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는 698년 대조영이 건국한 이래 926년 거란에 의해 멸망되기까지 15대 왕조를 거치며 번성했다. 건국 이후 선왕()대에 이르러 정치적 안정과 영토 확장을 거치며 대국으로 성장했고, 13대 대현석() 때에 이르러서는 당으로부터 해동성국이라 불리울 정도로 정치·사회·문화적으로 번영을 구가했다. 문화적으로는 고구려를 계승하면서 동시에 당의 문화를 받아들여 발전을 이룩했는데, 그 중심선상에 자리했던 불교는 건국 초기부터 국가 통치 기반의 중요한 이념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에 따라 발해의 영토 내에서 많은 수의 절터가 확인된 바 있고,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발해 전역에서 확인되는 절터와 유물은 불교가 성행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로 생각되는데, 동경성에는 석등이 현존하고 있어 더욱 주목된다.

상경 용천부 석등은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상경용천부 제2절터에 소재한 높이 6.3m 규모의 석등이다.

이 석등에 대한 가장 이른 시기의 조사 연구는 1939년에 발간된 『동경성-발해국() 상경용천부의 발굴조사(調)』이다. 이 책자에 기술된 내용 중 일부를 적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석탑(실은 석등)은 고사기()가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전체가 동남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서 있다. 그 구륜·입석·화대석·중대석·간석·기대석은 각각 별개의 돌로 만들어져 있다. 입석·화대석·기대석은 팔각형, 중대석은 연판을 형상화했고, 간석은 원주, 기대석은 그 상반에 연판이 새겨져 있지만 하반은 땅속에 매몰되어 있었다. 이 하반의 형상은 우리가 실측과 촬영을 위해 기대 주위를 적당한 깊이로 파내려갔을 때 그 팔각형의 각면에 웅혼()한 연판장의 광협간()이 새겨져 있음이 드러났다. 그리하여 총 높이 1장 9척 가량의 전체 형태를 볼 수 있었는데, 그 간의 두께와 둘레의 모습은 뭐라 말할 수 없는 강렬함과 안정감을 자아낸다. 그러나 이 기공이 많은 거무스름한 현무암의 석재가 갖는 묵직한 작풍을 접하면 누구라도 소박한 발해인의 혼의 기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위 기록을 보면 1939년의 조사 당시 하대석의 하부가 매몰되어 있어 전모를 노출시킨 정황과 더불어 모든 부재가 구비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은 현존하는 발해 석등에 대한 가장 초기적인 자료로 생각되는데, 조사 당시 실측 도면이 작성되어 지금도 연구의 주요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이 석등은 현무암을 사용해 하대석으로부터 옥개석에 이르기까지 평면 팔각형으로 조성되었다. 여러 매의 석재로 이루어진 지대석 상면에 상·하 2단으로 구성된 하대석을 놓았다. 하단석에는 각 면 1구씩 좌·우 2괄호형의 안상이 조식되었는데, 높직한 하단석 각 면의 규모에 걸맞는 높이와 너비를 지녀 시원스러운 느낌을 준다. 상단석에는 3중의 단엽 8판 복연이 조식되었다. 연화문은 하면으로부터 상면으로 갈수록 일정한 비례로 크기가 줄어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로 판단이 교차되며, 중첩되게 조식되어 매우 화사한 구도를 보이고 있다.

                                          사진 : 2013년10월6일                  자료 : ( 네이버 백과 )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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