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시기 국내성 이라 불리우던 집안 集安(吉林省通化地区集安市)에는 지금 까지 남아 있는 고구려 유적들의  많다.

그중 장군총의 위용은  세월의  풍파에도 고구려의 휘황한 역사와 혼백을  천추로  만방에 전하고 있다.

오늘 날 우리 고구려의 후손들의  장군총의 대체적 으로 어느 왕의 무덤 인지는 확실히 알지 못하지만 북한과 중국의 역사 학자들은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 하고 있다.

구경 고구려 몇대 왕의 무덤 인지는 정확히 알수 없지만 무덤의 어마어마한 규모나 정교함은 놀라울 정도 이다. 

4 , 5세기에 우리 선조들의 몇십톤씩 되는 거석들을 어떻게 움직여서 정교하게 적석총을 쌓아서동방의 피라미트라고 하는 장군총을 만들 었는지  경외심의 앞선다.

장군총을 마주하면 고구려의  령혼들의 지금도 살아 숨쉬는 것 같아 뿌듯하면서도 서글픈 마음에 착잡해 진다.

장군총의 주인공에 관해서는 종래 많은 연구자들의 추정이 있었으나, 대략 광개토왕과 그의 아들인 장수왕으로 갈라져 있다. 이것은 태왕릉과 장군총을 규모와 축조기술면에서 비교해 서로 선후를 가리고, 또 그것을 4, 5세기대에 가장 걸출했던 2대의 왕에 비정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초기에 현지를 조사했던 일본인 도리이와 프랑스인 샤반은 태왕릉을 광개토대왕릉으로 보았다. 세키노는 이와는 달리, 장군총을 호태왕비와 관련시켜 광개토대왕릉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이케우치[池內宏]는 태왕릉을 광개토대왕릉으로, 장군총을 제10대 산상왕릉으로 추정한 바 있다.

다시 미카미[三上次男]는 축조기술이 태왕릉보다 발달되어 있는 점에서 5세기 말의 장수왕릉으로 추정한 바 있다. 최근의 나가지마[永島暉臣愼]와 다무라[田村晃一]는 장군총을 광개토대왕릉으로 보고 있다.

한편, 북한의 학자들은 대체로 의견이 통일되어 태왕릉을 광개토대왕릉으로, 장군총을 장수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장군총이 소재하고 있는 중국에서도 이와 같이 추정하고 있다.

장군총은 413∼490년 사이에 축조된 고구려의 대표적인 적석묘로 고구려 20대 왕인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능이다. 무덤의 주위에는 잔 자갈을 넓게 깔아서 일정한 넓이의 묘역이 만들어져 있으며 이 묘역 좌측 뒤에는 배총군이 있다. 무덤의 내부는 석실로 되어 있고, 외부는 7층의 계단식 적석총이며 모양은 사각형으로 되어 있다.

1면에 큰 돌을 3개씩 모두 12의 호석을 기대어 놓았다. 현재 우측면에 1개가 없어져 11개만 남아 있다. 쌓아 올린 장대석들은 모두 1,100여 개에 달하며 돌의 크기는 반드시 일정하지 않으나 대략 제1층은 큰돌을 사용하고 위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작아진다. 무덤의 내부에는 채색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벽화가 있었던 것 같다.

장군총 배총의 정측면 – 배총()은 딸린무덤이라고 하는데 무덤의 주인을 보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장군총 주변에는 1개의 작은 돌무덤을 비롯해서 4곳에 비슷한 규모의 배총 흔적이 남아 있다. 남아 있는 배총을 기준으로 밑면의 길이는 각 9.2m터 정도이다. 기단부의 높이는 1.9m가량이고 그 위에 노출된 석실이 자리하고 있다. 석실의 형태가 고인돌과 닮아 있다.

                                                                                        사진 : 2013년7월17일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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