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아트디움 캠퍼스 예술동이 채 깨어나기도 전에 복도에 울려 퍼지는 예린의 발소리는 유난히 조심스러웠다. 307호 화실의 문을 열자, 차가운 새벽 공기와 섞인 기름 냄새가 비강을 자극했다. 현수는 이미 창가 쪽 작업대 앞에 앉아 있었다. 짙은 남색 앞치마를 두른 채 무언가에 몰입한 그의 뒷모습은 믿음직하고 정갈하면서도 다가가기 어려운 밀도를 지니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현수 씨."

    예린의 인사에 현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좋은 아침입니다, 예린 씨." 그는 가볍게 목례를 하더니 이내 자신이 조색하던 팔레트를 가리켰다. "오늘 들어온 캔버스들은 바탕 결이 좀 거칠더군요. 예린 씨가 대학 다닐 때 익히신 그 정교한 밑칠 방식을 한번 보고 싶은데,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그의 말투는 지시가 아니라 정중한 부탁이었고, 예린의 숙련도를 존중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예린은 가방을 내려놓고 나무 막대를 들었다. 재료들이 섞이며 우윳빛의 끈적한 소리를 냈다.

    "손목보다는 팔 전체의 반동을 쓰면 결이 더 고르게 나올 겁니다." 어느새 다가온 현수가 옆에서 같은 작업을 시작하며 조용히 조언했다. "강요하는 건 아니지만, 이곳에서는 이런 식으로 힘을 안배하곤 하거든요. 예린 씨 방식과 비교해보고 편한 쪽을 택하세요."

    화실은 조용했고, 두 사람의 규칙적인 움직임만이 공기를 채웠다. 오전 작업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예린의 주머니에서 전화벨 진동이 울렸다. 화면에 뜬 '남편'이라는 두 글자를 보자 예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녀는 현수의 시선을 피해 화실 구석으로 가 목소리를 낮춰 전화를 받았다. 입에서는 무의식적으로 중국어가 흘러나왔다.

    "喂,王鹏? (여보세요, 왕펑?)"

    "琳琳,是我. 首尔怎么样? 妈很担心你,寄了些药过去,明天能到. 还有… 这周末我打算去首尔,我想你了. (린린, 나예요. 서울은 좀 어때요? 어머니가 당신 걱정을 많이 하셔서 이번에 약을 좀 지어 보냈어요. 내일쯤 도착할 거예요. 그리고… 이번 주말에 내가 서울로 갈게요. 보고 싶소.)"

    왕펑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온화했지만, 그 안에 담긴 요구는 단호한 명령처럼 들렸다. 예린의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지며 물기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我这周末真的很忙!我得准备期末竞赛的创作,真的抽不出时间. 请你不要随便决定我的事. (나 이번 주말엔 정말 바빠요! 학기말 경연 작품 창작을 준비해야 해서 정말 시간을 낼 수 없단 말이에요. 제발 내 일에 대해 마음대로 결정하지 말아요.)"

    다투듯 전화를 끊고 돌아선 예린은 어느새 자신의 뒤편에 서 있던 현수와 눈이 마주쳤다. 현수의 눈동자에는 옅은 놀라움과 함께 알 수 없는 빛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방금… 중국어였나요?" 현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 네. 가족이랑 통화하느라…" 예린이 당황하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현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붓을 정리하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군 복무 시절에 중국어를 조금 배웠거든요. 완벽하진 않아도 남편이나 바쁘다는 말 정도는 들리네요. 결혼하셨다는 건… 미처 몰랐습니다."

    예린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비밀로 하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 낯선 화실에서만큼은 누구의 아내도 아닌 오직 장예린으로만 존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배정표 확인하다가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저보다 세 살이나 많으신 선배이시던데." 

    현수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숯펜을 하나 건넸다.

     "그럼 동기이긴 해도 제가 동생이네요. 사석에서는… 아니, 이 화실 안에서만이라도 누나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제가 예린씨라고 부르는 건 동기 사이에 너무 거리감도 있고 제가 너무 예의가 없는것으로 느껴져서요."

    누나라는 단어가 그의 낮은 목소리에 실려 오자, 예린은 가슴 한구석이 홧홧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사생활을 엿보였다는 수치심이나 당혹감이 먼저 밀려올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사실을 알고도 아무렇지 않게 거리를 좁혀오는 그의 태도가 기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늘 명령에 가까운 온화함으로 자신을 통제하던 왕펑의 목소리와는 달랐다. 현수의 말투에는 예린을 누구의 아내가 아닌, 이곳 화실에서 함께 숨 쉬는 동료로 인정하는 담백한 존중이 섞여 있었다. 타국에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실질적인 환대였다. 예린은 자신을 옥죄던 보이지 않는 긴장의 끈이 아주 조금 느슨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요, 편한 대로 해요." 예린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건네받은 숯펜을 쥐었다.

    "좋네요, 누나."

    현수는 그 호칭을 한 번 더 되뇌고는 예린이 준비한 캔버스 앞에 섰다.

    "자, 그럼 밑칠도 다 말랐으니 본격적으로 선을 그어보죠. 누나의 그 섬세한 선들이 이 캔버스를 어떻게 찢어놓을지 궁금합니다."

    예린은 캔버스 앞에 섰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왕펑의 부드러운 구속, 시어머니의 쓴 약, 그리고 눈앞에서 자신의 해방을 부추기는 듯한 현수의 시선. 무형의 속박감이 그녀를 짓눌렀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녀는 현수가 만들어준 누나라는 생경한 자유 안에서 손목에 힘을 주어 캔버스를 그었다.

    "착!"

    굵고 짙은 선이 백색의 정적을 깨뜨렸다. 현수는 그녀의 어깨너머로 캔버스를 응시하며 나직이 조언했다.

    "망설이지 마요. 그 선 끝에 누나의 진실을 담아보세요. 충돌을 더 날카롭게 터뜨려도 좋습니다."

    두 사람의 숨소리와 기름 향이 뒤섞인 화실 안에서, 예린은 자신의 삶이 돌이킬 수 없는 그라데이션으로 물들기 시작했음을 깨달았다. 현수의 그림자가 예린의 그림자 위로 겹쳐졌고, 캔버스 위에는 파괴적이면서도 지독하게 자유로운 첫 번째 비명이 새겨지고 있었다.

つづく

「本小说为作者独立创作的虚构故事,所有人物、情节、背景均为艺术加工,与现实中的任何个人、团体或事件无任何关联。若有巧合,纯属偶然。

본 소설은 작가가 독자적으로 창작한 허구적 이야기로, 모든 인물·줄거리·배경은 예술적 가공의 결과이며, 현실 속 개인·단체·사건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혹시 유사점이 있다면 이는 순전히 우연입니다.」

금기된 캔버스

제1장: 새로운 생활의 캔버스
제2장: 빗속의 만남
제3장: 색채의 공명
제4장: 그라데이션 컬러
제5장: 심연의 대화
제6장: 기교의 감옥, 빗장 너머의 시선
제7장: 박제된 초상과 소주 한잔
제8장: 뭉개진 형상, 주체의 탄생
제9장: 비명과 침묵의 밸런스
제10장: 남편의 방문, 그리고 해석된 비명
제11장: 증명된 <갈망>, 그리고 빗속의 동행
제12장: 거짓 없는 몸, 잔인한 기적
제13장: 무너진 유예, 다시 쓴 가면
제14장: 깨진 독, 쏟아진 기만
제15장: 하늘에 흩뿌린 거짓말
제16장: 가장 안전한 공범
제17장: 지워진 흔적, 차가운 다짐
제18장: 황금 감옥의 대가
제19장: 회색의 시간을 넘어
제20장: 비로소 채워진 캔버스 (最終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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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가을

남은 시간 ... 한땀한땀 걸어 온 길과 주변에 들은 이야기들을 글로 꾸며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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