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린의 100호 캔버스는 이제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았다.
캔버스 위에는 우아한 나체도, 정교한 약탕기도 없었다. 오직 검은색 물감으로 짓이겨진 억압의 흔적과, 캔버스 천을 뚫고 나올 듯 터져 나오는 붉은 덩어리들만이 서로 뒤엉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화실 안의 공기는 마르지 않은 유화 물감의 비릿한 냄새와 캔버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열기로 질식할 듯 팽팽했다.
예린은 캔버스 옆에 떨리는 글씨로 작품명을 적어 넣었다.
<갈망 (渴望, Hunger)>
“이걸… 정말 이대로 출품하실 생각이에요, 누나?”
현수가 그림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며칠 전, 그녀가 자신의 기교를 스스로 파괴하던 모습을 지켜보던 때와는 또 다른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이제는 예술적 지지를 넘어, 이 형태 없는 비명이 가져올 파장을 걱정하는 동료의 얼굴이었다.

“교수님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누나의 그 좋던 묘사력이 다 사라졌잖아요. 이건… 너무 위험해요.”
“상관없어요. 예쁜 그림은 북경에서 지겹도록 그렸으니까.”
예린은 붓을 씻던 손을 멈추고 현수를 보았다. 며칠간의 밤샘으로 눈가는 퀭했지만, 눈동자만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게 내 진짜 얼굴이에요. 우아하게 포장된 가짜가 아니라, 뭉개지고 터져버린 진짜 내 속살. 사람들이 불편해하더라도 어쩔 수 없어요.”
그때였다. 복도 끝에서부터 박 교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화실의 학생들을 호되게 질책하는 소리였다.
중간 과제 점검을 위해 순회하던 박 교수였다. 잠시 후 307호 문이 열리고, 은테 안경을 쓴 박 교수가 들어섰다. 평소 예린의 탄탄한 데생 실력과 현수의 감각적인 묘사를 아꼈던 그의 눈빛에는 수제자들을 향한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이젤 앞에 선 순간, 박 교수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화실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박 교수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한참 동안 말없이 팔짱을 낀 채 그림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예린의 <갈망>과 현수의 <기둥>을 번갈아 오갔다. 기대감으로 반짝이던 눈빛이 서서히 차가운 납빛으로 굳어갔다.
“…장예린, 그리고 강현수.”
한참 만에 입을 뗀 박 교수의 목소리는, 고함이 아니라 냉철한 비평가의 건조한 톤이었다.
“자네들, 추상이 뭐라고 생각하나?”
박 교수가 예린의 캔버스 앞으로 다가갔다.
“형태를 지우는 것? 아무렇게나 감정을 쏟아붓는 것? 아니야. 추상은 구상보다 더 철저한 계산과 조형미가 필요한 작업이야. 불필요한 건 덜어내고 뼈대만 남기는 거라고. 그런데 이건…”
박 교수가 혀를 쯧 차며 고개를 저었다.
“이건 덜어낸 게 아니라, 그냥 무너진 거야. 감정이 정제되지 않고 그냥 폭발해버렸잖아. 붉은색을 봐. 너무 수다스러워. 작가가 캔버스 위에서 울고불고하고 있으면 관객은 들어갈 틈이 없어. 이건 예술적 승화가 아니라, 그냥 감정의 배설에 가깝네.”
박 교수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림을 다시 훑어보았다.
“…다만, 예전처럼 사진하고 똑같이 그리는 데만 목숨 걸던 그 ‘완벽함에 대한 강박’이 사라졌다는 것. 그거 하나만큼은 진보라고 해 주지.”
예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못 그렸다’는 말보다 ‘정제되지 않았다’는 말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껍질이 깨졌다는 것을 교수 또한 알아봤다는 사실에 묘한 전율이 일었다.
박 교수의 시선은 곧바로 옆에 있는 현수의 그림으로 향했다.
“그리고 강현수. 자네 그림은 더 심각해.”
박 교수는 안경을 벗어 닦으며 냉소적으로 말했다.
“자네의 장점은 예민함이었어. 선 하나, 터치 하나에 신경질적인 긴장감이 있었지. 그런데 지금 저건 뭔가? 그냥 붓질 몇 번 슥슥 해서 면만 채우면 그게 미니멀리즘인 줄 아나?”
박 교수는 현수의 <기둥>을 가리켰다.
“너무 안일해. 깊이가 없어. 예린이 그림이 너무 뜨거워서 문제라면, 자네 그림은 너무 차가워. 그냥 죽은 벽 같군. 서로에게 최악의 영향을 줬어.”
박 교수의 비평은 날카로웠다. 그는 단순히 꼰대처럼 화를 내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의 그림이 가진 '미학적 완성도'의 부족함을 꼬집고 있었다.

“둘 다 다시 그려. 이대로 걸면, 사람들은 자네들이 그리기 귀찮아서 꾀를 부렸다고 생각할 거야.”
박 교수의 단호한 말에 예린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자신 때문에 현수의 그림까지 ‘안일하다’는 평가를 받은 것 같아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교수님, 현수 씨 그림은…”
예린이 급하게 해명하려던 찰나, 현수가 한발 앞으로 나섰다.
“다시 그리지 않겠습니다. 이게 완성입니다.”
현수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단단했다. 그는 박 교수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교수님 말씀대로 제 그림은 차갑고, 예린 씨 그림은 뜨겁습니다. 그래서 이 둘은 같이 있어야 합니다.”
“뭐라고?”
“보십시오. 예린 씨의 그림은 혼자 있으면 그냥 폭발이지만, 제 그림 옆에 있으면 '질문'이 됩니다. 제 그림도 혼자 있으면 그냥 벽이지만, 예린 씨 그림 옆에 있으면 '대답'이 되고요.”
현수는 두 그림 사이의 공간을 가리켰다.
“우리는 서로의 부족함을 메우는 게 아니라, 서로의 과잉을 버티고 있는 겁니다. 이게 저희가 찾은 조형적 균형입니다.”
박 교수는 허를 찔린 듯한 표정으로 안경을 다시 썼다. 그는 현수의 말대로 두 그림을 ‘한 세트’로 묶어서 다시 바라보았다.
확실히, 따로 떼어놓고 비평할 때는 보이지 않던 기묘한 텐션이 있었다. 붉은색의 과잉된 에너지와, 그것을 묵묵히 차단하고 버티는 푸른색의 단순함.
박 교수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꿈보다 해몽이 좋군. 아주 둘만의 세계에 푹 빠졌어.”
박 교수는 더 이상 긴말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좋아, 그 뻔뻔한 논리가 관객들에게도 통하는지 어디 한번 보지. 하지만 명심해. 설명이 필요한 그림은 좋은 그림이 아니야.”
박 교수가 나간 뒤, 화실에는 폭풍전야 같은 정적만이 감돌았다. 멀리서 들려오던 구두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예린은 주먹을 꽉 쥔 채 서 있었다.
“…미안해요, 현수 씨.”
예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정적을 깼다.
“나 때문에… 현수 씨 그림까지 안일하다고 욕먹었잖아요. 그 좋은 손 그림, 그냥 둘 걸 그랬어. 내가 뭐라고…”
“아뇨, 누나.”
현수가 예린을 돌아보며 담담하게 웃었다.
“교수님은 '그림'을 보신 거고, 저는 '관계'를 본 거죠. 누나의 그 파도가 있었기에 내 기둥이 의미가 생긴 거니까. 나는 내 그림, 지금이 훨씬 마음에 들어요.”
그 말에 예린의 가슴 속에서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무언가가 툭 끊어졌다. 그것은 죄책감이 아니라,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마움과 안도감이었다.

밤 11시가 넘어서야 두 사람은 정리를 마쳤다. 예술동의 복도 불이 하나둘 꺼지고, 화실 안에는 노란 스탠드 불빛만이 낮게 깔렸다.
예린은 비로소 긴장이 풀린 듯 의자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현수는 그녀의 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편의점에서 사 온 캔커피를 땄다. 캔 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현수 씨 말대로… 사람들이 내 상처를 보고 손가락질할까 봐, 사실은 그게 제일 무서워요.”
예린은 커피 캔을 두 손으로 쥐었다. 캔의 차가운 감촉이 닿자 참았던 떨림이 손끝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다시 그 우아한 척하던 감옥으로… 도망치고 싶어질까 봐.”
꼿꼿하게 버티던 그녀의 등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그것은 예술가의 고뇌이자, 한 인간의 생존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였다.
현수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섣불리 말을 꺼내지 않은 채,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떨고 있는 예린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투박한 온기가 짧은 숨결처럼 전해졌다.
예린의 손이 미세하게 움찔했다. 잠시 망설이듯 멈춰 있던 손가락이, 이내 천천히 방향을 틀어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현수는 그제야 숨을 고르듯, 손에 힘을 주지 않은 채 그대로 두었다. 놓지도, 더 끌어당기지도 않았다.
침묵이 먼저 무너졌다. 예린은 고개를 숙였고, 숨을 삼키듯 작은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현수는 그녀가 기댈 만큼만, 아주 조심스럽게 어깨를 내주었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그가 낮게 말했다.
“괜찮아요.”
화실의 낮은 조명 아래, 두 사람은 말없이 서 있었다. 캔버스 앞에 겹쳐진 그림자만이 쉽게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つづく
「本小说为作者独立创作的虚构故事,所有人物、情节、背景均为艺术加工,与现实中的任何个人、团体或事件无任何关联。若有巧合,纯属偶然。
본 소설은 작가가 독자적으로 창작한 허구적 이야기로, 모든 인물·줄거리·배경은 예술적 가공의 결과이며, 현실 속 개인·단체·사건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혹시 유사점이 있다면 이는 순전히 우연입니다.」
금기된 캔버스
제1장: 새로운 생활의 캔버스
제2장: 빗속의 만남
제3장: 색채의 공명
제4장: 그라데이션 컬러
제5장: 심연의 대화
제6장: 기교의 감옥, 빗장 너머의 시선
제7장: 박제된 초상과 소주 한잔
제8장: 뭉개진 형상, 주체의 탄생
제9장: 비명과 침묵의 밸런스
제10장: 남편의 방문, 그리고 해석된 비명
제11장: 증명된 <갈망>, 그리고 빗속의 동행
제12장: 거짓 없는 몸, 잔인한 기적
제13장: 무너진 유예, 다시 쓴 가면
제14장: 깨진 독, 쏟아진 기만
제15장: 하늘에 흩뿌린 거짓말
제16장: 가장 안전한 공범
제17장: 지워진 흔적, 차가운 다짐
제18장: 황금 감옥의 대가
제19장: 회색의 시간을 넘어
제20장: 비로소 채워진 캔버스 (最終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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