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버지는 어릴때 일찍 어머니를 잃고 홀아비 슬하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12살, 삼촌은 7살, 고모는 3살로 한창 엄마품에서 응석부리며 개구쟁이로 뒹굴 나이였지만 여념없는 아버지는 밭일을 했고 가무일까지 했다. 그래서인지 우리 아버지의 일솜씨는 남달리 능란했고 손재간도 많아 마을에서 소문난 실농군으로 생산대의 모든 일에서 주력을 담당했다.
해방전 아버지는 어느 부자집 소를 길러주며 일했는데 그 소가 새끼를 낳으면 아버지가 가지기로 약정하고(윤두소라고 했다) 정성을 다해 길렀는데 마침내 그 소는 새끼를 낳아 귀여운 새끼송아지는 우리집 소가 되였다(1942년). 소가 없으면 농사 짓기 힘들던 세월 아버지는 우리집에 온 새끼송아지를 자식마냥 돌보며 지극정성으로 길렀기에 윤두소는 얼마 지나 어미소로 되여 해마다 새끼를 낳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우리집에는 살림기초가 마련되여 가난하던 집살림은 펴지기 시작했고 행운스럽게 우리집에 온 윤두소는 아버지의 살뜰한 보살핌과 온집 식구들의 사랑을 받으며 때로는 사람마냥 대접까지 받으며 장장16년(1942~1957) 동안 우리 집에서 한집 식구처럼 지내며 부지런히 일했고 새끼도 많이 낳았다. 그때 우리집 외양간에는 내내 어미소와 밭갈이 둥글소, 새끼소까지 세마리 소가 북적거렸는데 아버지께서 10여년동안 세마리 소를 기르는 일은 힘든 고역이였다(밭갈이 둥글소와 새끼소는 엇갈아 팔려나갔다).
겨울이면 마당에 조이짚, 벼짚을 산더미처넘 가려놓고 여름이면 꼴을 베여다 쌓아놓고 하루도 쉼없이 작두질하여 소먹이를 마련했다. 할아버지께서 작두에 짚을 들이밀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높은 디딤돌 위에 올라서서 천장에 드리운 바줄을 잡고 힘겹게 작두질하며 가쁜 숨을 몰아쉬던 모습, 추운 겨울에도 작두질로 땀에 흠뻑 젖은 옷을 벗어 던지던 모습, 나는 지금도 눈앞에 선하며 생각할수록 가슴이 저려난다. 뿐만아니라 하루종일 고된 로 피곤한 아버지는 밤잠도 편히 쉬지 하고 밤중에도 일어나 여물로 퍼지운 콩과 두병을 짚에다 골고루 버무려서 소에게 먹이를 주군 했다.
밭갈이 철이 되면 우리집에서는 몇십근도 넘는 차좁쌀로 찰떡을 쳐서 소에게 먹이군 하였는데 커다란 배떠리(토기그릇)에 듬뿍 담은 찰떡을 아버지는 맨손으로 잘라내여 주물주물 찬물에 헹구어 소입에 넣었다. 소들이 넝큼넝큼 맛있게 받아 먹는 모습이 하도 신기하고 재밌어서 어린 나는 아버지 옆에서 구경하면서도 아까운 찰떡을 소가 다 먹는것이 너무 아까웠다. 그후 어른이 되여서야 나는 알게 되였는데 밭갈이 철에 소가 지쳐서 들어 누우면 그해 농사를 망치게 되며 지친 소를 막무가내로 부리기만 하면 소는 춰서지 못하고 병들게 되며 오래 살지 못한다고 아버지는 매년 밭갈이 철이면 영양보충으로 소에게 찰떡을 먹였다는 것을…
부지런한 아버지는 소 외양간도 깨끗이 청결했고 쇠갈구리로 손수 빗을 만들어 틈만 나면 소잔등을 긁어주고 쓰다듬어주며 소몸뚱이에 묻은 오물까지 샅샅이 빗어냈기에 우리집 소들은 언제나 깔끔했고 해빛에 나서면 소잔등에서 반짝반짝 윤기 돌았다.
가을 싣걱질 할때거나 무거운 짐을 싣고 먼길을 떠날 때면 아버지는 종래로 수레에 걸터앉지 않고 언제나 소와같이 나란히 걸어다녔고 소가 지칠까부터 걱정하였다. 어느 한번 아버지와 어머니가 겉곡을 실고 먼곳에 있는 정미소로 떠났는데 어머니는 걷다가 다리도 아프고 맥이 없어서 아버지에게 “당신은 걷기 힘들지 않슴두. 나는 인젠 걷기 바쁜데…” 라고 더니 아버지는 수레에 앉으란 말 대신 “빈몸으로 걷는 당신이 힘들면 이 많은 짐을 끌고가는 소는 얼마나 힘들겠소?” 라고 했다. 어머니는 속으로 “저 나그내는 제 안까니보다 소가 더 중한가?” 하는 생각에 화가 났다. 그러면서도 아버지 말씀이 점점 가슴에 와 닿으며 무거운 짐을 끌고가는 소가 불쌍하고 안쓰러워지며 어머니는 속으로 “그래! 아무리 우둔하고 말 못하는 짐승라지만 사람을 믿고 사는데… 힘든 일만하며 새끼도 많이 낳은 어미인데… 나도 자식을 낳은 어미인데…” 라는 측은한 생각까지 들며 수레에 앉지 않고 계속 걸어서 정미소까지 갔다.
1950년대초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이였던 주덕해 동지는께서는 농업에서 중요한 동력인 연변황소를 잘 기르며 과학적으로 우량품종으로 기를것을 대대적으로 호소하였다. 그때 우리집 어미소(윤두소)는 연변황소의 우량품종으로 선정되였고 우리 아버지는 소사양 모범으로 당선되여 1956년 왕청현 제7구 석현진에 가서 상장과 상품(목이 긴 흰 내복적삼)을 받았고 어미소는 머리에 큼직한 붉은꽃까지 달고왔다. 그날 우리 아버지 얼굴에는 기쁨의 미소가 그칠줄 몰랐고 자랑스러운 우리집 어미소는 붉은 꽃을 달고 절레절레 머리를 저어대며 집마당에 들어서던 모습을 나는 영원히 잊을수 없다.
그후 농촌경제가 집체화로 전환하던 공급사 때 아버지는 당의 호소에 향응하여 상급의 지시와 정책에 따라 우리집 세마리 소(어미소, 밭갈이 둥글소, 새끼소)를 무상으로 고급사에 입고하였다 10년넘게 자식마냥 아끼고 사랑하던 소들은 하루아침에 우리집을 떠나 웃마을(남양촌) 집체우사로 갔는데 애지중지 키우던 소를 집체우사에 떠나보낸 아버지는 허전함과 서운함에 일손을 잡지 못하고 서성거렷고 밤잠까지 설치였다. 우리집을 떠난 어미소 역시 마을 앞 신작로를 지날 때마다 제집에 들어오겠다고 발길을 돌리며 싱갱이질하여 우리집 식구들의 마음을 서글프게 하군 했다.
세월은 거침없이 흘러 아버지께서 소를 기르던 일은 옛말로 되였지만 나는 아버지가 마냥 그립고 자식처럼 소를 아끼고 사랑하던 아버지 모습을 잊을 수 없어 때로는 나의 소망을 담은 환상속에서 아버지를 그려 보기도 한다.
구중천에 가서도 우리집 어미소는 아버지를 찾아 헤매다가 행여 아버지를 만나면 허둥지둥 달려가 아버지 품에 비벼대며 씩씩거릴거고 우리 아버지 역시 너무 반가워 기특한 어미소를 끌어안고 하염없이 소잔등을 쓰다듬고 있는 모습을…
2022년 3월 17일
최정금
*명백한 오타나 띄어쓰기 오류는 수정하였으나, 기본적으로 원 저자의 표기를 그대로 따랐다.

이런 자료는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모았나요? 우리나무에서 이런 자료들을 시간대, 타임라인에 따라서 쭉 배열하는 식으로 디자인해도 좋겠네요. 시간과 가능하다면, 지도에 위치까지 찍어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