의 젖은 눈동자가 커졌다. 현수는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
“어머니는 평생 제 얼굴에서 그 남자를 증명하려 하셨어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공포가 저를 저 캔버스 속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거죠. 누나는 너무 완벽하게 짜인 감옥에 갇혀서 숨 막혔던 거고, 저는 아무런 틀도 없는 허허벌판에 버려져서 불안했던 거네요.”
현수가 예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천막 밖에서 들리는 빗소리와 취객들의 웅성거림이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감싸 안았다.
“서로 살아온 온도는 정반대지만, 결국 캔버스 위에서만큼은 거짓말하지 않고 ‘진짜 나’를 토해내고 싶어 한다는 건… 닮았어요, 우리.”
서로의 결핍을 확인한 순간, 묘한 동질감이 테이블 위로 내려앉았다. 예린은 알코올 기운을 빌려 슬쩍 농담 겸 칭찬이 섞인 말투로 현수에게 물었다.
“그래도… 친아버지는 조만간 찾아서 만나서 물어봐야 할 거 아닌가요? 가서 따져야죠. 왜 이렇게 착하고, 멋지고… 또 독특한 우리 현수 씨를 왜 버렸냐고.”

예린의 입에서 나온 우리 현수 씨라는 말에 현수가 멈칫했다. 그는 잠시 예린을 바라보다가, 피식 슬프게 웃으며 대답했다.
“찾고 싶으면 진작 찾았죠…”
말끝을 흐리는 현수의 눈빛에는 아버지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찾지 않는 듯한 깊은 체념과 냉소가 서려 있었다.
잔등에 맺힌 소주병의 물방울이 테이블 위로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현수는 화제를 돌리려는 듯, 예린의 손등에 남은 물감 자국을 묵묵히 응시했다.
“지우지 마요, 누나. 아까 말했던 3년 동안 마셨다는 그 쓰고 떫고 비리다는 검은 중약, 그리고 누나를 옥죄었다던 그 숨 막히는 공기… 그것도 다 누나가 가진 색깔이잖아요. 추해도 좋으니까 그냥 있는 그대로 둬요. 그게 진짜 예린 씨라면, 나는 그 그림 끝까지 보고 싶거든요. 아까 내 그림을 보고 경악했던 그 눈빛으로, 누나의 진짜 비명을 담아내 봐요.”
예린은 현수의 말에 숨을 멈췄다. 힘내라는 뻔한 위로보다, 자신과 닮은 상처를 꺼내 보이며 끝까지 보겠다는 그의 무심한 약속이 가슴 깊숙이 박혔다. 처음으로 치부를 드러냈다는 수치심보다, 누군가 이 눅눅한 비밀의 무게를 함께 응시해주고 있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포장마차 밖으로 새벽 안개가 자욱하게 깔리고 있었지만, 현수의 고백에서 전해지는 온기는 예린의 얼어붙은 캔버스 위에 새로운 색깔을 칠할 용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つづく
「本小说为作者独立创作的虚构故事,所有人物、情节、背景均为艺术加工,与现实中的任何个人、团体或事件无任何关联。若有巧合,纯属偶然。
본 소설은 작가가 독자적으로 창작한 허구적 이야기로, 모든 인물·줄거리·배경은 예술적 가공의 결과이며, 현실 속 개인·단체·사건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혹시 유사점이 있다면 이는 순전히 우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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