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펑이 다녀간 며칠 후, 학교 앞의 조용한 카페.
오랜만에 대학 선배 리링링이 예린을 찾아왔다. 창밖에는 늦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고, 두 사람 앞에는 따뜻한 김이 오르는 커피잔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결국, 그 사람에게 소리를 질러버렸어.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내 입으로 다 까발려 버렸지.”
예린의 덤덤한 고백에 리링링은 혀를 내둘렀다.
“와, 그 자존심 강한 왕펑이 얼굴 꽤나 구겨졌겠는데? 잘했어. 내가 다 속이 시원하다. 걔는 언제 한번 제대로 당해봐야 했어.”
리링링은 왕펑을 잘 아는 선배답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문득 진지한 표정으로 가방에서 메모지 한 장을 꺼내 밀었다.
“근데 예린, 이거 한번 봐봐. 한국이 난임 치료 기술이 세계 최고래. 여기 강남에 되게 유명한 산부인과라는데… 나랑 같이 한번 가볼래? 네 몸이 정말로 ‘고장’ 난 건지, 아니면 그냥 그동안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제대로 확인이나 해보자고. 너 아직 젊잖아.”
리링링은 예린의 가장 아픈 부분인 ‘불임’을 에둘러 말하지 않고 담백하게 인정했다. 하지만 그것은 비난이 아닌, 아끼는 후배를 위한 현실적인 제안이었다.
예린은 그 메모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고마워, 언니… 생각은 해볼게. 하지만 기대는 안 해. 중국에서 용하다는 병원은 다 가봤어. 이미 확정 난 거잖아.”
예린의 목소리에는 체념이 묻어있었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예린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그거 알아? 그 난리 통에… 현수 씨가 나한테 사랑한다고 하더라.”
“뭐? 그 잘생긴 후배가? 진짜야?”
리링링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 내가 애 못 낳는 불량품이라고 악을 쓰는데도, 상관없다면서 사랑한대. 진짜 미친 거지.”
예린은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낄낄거리며 웃었다.
“생각해봐. 유부녀이면서, 애도 못 낳는 여자한테 사랑 고백이라니. 걔는 어디 가서 웃음거리 되고 싶어서 환장했나 봐. 내가 기가 막혀서…”
“푸하하! 야, 걔도 진짜 특이하다. 취향 참 독특해.”
리링링도 예린을 따라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두 여자는 카페가 떠나가라 웃어댔다. 하지만 그 웃음은 비웃음이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현실의 비참함을 농담으로라도 넘겨보려는, 일종의 서글픈 자기방어였다.
“아이고 배야… 그래, 젊은 애가 잠깐 객기 부린 거겠지. 그냥 귀엽게 봐줘.”
리링링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예린도 따라 웃었지만, 가슴 한구석이 비릿하게 저려왔다. 웃음거리로 치부해버리기엔, 그날 현수의 눈빛이 너무나 뜨겁고 진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날의 대화 이후, 예린과 현수 사이의 공기는 미묘하게 달라졌다. 두 사람 사이의 존댓말은 여전했지만, 그 의미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그것은 타인이 침범할 수 없는 그들만의 비밀스러운 신호였으며,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은밀한 고해성사였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만 해도 예린은 전공 지식이 해박한 현수의 과제를 도와주며 조용히 지냈으나, 이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캔버스를 살피며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동료이자 그 이상의 존재가 되었다.

현수는 예린이 자신의 작품 <갈망>에 몰두할 수 있도록 묵묵히 도왔다. 그녀가 북경에서의 트라우마로 붓을 놓으려 할 때면 밤새 곁을 지키며 물감을 개어주었고, 묵묵히 그녀의 등을 지켜주었다.
예린은 현수의 젊고 단단한 에너지에 힘입어, 억지로 삼키던 보약의 쓴맛과 시어머니의 서늘한 시선 같은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강렬한 색채로 승화시켰다. 텅 빈 야간 실기실에서 함께 밤을 지새우며 하나의 화폭을 마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두 사람의 호흡은 마치 하나의 선처럼 정교하게 이어졌다.
그리고 일주일 뒤, 아트디움 대학교 정기 전시회의 최종 심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논란의 중심이었던 예린의 작품 <갈망>은 이번 전시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냈다. 보수적인 교수들은 “지나치게 파격적이며 노골적이다”라며 혀를 찼지만, 예린은 그 모든 편견을 뚫고 당당히 대상을 거머쥐었다.

같은 학급 동기이자 가장 가까운 조력자였던 현수의 작품 <기둥>은 가작(Runner-up)을 수상했다. 늘 수석을 놓치지 않던 그였기에 대상을 받지 못한 것이 아쉬울 법도 했지만, 현수는 예린의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그 누구보다 환하게 웃으며 박수를 보냈다. 그녀의 승리가 곧 자신의 기쁨인 것처럼.
전시회 뒤풀이가 끝나갈 무렵,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인파를 빠져나와 학교 뒷골목의 익숙한 포장마차로 향했다. 늦은 저녁이었지만, 빗소리를 안주 삼으려는 사람들로 천막 안은 북적이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갓 구워낸 큼지막한 해물파전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홍합탕, 그리고 소주병이 놓여 있었다.

“자, 받아요. 오늘의 주인공.”
현수가 예린의 잔에 소주를 따랐다. 빗소리와 함께 파전이 지글거리는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깔렸다.
“현수 씨… 나 이제 정말 돌아갈 수 없나 봐요.”
예린이 빈 잔을 만지작거리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상을 받고 나니까 더 분명해졌어요. 왕펑의 아내, 아이 못 낳는 며느리… 그런 거 다 버리고, 나 이제 진짜 작가가 된 것 같아요.”
“누나는 처음부터 작가였어요. 이제야 세상이 알아본 것뿐이죠.”
현수는 홍합 껍데기를 까주며 담담하게 말했다. 예린은 그런 현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현수 씨는 안 억울해요? 늘 1등만 했잖아. 나 때문에 가작에 그쳤는데… 솔직히 질투 안 나요?”
“질투라뇨. 오히려 신기하던데요.”
현수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 작품 <기둥>은 누구를 받쳐주려고 그린 게 아니에요. 저도 제 인생의 무게를 버티기 위해, 저 나름대로 치열하게 쌓아 올린 결과물이었죠. 사생아라는 꼬리표,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 그런 흔들림을 잡아주는 단단한 ‘푸른 기둥’을 그리고 싶었어요.”
현수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예린의 눈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전시장에서 누나 그림 옆에 제 그림이 걸린 걸 보고 놀랐어요. 누나의 캔버스 속 그 검붉게 요동치는 파도와, 제가 그린 차분하고 묵직한 푸른 기둥들이… 마치 처음부터 한 쌍이었던 것처럼 기묘한 균형을 이루더라고요.”
현수가 테이블 위에 놓인 예린의 손을 조심스럽게 덮어 잡았다.
“서로 다른 색깔, 서로 다른 상처를 가진 두 그림이 만나서 비로소 완벽한 공간을 만들어내는 느낌이었어요. 우리의 그림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그런 거 아닐까요? 서로 달라서 더 필요한 사이요.”
현수의 다정한 눈빛이 예린의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건드렸다. 며칠 전 카페에서 리링링과 함께 웃음거리로 넘겼던 그 고백이, 지금 이 순간에는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이 되어 가슴에 박혔다.
그것은 단순한 호감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추하고 아픈 상처마저 예술로, 그리고 동등한 인격체로 이해해준 사람에 대한 경외에 가까운 이끌림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얽히는 순간, 포장마차 안의 왁자지껄한 소음이 빗소리와 함께 멀어졌다. 오직 서로의 영혼을 가장 깊숙이 응시하는 두 남녀의 숨소리만이 남았다.

계산을 마치고 나오자 빗줄기가 더 굵어져 있었다. 현수는 우산을 펼쳐 예린의 어깨가 젖지 않도록 깊숙이 기울였다. 좁은 우산 속, 두 사람의 어깨가 맞닿을 때마다 젖은 옷 위로 뜨거운 체온이 전해져 왔다.
이윽고 기숙사로 향하는 오르막길과 시내로 이어지는 갈림길이 나타났다.
두 사람의 발걸음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오르막길을 지나쳐, 도시의 불빛이 은은하게 번지는 거리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나의 우산 아래 나란히 겹쳐진 두 사람의 그림자가, 빗안개 자욱한 밤거리 속으로 고요하게 스며들었다.
つづく
「本小说为作者独立创作的虚构故事,所有人物、情节、背景均为艺术加工,与现实中的任何个人、团体或事件无任何关联。若有巧合,纯属偶然。
본 소설은 작가가 독자적으로 창작한 허구적 이야기로, 모든 인물·줄거리·배경은 예술적 가공의 결과이며, 현실 속 개인·단체·사건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혹시 유사점이 있다면 이는 순전히 우연입니다.」
금기된 캔버스
제1장: 새로운 생활의 캔버스
제2장: 빗속의 만남
제3장: 색채의 공명
제4장: 그라데이션 컬러
제5장: 심연의 대화
제6장: 기교의 감옥, 빗장 너머의 시선
제7장: 박제된 초상과 소주 한잔
제8장: 뭉개진 형상, 주체의 탄생
제9장: 비명과 침묵의 밸런스
제10장: 남편의 방문, 그리고 해석된 비명
제11장: 증명된 <갈망>, 그리고 빗속의 동행
제12장: 거짓 없는 몸, 잔인한 기적
제13장: 무너진 유예, 다시 쓴 가면
제14장: 깨진 독, 쏟아진 기만
제15장: 하늘에 흩뿌린 거짓말
제16장: 가장 안전한 공범
제17장: 지워진 흔적, 차가운 다짐
제18장: 황금 감옥의 대가
제19장: 회색의 시간을 넘어
제20장: 비로소 채워진 캔버스 (最終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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