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 때러 부엌 아궁이(고향에서는 '부시깨'라고 했다.)에 내려간 지 이슥한데도 가마가 끓어오르는 동정이 없어서 기다리다 못한 엄마가 내려다보면 아버지는 영낙없이 불쏘시개로 아궁이 곁에 쌓아두었던 신문을 읽고 계셨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늘 그런 모습이셨다.
명절 때 친척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도 아버지는 불콰한 낯빛을 하고 썩 괜찮은 언변으로 좌중을 웃기고 울리며 술자리 분위기를 띄우다 약한 술때문에 일찌감치 한켠에 물러난 후에는 구석진 곳에서 잡지책을 읽으셨다.
때로는 종내 술을 이기지 못하고 문턱을 베고 누워서는 긴 다리를 포개고 흔들거리시며 책을 읽었다. 그러다가는 다시 일어나 긴 손가락으로 바닥에 글자를 써보군 하셨다.
아버지는 다독가였고 또 꽤나 예리한 업여 비평가셨다.
"어째 글이 이렇게 빙빙 에돌구기만 하면서 중점을 찌르지 못하니?"
"한둥만둥한 소리를 뭣하러 한다니?"
"늙어서 격정이 없어지면 시 같은 건 쓰지 말아야 한다."는 등의 검증되지 않은 본인만의 일가견을 펼치기도 하셨다.
부끄러워서 내가 쓴 글을 직접 보여드린 적은 없지만 주문해 드린 잡지에서 내 글을 읽으시고 아버지는 에누리 없이 돌직구를 날리셨다.
"그 글은 그저 어찌 안 쓰랴 싶어 쓴 것 같더구나."
아버지의 한 마디 평가가 그 누구의 백마디 평가보다 더 날카롭게 내 가슴에 와서 꽂힌다.
아버지는 내가 학교를 다녀서부터 내게 비교적 랭정한 조선어문교사로 군림하셨다.
"돈 빌려서라도 날 새 자전거 사주면 안됨까?"라고 내가 집안 상황에는 분에 넘칠 요구를 하면 아버지는 그 요구에 앞서서 틀린 내 표현을 바로잡아주셨다.
"돈과 쌀 같은 건 빌리는 게 아니라 꾸는 거다. 책이나 옷 같은 거라야 빌리지."
"어떻게 다름까?"
어느덧 나는 애초의 새 자전거를 가지겠다는 욕심을 잊어버린 채 아버지가 즉흥적으로 꾸린 '조선어문 강습반' 학원 모드가 되여버렸다.
"쌀이나 돈은 그걸 가져다가 갚을 때 고대로 갚는 게 아니라 그만한 가치만큼 가져다 갚는 거길래 이럴 때는 '꾸다'고 해야 맞다."고 아버지는 설명하셨다. 나는 그 설명을 아직 잊지 않고 있다.
"난 고기속 밴새는 안 먹겠슴다. 닭알속 밴새 먹겠슴다."라고 하면 아버지는 또 '밥상머리' 어문 교육을 펼치셨다.
"속이 아니라 '소'다. 고기소 밴새다."
“이 옷은 너무 커서 입으면 고양이 우산 쓴 거 같슴다.”라고 제법 내가 속담을 구사할 때에도 아버지는 에누리 없이 지적하셨다.
“우산이 아니라 ‘우장’이다.”
어문 교육을 펼치실 때의 아버지는 자못 엄숙하셨다. 평소의 유들유들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어려서는 감기에 걸리면 병원에서 링겔을 맞으며 맛있는 과일통졸임을 먹는 반급애들이 부러웠다. 병원 침대에 누워 링겔을 맞는 것이 호사로 보였다. 부모님들은 어쩔바를 몰라하시며 침대가를 맴맴 돌고 그 아이들은 꼬마황제답게 응석만 부리는 듯 보였다.
"나두 감기 오면 집에서 앓지 않겠슴다."
"그럼 한데서 앓으려구?"
"병원 가서 땐디(링겔)' 맞으며 앓겠슴다. 내 무슨 거저 아프겠슴까."
"'거저' 아프지 않으면 돈 내고 앓게? 그저 집이 똑 제일이다."
아버지는 그렇게 '그저'와 '거저'의 차이를 알려주셨다.
언제부터 쓰인 말인지 연유는 확실히 알길이 없지만 "이번 시험에 잘 친 날에는 뭐 사주겠슴까?" 따위 듣도보도 못한 문법이 한때 구어체에서 많이 쓰였다. 청소년들 사이에서 많이 사용됐던 것 같다.
아버지는 이 말도 퍽 못마땅해하셨다. "'시험을 잘 쳤을 경우에는', '시험을 잘 치면'이라고 해야지 '잘 친 날에는'이라는 게 무슨 말이야?" 라고 일침을 놓으셨다.
“아버지, 내 찬찬히 생각해본 게 말임다 예?”라고 내가 운을 떼면 “생각은 곰곰히 하는 게다.”라고 아버지는 꼬집으셨다.
아버지는 책에서는 본 적 없는 속담도 잘 구사하셨다. "벼룩 사등이(등)에 홰질이다.", "가난이 매찰이 없다.", '두만강이 녹두죽이래도 곰방술(숟가락)을 찾지 못해 굶어 죽을 놈" 같은, 표준말에서는 이제 지워져가는 속담들을 많이 사용하셨다.
"벼룩 사등이에 홰질이다"라는 속담은 워낙 좁디좁은 벼룩 등에까지 밭을 일구겠다고 '홰질'을 하는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는 행위를 이르는 말이라고 했다.
"가난이 매찰이 없다."는 가난하므로 장소에 걸맞는 차림을 할 수가 없으니 언제나 한가지 행색이므로 '매(멥쌀)' 것이나, '찰' 것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하셨다.
"대한에 나돌아다니다 얼어죽은 놈은 땅에 파묻을 때 손발을 내놓고 묻어야 한다.”라는 속담도 들었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아직 물어보지 못했다. ‘철없는 놈’에 대한 좀 가혹한 욕으로 들린다.
"시누이는 가달두새(가랑이 사이)에 붙은 거머리"라는 말씀도 하시며 그런 시누이가 되지 말기를 넌지시 나한테 당부하셨다. 다리도 아니고 왜 하필 '가달두새'냐고 물었더니 남 앞에서 대놓고 털어버릴 수도 없는 곳이라 속으로 전전긍긍하며 내치고 싶은 존재여서 그렇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내가 하는 말에서의 군더더기도 잊지 않고 지적하셨다.
"그 있잼까. 예?"
"오. 너 있는 거 아니까 그냥 말하거라."
"오는 길에 마다바이 봤다 말임다 예?"
"말임다는 왜 붙이니? '봤다'고 말을 끊어라."
애석하게도 기대한 만큼의 '청출어람'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착실한 교육을 받았지만 나는 여전히 군더더기가 없으면 말을 이어가지 못하는 듯 군데군데 군더더기를 덧바르며 말을 한다.
그러나 한번쯤 생각은 굴려본다. "앗, 또 군소리를 넣었네. 다음에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각성을 제법 해본다.
나는 고중까지의 12년간의 조선어문공부로는 모자라 대학에서 7년을 더 우리말을 공부했고 졸업하고나서도 여전히 우리글을 다듬는 일을 하고 있다. 아버지의 밥상머리 조선어문교육과 갈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제법 리론적인 공부도 했지만 여전히 나는 아버지 앞에서 작아진다.
'모어'를 '부어(父语)'라고 바꿔 말해도 과장이 될 건 없다고 나는 감히 생각한다. 아버지의 언어는 내 언어의 원천이였다.
우리말 공부는 학교교육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밥상머리 우리말교육이 퍽 효과가 있음을 나는 증명해보이고 싶다.
우리말 교육이 요즘 위기라는 풍문을 들었다. 부모 개개인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우리말교육을 중시하고 그만큼 정성을 쏟는다면 생각하는 만큼의 위기상황은 닥치지 않을 거라는 기대를 조심스레 가져본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네라.”라던 아버지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아버지랑 통화다운 통화를 한 지가 이슥하다. 이제 년세가 들어 가는 귀가 먹은 아버지에게는 늘 짧게 문안인사만 하고 엄마랑만 통화를 했다. 볼륨을 최대한으로 키우고 오늘은 아버지께 긴 전화를 드리려 한다.
아버지가 가르쳐주시던 ‘빌리다’와 ‘꾸다’는 이제 구분이 없이 사전에서도 다 “돈을 빌리다”, “쌀을 빌리다”로 쓰이고 있다고 말씀드리면 아버지는 무슨 반응을 보이실까? 보나마나 “사전 만드는 놈들도 다 얼떨떨한 놈들”이라고 아버지다운 일갈을 날릴 것이다. 보석 같은 아버지의 우리말이 그립다.

글 내용을 떠나서 메인 사진만 보면 개콘코너 “밥묵자”가 생각나는건 저만 이럴까요? ㅋㅋ 글 잘 읽고 갑니다!
그러고보니 글슴다 . ㅎㅎㅎ
저도 이렇게 밥상머리 조선어 교육을 하는 아버님이 계셨더라면 조선말을 날궜겠는데…ㅋㅋㅋ. P.S. 근데 부스깨 아임까? ㅋㅋ
언어적으로 말새질을 하고 이라리를 캐느라 물리나 못했는맴다. ㅎㅎㅎ
아하하하~아버님의 멘트에 여러 번 빵 터졌습니다~! 몽실님이 하는 일에는 아버님의 교육의 흔적이 다분히 남아있네요…아버님이 엄청 자랑스러워하실 것 같습니다!!! 맞춤법이나 어휘 사용이 틀렸을 가봐 조마조마하면서 글을 남겨봅니다😂😂😂
고마워요~ 맞춤법은 우리 서로 좀 틀리기로 해요 ㅎㅎㅎ
저도 이런 아버지가 되고 싶네요
과분한 찬사군요. 우리 아부지가 딴 건 몰라도 저랑 대화를 참 많이 했었어요
“청출어람” 입니다. 요즘 즐겨찾기에 넣고 追读 하고 있습니다. 화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