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 염상과 개원 扬州盐商与个园

腰缠十万贯,骑鹤下扬州라는 얘기가 전해지듯이 양주는 중국역사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중의 하나였습니다.  양주 염상의 재력과 강남문화의 중요한 요충지의 하나로서 양주의 정원은 소주정원과 쌍벽을 이루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원문화는 중국문화에서 아주 중요한 지위를 갖고 있습니다. 중국문화와 사상 미학 건축학의 결정체이기도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강남문화, 그리고 좋아했던 문학작품들의 무대인 정원, 그중 염상들의 대표적인 정원 개원을 소개하려 합니다.

양주가 우리나라 역사에서 유명해지기 시작한건 수양제때문이였습니다. 

남북조의 분열되고 혼란한 시기를 종결짛은 조대가 수조였는데 수조의 건국황제 수문제는 과거시험을 개설하고 또 검소하고 훌륭한 황제입니다. 

그런데 수조는 수명이 짧았습니다. 두 번째 황제 수양제때 멸망을 하게 되는데요. 그래서 수양제는 민간에서는 황음무치하고 사치를 좋아하는 악한 황제로 기억 되고 있씁니다. 

그러나 많은 역사학자들은 그렇게 나쁘기만 한 황제는 아니였다고 합니다. 다만 단시일내에 너무 많은 공적을 이루려 하다보니까 오랜 세월동안 여러나라 사이의 전란속에 있었던 백성들이 통일된 왕조에서도 숨을 돌릴 시간도 없이 다그치다보니까 결국은 멸망을 초래했다고 봅니다. 

수양제는 남쪽으로는 남진南陈을 수복하여 통일대업을 완성하고 북쪽으로는 장성이북을 네 번 순시하고 四巡塞北、서쪽으로는 감숙성 서북부 장예一次西巡张掖순시하고 대운하를 건설하고 청해서 토욕혼지역까지 국토를 확장하고 하서주랑을 열었구요. 동쪽으로는 고구려를 세차례 침공하고(이건 공이라고 할수 없고 수조의 멸망을 초래한 주요 원인이 되였습니다. 우리민족의 입장으로는 최악의 침략자이지만 수나라의 황제로서는 雄才大略를 가졌던 인물임은 분명합니다.) 류구열도를 수복하고 양주성과 동도 락양을 건설하는등 짧은 시간내에 엄청난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백성들이 혹사를 하게되고 삶이 많이 고달파 진 것입니다. 그래서 농민봉기들이 일어나고 통치계급내부에도 많은 모순들이 생겨서 수조가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수양제가 이룩해놨던 것들의 혜택은 후세의 천여년동안 누렸습니다. 그래서 罪在当代,功在千秋 당대에는 죄가 있으나 후세의 천년에는 큰 공이 된다"라고 평가합니다.

수양제가 황제가 되기전 10년동안 양주의 지방관으로 있었다보니 양주에 깊은 감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운하의 남쪽 기점을 양주에서 시작하게 하였구요 황제가 된후에도 세 번이나 운하를 따라 양주에 내려왔습니다. 그러니까 양주의 번화함을 이룰수 있었던 것은 수양제와 갈라 놓을 수가 없습니다.

다음으로 양주의 번영과 갈라놓을 수 없는 사람들은 염상들입니다. 강소성 동부지역이 오랜 세월동안 우리나라 소금의 주요산지 였습니다. 현재의 련운항 염성 남통 이런 도시들 전부가 주로 소금을 생산하는 지역들이였습니다. 소금은 양식처럼 백성들의 삶에서 떠날 수 없는 중요한 물자였기 때문에 아주 보장된 판로를 가지고 있었고 큰 상업이익을 남길수 있었습니다.

명조에 들어오면서 소금에대한 집중적인 통제를 시작하였는데요.  교통요충지였던 양주가 나라에서 지정한 소금 집산지였습니다. 강소성각지역에서 생산 된 소금이 모두 양주에 모여졌고 양주에서 전국각지로 운송이 되어갔습니다. 이렇게 하면 나라에서 관리하기가 쉬웠습니다. 그래서 모든 염상들이 양주에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이들의 상업규모는 당시 국제무역을 독점했던 광주상인 규모의 10배 이상이였습니다.

그래서 명조초기부터 양주는 또한번 큰 번영을 누리게 되었는데 인구가 60만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당시 세계에서 6번째로 큰 도시였다고 합니다. 19세기초반에 세계10대도시중 6개가 중국에 있었고 양주도 그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시 염상들이 문화사업에 많은 투자를 하였던고로 일부 외국학자들의 연구논문에 의하면 당시 문화적으로는 양주가 로마나 북경 빠리를 제치고 세계일위였다고 주장하기도합니다.

양주를 거쳐가는 소금이 일년에 1억근에 달했다고 합니다.  소금은 이윤이 25%였고 전국을 대상으로 하여 판매완전 보장된 상태라고 하니까 염상들은 폭리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양주염상들이 건륭황제시기에 조정에 바친 세금은 전국세금의 60%에 달했다고 하니 그 상업규모를 짐작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양주의 염상들은 엄청난 폭리를 취하게 되고 거대한 상업제국을 건설을 하면서 주업외에 세가지 일에 많은 투자를 했는데요. 그중 첫째가 황제가 변경을 지키고 전쟁을 잃으킬 때 재정적후원을 굉장히 많이해서 황제의 신임을 받는 일이였고 둘째로는 자신들의 자녀들을 공부시켜 관직에 등용시키는일 셋째로는 문화사업에 투자하는 일이였습니다. 그래서 황제로부터 신임을 얻어 이익을 오래동안 지켜낼수잇고 또 조정에 자신들의 사람들을 심어서 정책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흐르게 하고 문화사업에 투자를 하여 좋은 명성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중 특히  문화사업에 대한 투자가 양주로 하여금 그 당시 세게 제일의 문화명성으로 우뚝 서게 만들었습니다. 청조시기의 유명한 화가들인 양주팔괴가 나올수 있었던 것입니다. 문화의 발전은 엄청난 투자가 필요한 일입니다. 이탈리아의 문예부흥도 당치 최고의 부자였던 메디치가문의 이낌없는 문화에 대한 투자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문화가 발전하면서 양주라는 이도시에도 수많은 개인정원들과 공원들이 세워지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오늘 소개하려는 개원个园입니다.

우리나라의 고대 정원들에 대해서는 많이 소개해드렸는데 4대명원은 소주의 졸정원, 북경의 의화원, 승덕피서산장, 그리고 소주의 류원이라고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4대명원중 졸정원, 의화원, 피서산장에 대해서는 다들 공감하는데 네 번째에 대해서는 좀 논란이 있습니다. 류원으로 많이 알려졌는데 양주의 개원이라고 인민일보에 보도된적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류원보다는 개원을 넣는 것이 더 합당한 것 같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류원과 졸정원은 거의 비슷한 풍격의 정원이거든요. 그런데 개원은 풍격이 많이 다릅니다. 졸정원이나 류원은 혼연일체를 이루는 예술적 완성도는 거의 완벽하다할 정도입니다. 개원은 그런 부분에서는 좀 뒤떨어지지만 소주원림과는 다른 양주원림의 특색을 잘 보여주는 원림입니다.

个园은 청조 가경황제와 도광황제 년간에 있었던 황지균의 개인 원림이였습니다. 황지균은 8대 염상중 한사람으로 가경황제시기에는 两淮盐业商总 량회염업상총의 지위에 있었던 거상입니다. 그런데 황지균은 뛰여난 상인이였을뿐만 아니라 엄청난 학문을 갖춘 선비이기도 했습니다. 유상儒商의 대표적인 인물이였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의 개인정원이였던 개원은 곳곳에서 주인의 문화적 소양을 잘 보여줍니다.

개원个园이라는 이름의 개个는 대나무 죽竹자의 일부분입니다. 대나무 죽竹자는 두 개의 개자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개원은 사실은 대나무 원림이라는 뜻입니다. 

황지균은 유상인 것 만큼 대부분 선비들처럼 대나무를 좋아했습니다. 대나무는 중국 전통문화에서 선비들이 좋아했던 대표적인 문화아이콘입니다. 사군자라 하여 매화·난초·국화·대나무는 선비의 고결함을 상징했고 세한삼우라고 하여 한겨울의 추위도 잘 이겨내는 소나무 대나무 매화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문인들이 대나무를 사랑했씁니다. 육식파였던 소동파는 고기가 없이는 살아도 하루라도 대다무를 보지는 살지 못한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황지균도 대나무를 많이 사랑해서 자신의 정원을 개원, 대나무정원이라고 부르고 정원 뒤에는 수많은 종료의 대나무들을 가져다 심었습니다.

황지균은 당시 최대의 부자였는데 도대체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갖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예측할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냥 그가 개인적으로 가정에서 감상하기 위해 운영하는 경극극단인수만 200여명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집에서 기르는 닭들은 인삼으로 만든 사료를 먹였는데요 달걀하나의 성본이 은 한냥였다고 합니다. 청조중기에 은한냥이 현재 돈으로 150원에서 220원 사이였으니까. 적어도 150원에 하나씩 하는 달걀을 먹었다는 얘기입니다.

이런 대 부호였으니까 자신의 원림을 건축하는데 얼마나 많은 돈을 투자했겠습니까? 개원을 건축하는데만 은 600만냥을 쏟아 부었는데요 당시 중국에서 가장 부유했던 강소성의 일년 재정수입과 맞먹는 수자였다고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당시 어떤 가산은 백은을 녹여서 난들었는데 천근이상의 무게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무도 움직일수도 훔쳐갈서두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假山이름을 “没奈何”(어쩔수 없구나)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돈을 쏟아부은 개원은 전통적의미에서의 강남정원이라기보다는 청조 염상원림의 전형적인 대표 정원이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개원은 사계절을 대표하는 가산 네 개를 만들었는데 이는  고전원림중 유일한 것입니다.  고대건축 원림대사 진종주선생은 개원에 대해서 "개원은 가산의 중첩과 정교함으로 유명한데 "分峰用石’분봉용석"의 수법으로 사계절을 만들어낸 것은 우리나라 정원에서 유일한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분봉용석이란 사계절을 대표하는 네 개의 가산을 서로 다른 돌로서 쌓으므로 사계절의 특색을 잘 살려낸 방식입니다. 태호석과 황석, 용암동굴속의 석순, 그리고 안휘의 선석을 가져다가 네 개의 가산을 만들어냈습니다.

봄산은 원림이 시작되는 곳에 위치 되었는데 석순과 푸른 참대들을 이용해서 만들었습니다. 석순은 비온후의 죽순 대나무 순을 뜻하는데 우후춘순은 봄을 상징합니다. 이는 개원만의 독특한 수법입니다. 여기에 자그마한 동그란 정원문이 있고 "개원"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그 원형문으로 들여다보는 정원의 모습은 엄청난 기대감을 안겨줍니다.

개원에서의 봄산은 진정한 산이라기보다는 개원이라는 전체 풍경앞에 놓인 전경前景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보여주고 싶은 주체의 뒤에 있는 것은 배경, 앞에 있는 것은 전경이라고 부릅니다. 전경과 배경의 다름에 따라 주체도 다른 모습을 띄게 됩니다. 그래서 전경도 배경만큼 중요한것입니다.

봄산 다음으로 나오는 것은 여름산입니다. 여름산의 주체부분은 태호석으로 이루어졌는데요. 태호석의 아름다운 곡선들과 또 변화다단한 모양은 구름을 쌓아 놓은 듯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태호석은 우리나라 정원건축에서 가산을 만드는데 가장 많이 이용되는 돌인데요. 태호 밑바닥에서 채집이 되고 석회함이 용해 되어서 여러 가지 다양하고 기괴한 모습을 갖추고 여러 가지 형태의 구멍들이 나있는 돌입니다.

여름산은 태호석들로 쌓여져 있어서 전체적으로 많은 구멍들이 보여서 마치 여름날의 구름같기도하고 또 작은 호수옆에 세워져 있어 밑부분에는 물도 들어오고 종유석들을 태호석으로 쌓은 동굴들에 설치하여서 마치 카스트지형의 종유석 동굴에 들어온듯한 느낌도 줍니다. 그리고 여름산의 외면은 태호석의 회백색 때문에 해빛이 비추어질때면 명암이 분명하여 여름날의 뜨거움을 느끼게도 합니다.

여름산의 동굴을 지나 층계를 따라 올라가다보면 抱山楼포산루라는 주건축물의 전랑에 이르는데 포산루는 여름산과 가을산을 이어줍니다. 여름산은 포산루의 서쪽에 붙어있고 가을산은 포산루의 동쪽에 닿아 있습니다. 그래서 동떨이진 것 같은 여름산과 가을산이 포산루로 인해서 혼연일체를 이룹니다. 이런 경관은 개원에서만 볼 수 있는 개원 특유의 모습입니다.

포산루의 편액은 “壶天自春”호천자춘이라는 네글자가 씌여져 있는데 호천란 세상과 동떨어진 독립된 세상을 얘기합니다. 세외도원과 비슷한 맥락의 뜻인데요. 세상과 동떨어진 이 원립속에 자체의 독립된 세상과 봄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개원 설계의 주요의도이기도 합니다. 개원이라는 정원속에서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압축된 세상을 맛볼수 있다는 의도입니다.

가을산은 가을의 색을 대표하는 황석들로 쌓여져 있습니다. 황석은 든든하고 매개 돌덩어리가 커서 쌓아놓으면 웅장하나 여러 가지 변화를 주기는 힘듭니다. 그런데 개원의 가을산은 겉모양은 평범하게 보이나 내면에 상중하로 통로를 내여서 사람들이 가산내부를 오가면서 가산의 여러층의 암석위에 올라설수 있어서 부동한 높이와 부동한 시각에서 개원 전체의 모습을 볼수 있게 만들어놨습니다. 황석을 이용하여 만든 가산중에서 제일 최고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을산은 서쪽을 향하고 있어서 석양이 비추어 들어올때면 오렌지색의 광선과 가산의 노란색이 잘 어울려서 가을의 모습을 완벽하게 연출합니다.

그리고 겨울산 안휘성에서 나는 선석宣石으로 만들었습니다. 선석은 하얀색채에 둥그스럼한 모양을 갖고 있어 쌓아 놓으면 겨울눈이 녹지 않고 쌓여 있는 못습을 연상케 합니다. 겨울산의 전체 조형은 양주 전통의 "구사도九狮图》"아홉마리의 사자그림을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는 사람들이 각자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아홉 마리의 사자를 찾아내는 재미도 느낄수 있습니다. 

겨울산 뒷면에는 24개의 동그란 구멍이 뚤린 배경벽이 있는데 이 24개의 구멍은 "풍음동风音洞"이라고 부릅니다. 바람이 불때면 이 구멍에서 북풍이 휘몰아칠때의 큰 바람소리가 나서 진짜 겨울의 느낌을 받게 합니다. 신의 한수가 아닐수 없습니다. 그리고 서쪽 배경벽에 뚤린 두 개의 구멍을 통하여서 봄산이 경치가 보이는데 겨울산과 봄산을 갈라 놓습니다. 이는 동거춘래冬去春来의 뜻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개원은 춘하추동 네계절의 경관을 순시침의 순환순서로 배열을 하고 하나의 원을 이루어서 시간의 흐름끊이 없이 흐름을 잘 보여줍니다. 춘하추동 네계절을 하나의 원림속에서 볼수 있게 완벽하게 만든 작은 세상입니다.

중국의 고대 정원은 모두 한 가정의 뒷마당입니다. 생활구역과는 구별됩니다. 개원도 모두 세 개부분으로 나뉘여져 있는데 가장 생활구역, 정원, 그리고 대나무 숲으로 되어 있습니다.

청나라 최고의 거상이기 때문에 생활구역도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데 다섯 개의 통로를 가진 건축군입니다. 대문이 다섯 개가 있는데요. 福禄寿喜财로 용도가 다릅니다. 한꺼번에 다 여는 것이 아니고 용도에 따라 대문을 여는데요. 상호들이 소금을 산 돈을 가져올때는 "재문财门"을 열고 집안에 누군가 생일이 있을때는 '수문寿门"을 과거에 급제햇을때에는 禄门록문, 가문에 결혼등 희사가 있을때는 喜门희문을 평소에는 福门을 엽니다. 그래서 이웃들은 황씨집안에서 어느 문을 열었는지를 보고 그 가문에 무슨 행사가 있는지를 알았다고 합니다. 생활구역에도 청조의 염상들의 생활의 모습을 엿볼수 있어서 참 의미 있는 곳입니다.

대나무숲은 훼손되였다가 근년에 회복을 시켰는데 수십가지의 대나무들이 심겨져 있어 대나무 박물관이라고 해도 아쉽지 않은 모습입니다.

양주 염상과 개원에 대한 간략한 소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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愚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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