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한번 뿐인 유한한 생에서 보다 건강하고 매력적인 모습이기를 바라며 시처럼 아름답고 빛나는 정서로 살아가길 원한다. 하지만 흔히 아등바등 살아가다가 후줄근히 늙어가면서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하고 병들고 나중에 죽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를 노력하며 갈망하든지를 막론하고 늘 슬프고 힘들고 실망할 때가 많다. 그 때마다 우리는 자신이 믿고 의지할 누군가를 간절히 바라기도 한다.

수시로 머리가 아파지던 쯤의 어느 날 문득 치매에 대해 조금 생각해본 적 있다. 그 때가 된다면 과연 어떡할가? 더는 스스로 정신을 추스릴 수도 없을 테니 멀쩡한 육체만으로 바보스럽게 살아있는 자신에 대해 책임질 수도 없다. 구질구질하게 누군가에게 매달려야만 살아갈 수 있는 병, 너무 비참하고 너무 잔인하다. 한치 앞도 모르는 우리네 삶인데 언제 어떻게 당할지 알 수는 없다. 너무나 불행하고 미칠 듯이 고통스럽겠지만.

어쩌면 치매라는 병은 사람들을 위해서 찾아오는지도 모르겠다. 여태의 고된 삶을 부려놓고 훨훨 가볍게 날아보라고. 여태 쏟아놓은 부끄러움이나 죄스러움을 감감 잊고 철부지로 즐겁고 신나게 살아보라고. 여태 불리워온 이름과 그에 따르는 모든 책임과 의무를 떨쳐내고 자신만 산뜻하게 챙겨보라고. 여태 아득바득 애쓰며 더 가지지 못해 안달아했던 모든 것들과 전 생애를 지배하던 육체와 정신까지도 진정 자신의 것이 아님을 깨닫고 다 놓아버리고 한껏 편해지라고…

과연 그 때가 온다면 이렇게 너그러이 받아들이며 순응할 수 있을가? 내가 따르든 말든 관계없이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다소곳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만약 그 때가 온다면 이러한 나를 누가 진심으로 맡아서 함께 해줄지 심히 걱정스럽고 동시에 무척 쓸쓸해진다.

많은 얼굴들을 떠올려본다. 그러나 정작 나를 맡길 사람이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 때에 내 곁에 계셔줄지 모르는 부모님을 제외하면 말이다. 정말로 그런 날이 온다면 완전한 사랑에 의지하여 아주 평온한 모습으로 조용하게 향기로운 바람 한오리에 실려 그렇게 가고 싶다. 그러나…

이 때 딩동 하는 메시지 알람이 울린다.

잘 있느냐는 안부 이모티콘.

“나를 부탁할게. 어느 날 문득 바보가 된다면 맡아줘”. 하고 내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답장 메시지를 띄운다.

참 놀랍고 황당한 말이여서인지 한참을 대답 없이 잠잠했다.

하늘을 바라보니 쨍하니 빛나고 류달리 파란 하늘이다.

하늘을 사진에 담아 날린다.

“이토록 파란 하늘 아래서 약속했어.”

일방적으로 말해놓고 약속이란다.

또 한참이 지나고 피를 토하는 이모티콘이 날아온다.

한심한 내게 피라도 울컥 올라오나 본다. 그 이모티콘과 그 사이에 흐른 침묵이 주는 상징성으로 나는 그의 복잡한 감정을 충분히 느끼고 있다.

이러저러한 대화를 나누다가 끊고 스스로도 어이없었지만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다행스러운 행운에 나는 불현듯 눈물이 솟는다. 그에게 감격하고 이 세상에 감격한다.

그러나 그 뒤로 나는 왜 나에게 나를 부탁한다고 말하지 못하고 있는 걸가? 나는 나에게서 얼마나 먼 사람일가? 나는 지금의 나에 대해 잘 알고나 있는 걸가? 나에 대한 해야 할 사랑을 다하고 있는 걸가? 하는 물음에 시달린다. 그리고 어느 만큼 끊임없이 따져묻든지를 막론하고 결국 나 스스로에 대한 책임의 부재를 느끼며 죄책감으로부터 자유스럽지 못하다.

살다 보면 가끔 몸이 여기저기 아파오기도 한다. 그것은 기실 몸의 그 한부분이 나에게 자신을 좀더 보살펴달라고 부탁해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늘 아무렇지도 않은 듯 미루어왔고 무관심했고 지어는 좀 짜증까지 냈다. 괜찮아지겠지 이 정도라면 심하지 않아, 며칠 지나다보면 나아지겠지, 왜 벌써 아프고 이러지…그렇게 자신의 몸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되려 몸을 너무나 함부로 굴어왔는지도 모르겠다. 찬바람이나 소나기 속에서 떨게도 했고 밤을 하얗게 새기도 했고 엄청난 량의 술을 마시기도 했고 온몸의 맥이 다 빠지도록 무리하게 자신을 혹사시키기도 했고…

그리고 또 내 마음도 제대로 챙겨주고 달래주지 못했다. 가끔 힘들고 지치고 쓰러지는 줄 알면서도 나는 그 어떤 위로도 하지 않았으며 지어 만져주고 공감해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상처는 늘 덧나고 슬픔은 더 깊어져가고 허무는 더 지독해졌고… 나는 나에게마저 내심의 말을 꺼내지 못하고 나의 감정들을 쏟아놓지 못한 채 혼자서 상처를 껴안고 병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감감 모른 척 의연히 랭담했고 어서 지워지고 잊혀져가기를 원했다.

왜 그렇게 함부로 팽개쳐 두었을가? 나는 또 다른 나에게 모든 걸 깡그리 밀어버리면 정말 그것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이 건강한 삶이 이어질 거라고 생각했을가? 내가 외면하면 다 존재하지 않거나 지나가고 사라지는 줄 알았는데 얼마나 우스운 기대인가. 어쩌면 나는 나의 진실을 인정하기가 불안하고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대로 인정하면 무거운 어둠에 눌리워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린 채 더는 멋진 미래를 꿈꿀 수 없을 것만 같아서 말이다. 어쩌면 나는 완벽하지 못한 내가 부끄러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고 늘 고개를 돌렸다. 나는 아름답고 싶었고 빛나고 싶었고 강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드러내지 못하고 안으로 숨 죽여 울어야 했던 흐느낌은 얼마나 힘들었을가. 소리내여 울지도 못하고 마음껏 표현도 못하고 소외당한 채 얼마나 외롭게 홀로 아팠을가. 혼자 감당하고 극복해내느라 한조각 위안이 얼마나 절박하게 그리웠으며 또한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가. 상처 입거나 눈물을 흘린다고 추한 게 아니고 비겁한 게 아닌데 말이다. 더는 무관심하고 무책임하고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다독여주며 긍정의 힘을 길러가야 한다.

따뜻한 손을 내밀어 상처들과 그 흔적들을 조심스레 어루만진다. 드러내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쓴 그 상처들의 신음이 들리고 그들의 괴로움이 보여진다. 많이 아팠구나, 참 많이도 아팠구나, 어찌 다 견뎌냈니, 제대로 보살피지 못해서 너무 미안해, 하고 속삭이며 나는 한없이 부드럽게 나를 껴안는다. 순간 눈물이 흐른다. 내가 나를 버려둔 사이에 나는 아프고 아팠을 뿐이다. 내가 표현해낸 기쁨이나 환희나 설레임이나 행복이나와 같은 향기로운 감정과 당당하고 씩씩하고 화려하고 눈부신 모습들은 기실 모두가 아주 정교하게 꾸며진 거짓된 자아였을 뿐이다.  

나를 부탁해.

그 말이 나의 가슴에 깊은 소용돌이를 만들며 울려펴진다. 그 울림이 무겁고 강렬하게 나를 흔든다. 점점 더 커지며 나를 파고 드는 전률 속에서 나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누구도 내 몸과 마음과 정신과 령혼을 온전히 모르며 오로지 나만이 나의 외면과 내면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챌 수 있고 바르게 읽어낼 수 있다. 나를 그 누구에게 더 부탁할 수 없다.

나는 이제 나를 책임져야 한다. 우선 나는 아주 평범한 인간이며 그리고 사람은 다 약한 존재임을 승인해야 한다. 그러므로 안 아픈 척 안 슬픈 척 안 외로운 척 안 두려운 척 안 불안한 척할 필요는 하등 없다. 몸이 피곤하고 지치면 견디지 말고 이런 일 저런 일 다 제쳐놓고 편안히 누워있게 해주어야 한다. 서럽거나 괴로우면 참지 말고 거침없이 드러내고 하염없이 울게 해주어야 한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은 억지로 하도록 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두어도 괜찮다고 말해주어야 한다. 좀은 부족하고 느리더라도 자신을 믿으며 힘을 고여주어야 한다. 더는 나를 사랑하는 법을 잊지 않으며 자신을 사랑하는 권리를 스스로 빼앗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소중한 나를 부탁했다. 이제부터 나를 기다려온 나와 내가 새롭게 만나 치열하게 그리고 찬란하게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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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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