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1월, 큰 결심 끝에 스마일라식 수술을 받았다. 지난 30여 년간 내 몸의 일부처럼 밀착되어 동반해온 근시 안경과 작별하는 순간이었다.

    "수술을 받으셔도 다시 안경을 쓰셔야겠는데요?" 수술 전 정밀 검사를 마치고 의사 선생님이 던진 한마디는 예상치 못한 복병이었다. 의아해하는 나에게 선생님은 덧붙이셨다. "근시는 교정되겠지만, 지금 노안이 진행 중이라 작은 글씨를 보려면 결국 돋보기를 쓰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랫동안 꿈꿔온 안경 없는 삶이었는데, 안경을 벗기 위해 다시 안경이 필요하다니. 맷집 좋은 중년이라 자부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야속해 "조금 더 고민해 보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병원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며칠 밤을 고민했다. 결국 수술대에 올랐다. 준비는 길었으나 수술은 찰나였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벽시계부터 쳐다보았다. 매번 안경을 찾느라 더듬거리던 손이 무색할 만큼 숫자들이 선명하게 눈으로 들어왔다. 벅찬 기쁨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그 환희는 스마트폰을 집어 든 순간 짧게 막을 내렸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화면 속 글자들이 뿌연 안개 너머에 있었다.

    서글펐다. 먼 곳의 풍경을 얻은 대신 내 곁의 세밀한 일상을 잃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안경이라는 두꺼운 막 없이 세상의 끝자락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가 아니겠는가.

    "요즘 회사 어떠세요?" 요즘 지인들을 만나면 인사치레처럼 주고받는 이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중국 수출무역을 주력으로 하던 우리 회사는 작년부터 불어닥친 경기 불황에 직원 반 이상을 감원했다. 사업 아이템이 바뀌며 인적 구성도 거세게 물갈이되는 중이다.

    중년에 접어들어 한국에서 새 직장을 찾는다는 것은 모래알 속에서 바늘을 찾는 일만큼 고달펐다. 쉰 곳이 넘는 회사에 이력서를 던진 끝에야 첫 직장을 가졌고, 지금은 스카우트되어 옮겨온 두 번째 직장에서 3년 차를 맞고 있다. 회사가 흔들리니 내 자리에도 서늘한 위기감이 감돈다. 내년이면 50대라는 문턱을 넘어야 한다는 쓸쓸함과 함께, 다시 길 위에 서게 된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밤잠을 설치게 한다.

    중국 속담에 '人到中年上有老下有小(인도중년 상유로하유소)'라는 말이 있다. 중년이 되니 위로는 부모님이, 아래로는 자식이 있다는 뜻이다. 삶의 행복과 압박, 그리고 책임이 동반하는 달고도 쓴 시기. 작년 아버지는 당뇨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나셨고, 어머니는 간암 투병 중이시다. 아내는 내년 대학교에 입학하는 딸아이 뒷바라지를 위해 중국에서 5년째 떨어져 지내고 있다.

    "당신, 너무 걱정 말아요. 내년에 딸 대학교 보내면 바로 갈게요. 그때까지 건강 잘 챙기고 아프지 마세요." 외로움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마다 아내의 이 담담한 말 한마디가 나를 버티게 하는 유일한 닻이 된다.

    안경을 벗고 처음으로 미용실을 찾았다. 흐릿한 거울 속에서 내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잘려 나가는 과정을 낱낱이 지켜보았다. 30년 만에 처음 보는 생경하고도 선명한 광경이었다. 나는 거울 속에 비친, 조금은 고단해 보이지만 여전히 눈빛이 살아있는 사내에게 속삭였다. "그래, 넌 아직 젊어. 뭐든지 다 할 수 있어. 늘 그랬듯이 넌 프로니까."

    시력교정 수술을 통해 나는 비로소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비록 눈앞의 작은 글씨를 읽기 위해 돋보기를 꺼내 들어야 하는 노안은 남았지만, 안경 없이도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볼 수 있음에 감사한다. 조금은 흐릿하고 조금은 선명한 이 중년의 길을, 나는 오늘도 힘차게 걸어가고 있다.

2020. 0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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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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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잘 하셨습니다! 근시안경 벗은 분들은 아마 서로 공감하는 부분일것 같습니다. 2년전에 쓰다만 글인데, 인제야 정리해서 마루리 했습니다 ㅎㅎㅎ 지금은 와이프랑 함께 한국에 와 있구요, 딸은 이미 대학교에 진학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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