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쉰을 넘긴 지가 언제인데, 나는 아직도 가끔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깬다. 꿈의 무대는 늘 한결같다. 모교인 XX2중의 본관 앞, 커다란 대자보가 붙은 게시판 앞이다. 아이들이 구름처럼 몰려 있고 나는 그 거친 인파를 헤치며 맨 앞으로 나선다. 누런 전지 위에 붓글씨로 정갈하게 써 내려간 이름과 학급명, 대학교와 전공명이 빼곡하다. 그 수많은 이름의 숲을 헤매다 마침내 내 이름을 발견한다.
"박창석 – 3학년 2반 – 연변대학 – 화학계"
이름 옆에 선명하게 박힌 대학교 이름까지 확인하고서야 나는 광장 한복판에서 환호성을 지른다. "됐다! 드디어 해냈다!" 꿈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나는 당당히 대학교에 입학하여 내 이름이 붙은 숙소 번호를 찾아 복도를 걷는다. 그 생생한 발소리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하지만 환희는 늘 찰나에 불과하다. 꿈속의 나는 다시 눈을 씻고 대자보를 훑지만 내 이름은 어디에도 없다. '4년제 대학이 아니면 2년제 중등전문학교 이름이라도 있겠지' 하며 목을 놓아 기다려 보지만, 붓글씨들은 수묵화처럼 흐릿하게 뭉개지고 게시판은 닿을 수 없는 절벽처럼 높이 솟구친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식은땀 속에 눈을 뜨면, 지금의 평범한 나로 돌아오고 입안이 바싹 마른다. 그놈의 대학이 뭐라고, 반평생이 지난 지금까지 내 잠자리를 이토록 뒤숭숭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나의 모교 XX2중은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XX에 있던 유일한 조선족 고등학교였다. 1990년대를 전후한 그 시절, 고향의 치안은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거리에는 이른바 '갱'이라 불리는 불량 무리들이 득실거렸고, 10대에서 20대로 넘어가는 혈기 왕성한 남자아이들은 길을 걷다 이유 없이 그들에게 몰매를 맞기도 하였는데, 그들이 두려워 학교를 아예 그만두는 친구들도 부지기수였다.

나 역시 뼛속까지 문과 체질이었으나, 그런 무법천지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을 단련해야만 했다. 다행히 나는 킥복싱을 배우며 그 바닥의 생리를 조금은 알고 있었고, 함께 운동하며 우정을 쌓았던 친구들 덕분에 이른바 '면목(안면)'이 서 있던 터라 다른 아이들처럼 무참히 당하는 일은 드물었다. 하지만 학교 내부까지 침투한 폭력의 그림자는 피할 수 없었다. 사회 갱들과 어울리며 세를 과시하던 무리의 집요한 괴롭힘은 문장보다 주먹이 가깝던 그 시절의 일그러진 풍경이었다. 나는 결국 견디다 못해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학교 담장을 넘었다.
몇 달간 책가방 대신 거친 사회의 바람을 맞았다. 킥복싱 훈련을 하며 친해진 친구들과 당구장이며 녹상청(비디오 영화관)을 휩쓸고 다녔다. 하지만 야생의 길 위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내 코끝에 문득 학교 운동장의 흙먼지 냄새가 스쳤다. 무엇이든 다 응해 주셨던 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다시 공부하겠습니다." 그렇게 간신히 복학했지만 이미 벌어진 진도를 따라잡기엔 역부족이었다. 칠판 위 글씨들은 해독 불가능한 외계어처럼 떠다녔고, 나는 교실 안의 외로운 섬이 되어갔다.
그때 내 인생의 벼랑 끝에서 붙잡은 마지막 동아줄은 ‘체육’이었다. 중3때 주(州) 대회까지 나갈 정도로 몸이 날렵했던 나는 특히 자유체조에서만큼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실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당시 입시 제도상 체육학부에 진학하려면 지역을 막론하고 무조건 '리과(이공과)' 시험을 치러야만 했다. 나는 부득불 내 영혼에 꼭 맞던 포근한 문과의 옷을 벗어 던지고, 관절 마디마디를 조여오는 차갑고 무거운 이공계의 갑옷을 억지로 껴입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길림성내에는 체조 전공이 있는 대학이 단 한 곳도 없었다. 꿈을 위해 타 성(省)의 대학으로 눈을 돌리자니 실기는 기본이요, 일반 대학 입시생과 다를 바 없는 높은 '문화과(필기)' 성적까지 요구받았다. 몸과 머리를 동시에 쥐어짜야 하는 고통스러운 이중고의 시작이었다.
운명은 집요했다. 5월의 체육 실기 시험을 코앞에 두고 연습 도중 발목 인대가 끊어지는 파열음이 들렸다. 부어오른 발목은 내 꿈의 크기만큼 무거웠다. 실기를 치를 수 없게 되자 7월 본고사를 치를 의욕마저 휘발되어 버렸고, 나는 그해 입시를 통째로 포기한 채 시험장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그렇게 쩔뚝 거리는 다리를 끌고 허무하게 몇달을 흘려보낸 뒤 맞이한 재수 생활. 남은 길은 여전히 적성에도 맞지 않는 이공과 시험뿐이었다. 그 시절 대학교의 문턱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높았다. 한 학급에서 고작 대여섯 명만이 대학이나 중등전문학교의 입학 통지서를 받을수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각자의 생업을 찾아 흩어져야 했던 시대였다.
특히 가난은 재수라는 꿈조차 사치로 만들었다. 내 주변에도 한 번만 더 도전하면 충분히 합격할 실력을 갖췄음에도, 무너진 가족 경제를 돕기 위해 책 대신 연장을 들고 사회로 진출해야 했던 친구들이 수두룩했다. 그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삼 끼 밥 걱정 없이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재수를 허락해 주신 부모님의 뒷바라지는 내게 형언할 수 없는 행복이자 기적이었다. 이해되지 않는 공식들과 사투를 벌이면서도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건, 나를 위해 허리를 졸라맨 아버지의 헌신을 알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치러진 두 번째 시험. 결과가 발표되던 날, 나는 차마 학교 게시판 앞에 설 용기가 나지 않아 방 안에 틀어박혔다. 나 대신 자전거 페달을 밟아 학교로 향하시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성적표를 확인하고 돌아오신 아버지는 낮은 한숨을 내뱉으시며 힘없이 고개를 저으셨다. 딱 12점. 야속하게도 커트라인에서 그만큼이 모자랐다. 내가 만약 문과 시험을 쳤다면 충분히 넘고도 남았을 점수였기에, 그 한 뼘의 간극이 더더욱 뼈아프게 다가왔다. 아버지는 자책하며 고개를 숙인 나를 비난하는 대신, 그저 묵묵히 곁을 지켜주셨다.

"한 번만 더 해보자." 아버지의 그 낮고 무거운 한마디는 무너져 가던 내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운 마지막 밧줄이었다. 나는 결국 쓰라린 자존심을 억누르고 삼수의 길을 선택했다. 한참 어린 후배들 틈에 끼어 공부해야 하는 '차반(插班)'생의 처지가 못내 부끄럽고 멋쩍었지만, 이번만큼은 반드시 결과를 내야 한다는 절박함이 더 컸다. 무엇보다 나는 더 이상 거리의 갱들과 불필요한 힘겨루기를 하며 인생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소란스러운 세상의 유혹과 위협으로부터 나를 완전히 격리하고 싶었다. 조용히 책장에 넘어가는 종이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며, 오로지 공부에만 뼈를 깎는 집중을 쏟아붓고 싶어 스스로 기숙사 생활을 택했다. 기숙사의 좁은 방은 내게 세상의 거친 풍랑을 피해 들어온 유일한 요새였고, 내일을 꿈꿀 수 있는 최후의 보루였다.
그런데 그 위태로운 평온을 깨뜨린 것은 예기치 못한 '기억의 불일치'와 연변지역 특유의 반말(연변지역은 동갑내기나 한두살 차이는 서로 냐,냐, 이랬소, 저랬소 하는 "예"와 "야" 사이의 반말이 있다) 때문이였다. 삼수생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학교를 지키다 보니 세월의 엇갈림이 이런 비극을 만들었다. 새로 부임한 체육 선생님은 나의 한 학년 위 선배였다. 그는 숙사부(사감) 역할도 겸하고 있어 밤마다 기숙사 방을 순찰하곤 했다. 어느 날 밤, 방 문을 열고 들어온 그를 나는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는 윗반 선배이기 이전에, 나와 한 학급에서 공부하던 여동창생의 친오빠이기도 하였다.
"형, 오랜만이요! XX오빠 맞지? 나 정민 형이랑 함께 복싱 배우던 그 꼬맹이 창석이요!"
정민이는 그 형과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나는 정민이의 이름을 대면 그가 나를 금방 알아보고 반갑게 맞아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철저히 나만의 기대였다. 교사라는 완장을 찬 그의 눈에 나는 그저 '처음 보는 새파란 꼬맹이'일 뿐이었다. 그는 “니, 누구보고 냐, 냐 하니?” 하면서 갑자기 준비도 없는 내 뺨을 후려쳤고, 오해를 풀려 찾아간 숙사에서 다시 한번 손찌검을 퍼부었다. 그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 '툭' 끊어졌다.

나는 따귀를 후려치는 그의 손을 전광석화처럼 피하며 정권으로 그의 콧등에 정격탄을 박아 넣었다. 나보다 20센치나 더 큰 거구였지만 실전 무술과 체조로 단련된 내 몸놀림을 당해낼 재간은 없었다. 그는 쌍코피를 쏟으며 세수대야를 휘두르고 걸상을 들어 공격해 왔지만, 분노한 나의 기세를 꺾지 못한 채 처참하게 무너졌다. 결국 이튿날 교사 폭행으로 낙인찍혔고, 사실상 시험 자격을 박탈당한 채 나는 학교라는 성벽을 스스로 걸어 나왔다.
대학교 시험 자격 상실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내게, 산해관(山海關)에 있는 한 거대 기업이 학교까지 찾아와서 조선족 노동자들을 대거 모집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제 더 이상 학교라는 울타리에 머물 수 없음을 직감한 나는 부모님께 무릎을 꿇고 허락을 구했다. 타지에서 내 힘으로 길을 찾아보겠다는 아들의 결연한 말에 아버지는 무거운 침묵 끝에 고개를 끄덕이셨다.
생전 처음 집을 떠나 도착한 산해관의 기업은 거대한 '조선족의 바다'였다. 상지, 오상, 아성, 무순 등 중국 각지에서 구름처럼 몰려든 조선족 청년들을 보았다. 나는 난생처음 연변 밖에도 이토록 많은 우리 동포가 살고 있으고 우리랑 서로 다른 사투리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경외감을 느꼈다. 하지만 낯선 세상의 환대는 짧았다. 회사는 도착하자마자 신분증을 저당 잡았고, 나는 뙤약볕이 내리쬐는 현장에서 온종일 시멘트 길을 닦으며 몸을 갈아 넣어야 했다.
밤마다 기숙사 딱딱한 침대에 누우면 사무치는 외로움이 밀려왔다. 난생처음 겪는 '객지살이'는 어머니의 따뜻한 밥상과 고향 집의 공기를 뼈저리게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그 지독한 향수병과 강제 노동 끝에 한 달 만에 간신히 신분증을 되찾아 고향으로 돌아오던 길, 나는 창밖을 보며 깊은 사색에 잠겼다.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크고 넓었으며, 혈기 넘치는 주먹 하나로는 결코 세상의 수많은 파도를 당해낼 수 없다는 진리를 몸소 깨달았다. 무엇보다 연변이라는 우물을 벗어나니 내가 중국어 한마디 제대로 못 하는 부족한 존재라는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빈손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지만, 내 가슴 안에는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단단한 각오가 싹트고 있었다.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나는 다시 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이제는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아무 말씀이 없으셨던 아버지는 나의 다짐에 어느 날 말없이 신문지 한 장을 펼쳐 보이셨다. '연변과학기술대학(YUST) 산업기술훈련원 1기생 모집공고'였는데 … 그것은 내 인생의 항로를 바꾼 결정적인 변곡점이었다.
1992년, 나는 그곳에 순리롭게 입학하여 조용히 외로운 마음을 다지며 기술을 배웠고 다시 세상을 향한 날을 세웠다. 이후 천진의 한국 기업에 취직 되면서 물류와 무역 업무를 바닥부터 치열하게 익혔다. 시대에 뒤처지지 않으려 밤잠을 줄여가며 컴퓨터를 독학했고, 그 성실함과 실력을 인정받아 총경리에 오르기까지 직장 생활의 정점을 찍었다. 이후 천진에서 소중한 가정을 이루고, 많은 사람들과 인연이 되면서 또 그 노하우를 바탕으로 컴퓨터 사업까지 성공적으로 일궈내며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남들은 파란만장한 실패와 성공의 길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깊은 잠에 들면 나는 여전히 XX2중의 그 모교의 낡은 대자보 앞을 서성인다. 사실 내 영혼이 머물고 싶었던 곳은 교단이었다. 연변대학 사범학부에 진학해 우리말과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는 것. 만약 그때 발목을 다치지 않았다면, 만약 그때 그 불같은 성격을 한 번만 죽였다면, 아버지는 학교 교도처 앞에서 환하게 웃으실 수 있었을까?
이제 와 부질없는 가정임을 안다. 하지만 쉰의 나는 더 이상 처절한 미련 속에 잠에서 깨지 않는다. 꿈속의 나는 여전히 열아홉 소년이고, 대자보에는 내 이름이 적힐 빈자리가 남겨져 있지만, 그것은 이제 지우고 싶은 상처가 아니라 내가 지나온 뜨거웠던 생의 훈장이다.
부모님 세대에게 대학이란 삶을 지탱할 유일한 밧줄이었기에, 그 줄을 놓친 아들을 보며 아버지는 얼마나 가슴을 졸이셨을까. 다행히 아버지가 눈을 감으시기 전, 거친 풍랑을 뚫고 한국에서 당당히 뿌리 내린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꿈속 대자보의 빈칸은 대학 이름 대신, 아버지가 믿어주신 대로 스스로 일궈낸 내 삶의 궤적들로 이미 꽉 채워져 있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아버지는 아마 그때, 무릎 꿇고 다시 시작하겠다던 아들의 눈빛에서 이미 누구보다 환한 웃음을 짓고 계셨으리라. 멀리 돌아 여기까지 왔지만, 마음속 깊은 곳의 나는 여전히 소년이다. 다만 이제는 누군가의 인정을 기다리며 지친 소년이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당당히 일궈온 대견한 소년이다.
고생했다, 창석아. 정말 잘 살았다.
스스로의 어깨를 깊게 토닥이며, 나는 다시 찾아올 내일의 빛을 향해 평온한 눈을 감는다.
오늘도 굳나잇!
이젠 말 할 수 있다!

인생불여의 십유팔구… 십프로만 맘 먹은대로 돼도 성공한 인생이라 합니다. 너무나 열심히 사셨고 훌륭하게 사셨으니 이제 아픈 기억들은 다 털어 내시고 항상 즐거운 여생을 보내시길…
감사합니다. 지금도 아주 가끔씩 꿈에 제목과 같은 내용으로 다시 그때 시절로 돌아가곤 합니다.
계속 잊히지 않는 그런 인생의 순간이군요…
박완서 작가님이 생각납니다. 작가로서 남보기에 성공했으나 625때문에 한달만에 꺾인 대학생활. 못가본 길이 아름답다고 그게 늘 사무치다 하셨더군요. 비의가을님 대학 또 다니셔도 될것 같은데요.
지금 단어로 하면 학교폭력을 막으려고 치렀던 침통한 댓가인데 우리때는 무방비였고 자신이 혼자 서넛을 당할수 있게 단단하거나 약자들끼리 뭉쳐서 방어를 하는게 최선이였으니 충분히 공감이 가는 내용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