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가 싫어졌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갖고 싶은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지어 무엇을 먹겠느냐와 같은 생 속의 자잘하고 하찮은 물음에조차 아무거나라든지 아니면 잘 모르겠다든가로 얼버무려 대답하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대답하고 나서 스스로도 그런 대답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냥 상대에 대한 배려처럼 말하려고 애쓰지만 뒤끝이 언제나 상쾌하지 않다.
언젠가부터 내 게서는 아무거나, 글쎄, 잘 모르겠는데… 등등의 애매모호한 단어가 늘 어눌하게 번져나갔고 나는 이런 나를 의식하며 점점 답답하고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더더욱 강박증처럼 그런 단어들이 새여나갔다. 그러면서 괜히 우유부단했고 기죽었고 구석자리에 익숙해져갔고 또 적당히 랭정하고 리기적이고 합리적이여졌다. 그리고 그 무엇도 중요한 것은 없다는 마음으로 그런 자신을 대변하려고 했다. 그러나 서글펐다.
자신만의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말하고 행동하고 자신의 정서로서 감히 사랑하고 미워하며 그 순간을 온 존재로 당당하게 누렸던 기억이 이젠 아득하다. 지금은 왜 아닌데? 그 리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 왜 늘 내면의 또렷한 소리를 내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자신의 한계를 알고 그래서 보다 겸손해지는 내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거나 나이를 먹어가면서 교양을 갖추는 것 쯤으로 생각해버리려고 하지만 내 의식의 저변에는 큰 아픔이 있다. 바로 주체적 자아가 없다는 것이다.
때론 그런 텅 빈 나를 감추고 싶었다. 그래서 로련한 척 자신감 넘치는 척 행복한 척 고상한 척 지혜로운 척한다. 그러나 어느 만큼 과장되게 표현하든지를 막론하고 나는 알맹이가 없는 빈껍질일 뿐이다. 그래서 빈 자루처럼 남아버린 나는 늘 후줄근했고 비겁했고 괴로웠다.
내가 왜 이런지 잘 모르겠다. 결내 속에는 분명히 내가 없다. 그래서 나는 이 세상을 받아들이고 느끼고 표현할 수가 없은 것이다. 자신만의 머리와 가슴을 가져야 이 세상을 나대로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표현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로지 배고픔과 추위와 더위에만 반응하는 육체적 자아로서는 이 세상의 온갖 풍부한 사고와 감정들이 쏟아져나와 나를 향해 밀려온다 해도 받아들일 수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결국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로 이 세상을 보고 듣고 느끼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내 머리와 내 가슴과 내 몸은 결국 타인이 되여버린 채 식물적인 나에게 기생하고 있은 것이다.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 언제 어디에다 잃어버렸을가? 정말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이런 물음을 물어야 하다니.
사람은 살면서 참 많은 것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집열쇠나 령수증이나 지갑이나 볼펜이나… 그런 것들을 잃었을 때 땀을 내며 조바심을 쳤고 부산하게 뒤지며 찾느라 애썼다. 그러나 더러는 끝내는 나타나지 않았고 더러는 다시 생각지 못한 곳에서 나타나주기도 했고 더러는 다시 갖추어지기도 했다. 때로는 일부 기억들이 내게서 툭 떨어져나가기도 했다. 생각해내려고 아무리 온 정신을 집중해보아도 나는 가늘고 희미한 흔적조차도 떠올리지 못했다. 그렇게 일부 기억은 사라져갔고 또 더러는 우연히 떠올려지기도 했고 또 새로운 시간 속에서 새로운 기억들이 만들어지군 했다. 그렇게 일상은 나에게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도 했고 또 잃어버려서 비여진 자리로 새로운 것들이 다시 차오르게도 했다.
그런데 도대체 내가 잃어버린 나는 어디 쯤에 있는 것일가?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가? 아니면 어디 쯤에 이미 사장되여버린 것일가? 어쩌면 내가 사라진 자리에 또 다른 내가 새롭게 들어서고 만들어져야 마땅한 것이 아닐가. 그런데 현실 속의 나에게는 내가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자아가 없다.
요즘은 ‘미니멀 라이프’시대라고 한다. 그래서일가 이것 저것 다 버리고 지극히 간소화된 물건들로 마음도 비워간다고 한다. 나는 자신마저도 거치장스러워서 자신의 많은 부분을 버려왔을가. 그런데 그렇게 내가 버렸으면 버린 것이 무엇이며 언제 어데다 버렸는지도 똑똑히 알아야 하고 또 아직 채 던져버리지 못한 것이 무엇이며 남길 것이 무엇인지도 분명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내 의지로서 행한 것이 아닌듯 그런 것에 대해 너무 무지하다. 손톱이나 소변이나 땀방울이나 흘린 눈물이나 어딘가에 쏟아놓은 감정의 찌꺼기들… 그것들과 함께 나도 자연스레 어딘가에 버려진 것일가? 나는 지금 다만 비여진 나를 의식할 뿐이다.
자신의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지만 이렇게 자신을 허술하게 잃어버리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나는 여태 무엇인가를 이룩하기 위해 몰입하거나 아니면 방향없이 천방지축 내달리느라 자신을 미처 챙기지 못한 경우가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 왜서 알뜰히 비워진 것일가.
원유의 나로서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였던가? 그래서 이 세상에 의해 폭력적으로 편집되여버린 것일가? 아니면 이 세상에 어떻게 하나 융합되여보려고 애쓰며 나를 버린 것일가? 그럼 지금의 나는 잘 살아가고 있는가? 그것도 아니다. 때로는 나는 나에게마저도 가끔 생경하고 어정쩡하고 쓸쓸하다.
비여지고 희미해지고 그래서 빈껍질로 남아버린 나에게 무엇이라도 채워넣어야 한다는 절박감을 나는 의식 먼저 몸으로 느낀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꼬박꼬박 밥을 챙겨먹는 일에 열성을 부렸다. 필요 이상으로 더 웃고 더 말하며 더 떠들어댔다. 더 많은 이들을 만나고 더 자주 손을 잡거나 껴안기도 했다… 그런데 가끔 그런 자신을 가만히 관찰해보다가는 흠칫 몸서리쳐질 때가 있다. 온몸의 세포 하나조차도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동참하지 않고 동감하지 않고 지어 깨여있지도 않은 것이다.
이 겨울 저 하얀 눈꽃을 바라본다면 과거의 나는 어떤 기분이였을가? 따스한 해살에 몸을 맡기며 나는 어떤 상상을 했을가? 아름다운 시구절을 읽으며 나는 어떤 감동을 했을가?… 그 때 쯤의 내가 되여 느껴보고 싶다. 나는 지금 맑고 순진한 눈동자를 마주하고도, 따스하게 잡아오는 손길에도, 눈물 그렁한 가슴에도 아무 느낌이 없다. 다만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내고 관념적인 표정이나 행위로 적절히 표현하려고 노력할 따름이다. 그래서 어쩌면 내 말이나 행동에는 부드럽고 촉촉한 한점의 감정도 없이 기계적인 쇠소리가 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쇠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나는 그때그때에 따른 표현을 생각해내느라 애쓸 때면 이미 겨우 생각해낸 것들이소용없어져버린 시간이 되여버리는 것이다.
나를 찾고 싶다. 과거의 나를 나는 기억하고 있다. 아직 또렷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잃어버린 내가 늘 더 필요했다. 나는 그걸 지금 깨달은 것이다. 순수하고 용감하고 뜨겁고 맑았던… 그렇게 나는 본능에 솔직했던 예전의 내가 그립다. 가끔 리성을 잃고 우스운 실수도 저질렀지만 그래도 무척 많이 즐거웠고 감동했고 사랑했던 시간들이였다. 나는 그 때의 거침없이 내 멋대로였던 내가 좋다. 내가 내 멋대로 유치하게 웃고 떠든들 뭐 누가 뭐라 할 것도 아닌 존재다. 그러니 내 멋에 신나게 행복해지면 되는 일이다.
예전의 나를 그리워하는 이상 나는 지금의 나로 살아갈 수 없으며 또 지금의 나를 사랑할 수도 없음을 잘 안다. 나를 찾아서 만나지 못하는 한 나는 어쩌면 여전히 현실 속에서 길 잃은 채 우두커니 멈춰서있을 수 밖에 없으며 생생하고 선명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자신의 생활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누구의 삶도 아닌 나만의 삶을 살고 싶다.
만능의 위챗에 띄운다.
‘나’를 찾아주세요
이름: 주향숙
성별: 녀
나이: 43
오래전에 ‘나’를 잃어버렸습니다. 떠날 때 맑은 웃음과 따스한 감동과 씩씩한 용기와 뜨거운 열정을 지녔습니다.
혹시 행방을 알고 계시는 분은 련락 바랍니다.
련계인 전화번호:13704489409
그런데 과거의 나를 찾는다면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나를 리해할가?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를 포용할가? 이제 만나게 될 과거의 나는 어쩌면 상처 입은 모습일지도 모른다. 나는 과연 그 상처를 따뜻한 보살핌으로 어루만져 다시 아름다운 령혼을 갖도록 성실하게 노력할 수는 있을가? 그 많은 물음들을 우선 묻지 않기로 했다. 나를 찾아가는 과정에 나는 그 대답들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정말 나를 찾을 수 있을가? 그러나 나는 찾을 수 있다는 환상을 버리지 않기로 했다.
몇년전 글인건가요? 이제는 찾으신건가요? 질문이 아니고 안부입니다.
진안이 전하는 안부 -> 진안부
만능의 위챗에 띄운 메시지 포맷이나 컨셉이 독특하고 새롭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