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가 넘으면서, 특히 50대가 가까워지면서 나이가 들었다는 생각을 부쩍 더 많이 하게 된다. 특히 코로나 시대를 겪고 나서 하고 싶은 일은 한시라도 빨리 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드는 것 같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그중 하나다.
하지만 항상 만날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낯선 타향에서 한두 명의 지인은 금싸라기처럼 소중하다. 그들이 반겨줄 때 그 소중함은 더구나 배가 된다. 북경에서 나를 반겨준 이들 중에는 내가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의외의 인물이 한 명 있다. 바로 대략 14년 전에 나에게서 한국어를 배웠던 학생이다.
내 기억 속의 그는 까만 셔츠에 까만 정장바지를 입고, 까만 넥타이를 매고 앞머리를 조금 길게 늘어뜨린 앳된 소년이었다. 하얀 얼굴에 늘씬한 키를 가지고 있었던 그는 속사포처럼 빠른 북경말을 구사했고, 약간 지나치게 빨리 눈을 깜빡이는 버릇이 있었다. 가끔 허풍을 떨기는 했지만 그것은 나름의 생존 본능에 가까웠고 실상은 성실한 사람이었다.
아직도 나는 더운 한여름에 그가 앞치마를 두르고 삼촌이 운영하는 양꼬치 집에서 일을 하던 기억이 난다. 수업시간에 밖에 나가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고 있는 그를 쫓아나가서 수업 들으라고 채근했던 기억도 있다. 그는 나에게 너무 스트레스가 많아서 좀 쉬고 싶으니 좀 봐달라고 사정을 했다.
삼촌 집에서 가출을 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 지나서였을 것이다. 그가 잘 곳이 없어서 떠돌아 다닌다는 얘기를 들은 나는 마침 우리 집에 빈방이 하나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래서 월세 15만 원에 그 방에 머무르는 것은 어떠냐고 제안을 했다. 그는 뛸 듯이 기뻐하면서 수락을 했고 바로 우리 집으로 이사를 왔다. 그렇게 우리 집에서 한 달을 보내고 다시 나가서 자리를 잡았다.
사실 그동안 나는 그에게 별로 잘해주지 못했다. 15만 원에 식사는 알아서 해결하라고 했지만 그를 빼놓고 우리만 밥을 먹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결국 하루 세끼를 식대 없이 제공하게 되었던 까닭이다. 수저 하나 더 올려놓으면 될 일이기는 했지만 우리 살림은 궁색했고, 그는 한창 먹을 나이었다. 별로 아량이 넓지 못한 나는 가끔 눈치를 주기도 했다. 우리가 집을 비운 동안에 그가 애 먹이려고 만들어둔 소고기 장졸임을 다 먹어치운 것을 보고 경악하기도 했고 집에서는 내복 바람으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핀잔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중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우리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몇 해 전에 오랜 큐큐 번호로 연락을 해왔고, 우리가 많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어려웠던 시기에 자신에게 가장 잘 대해줬던 사람이라면서. 그 말을 듣고 우리는 부끄러웠다. 예전에 좀더 잘해주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하여튼, 그가 먼저 연락을 해왔던 일이 생각나 나는 혹시 한 번 얼굴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해묵은 큐큐 번호로 다시 연락을 했다. 그는 엄청 반가워하면서 자신의 위챗 번호와 전화번호를 알려주었고, 심지어 密雲의 집이 비어 있다고 하면서 거기 가서 머물러도 좋다고 했다. 이미 거주할 곳을 찾았으니 새삼스레 다시 누구의 신세를 질 필요도 없고, 또한 너무 거리가 멀어서 통근하기에 불편한 거리였으니 그곳으로 간다는 것은 정황상 맞지 않았지만 어쨌든 말만으로도 나는 고마웠다. 며칠 뒤 굳이 또 밀운에 세워둔 차를 찾아가지고 나를 데리러 왔다. 북경의 옛거리를 보여주고 옛음식을 대접하겠다면서 말이다.
아침에 우리는 내가 사는 곳 근처의 상가 옆에서 만났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뛰어와 나를 포옹했다. 그동안 그는 많이 변했다. 본인이 말했던 대로 살이 엄청 쪄 있어서 그냥 길에서 만났으면 지나쳐버렸을 수도 있었을 것 같았다. 하긴 30대 초반이었던 내가 40대 후반이 되었고, 20대 초반이었던 그가 30대 후반이 되었으니. 내 얼굴의 풍상은 내가 잘 알 듯이, 그의 몸매도 그가 잘 알았다.
그가 가져온 아오디를 타고 우리는 그가 어릴 적에 자랐다는 동네인 난뤄구샹으로 갔다. 길가에 차를 세워두고 한편으로 그의 수다를 들으면서 난뤄구샹의 골목들을 돌아다녔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난뤄구샹이 북경의 대표적인 전통 골목 거리의 하나인 줄을 몰랐다. 한산한 거리를 돌아다니고, 엉뚱하게도 광주의 쐉피나이를 얻어먹고 점심에는 라오베이징들이 찾는 백년 전통의 음식점이라는 곳에 들러 북경의 전통 음식을 먹었다.
이미 미리 설명을 들은 터라 별로 놀랍지는 않았지만 북경의 전통 음식이라는 작자들은 하나같이 희한했다. 비주얼도 희한했고 맛도 예측불가한 특이함을 보여줬다. 게으른 나는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었기에 그냥 먹으면서 “아, 이 간볶음(炒肝儿)은 어쩐지 곱창 맛이 나는군. 희한한데.”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곱창이 들어갔다는 것은 얼마 전에 알게 된 사실이다. 곱창과 전분이 들어갔으니 곱창 특유의 퀴퀴한 맛과 전분이 들어간 국물 특유의 걸쭉함이 따라붙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간볶음이라기 보다는 간국이라고 부를 정도로 탕이 많아서 이름 자체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겨자덩이(芥末墩儿)을 먹으면서는 “아, 이건 배추를 겨자범벅으로 버무린 거구나.”라고 생각했다. 겨자범벅은 나름 먹을 만했다. 그러고도 뭔가를 더 먹었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후에 또 그와 함께 먹은 북경의 두유는 쏸차이의 시큼한 맛이 났고, 몐차는 옥수수죽에 깻국을 얹은 특이한 음식이었다. 화장실(洗手间)에 들어갔는데 정말 손만 씻는 곳이라서 당황했던 기억만 날 뿐. 어쨌든 맛보다는 경험의 가치를 높이 따져줄 만한 식사였다.
이어서 간 곳은 어떤 강이 있는 동네였다. 강 옆에 술집이 쭉 늘어서 있어서 강 구경을 하면서 술을 마시면 매우 운치가 있을 것 같았으나 술집은 대부분 문을 닫았고, 우리는 술을 마실 운치가 없었다. 거의 끝까지 걸었다가 돌아올 무렵 그가 말했다.
“예전에는 항상 여자친구를 데리고 와서 저 강에서 배를 탔어요. 선생님은 제 여자친구가 아니니까 같이 배를 타자고 할 수가 없네요.”
사실 상대가 문제라기보다는 너무 많이 걸어서 발이 좀 아팠기에 나는 굳이 배를 태워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는 정체불명의 곳에서 옛 제자랑 배를 탈 정도로 낭만적이지 않았기에 그만 구경하고 돌아가기로 했다. 내가 보았던 그 정체불명의 강이 十刹海이고, 옆의 거리가 烟袋斜街라는 사실을 안 것은 그로부터 대략 한 달 이후의 일이었다.
저녁은 그의 아내와 딸과 함께 했다. 근처의 맛있는 베이징덕 집으로 가서 오리구이를 먹기로 한 것이었다. 암 투병 중이라는 그의 아내는 살짝 무덤덤한 느낌이었고, 소학교 1학년에 갓 들어갔다는 딸은 발랄하고 귀여웠다. 아내는 유방암 진단을 받았는데, 치료가 별로 효과적이지 않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아이를 강하게 키우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다. 혹시라도 엄마가 죽고 아빠인 자신도 문제가 생기면 의지할 데가 없다고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미래가 너무 걱정된다고 하면서. 왜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할까 하면서도 위로가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아서 나는 잠자코 있었다.
북경에 와서 오리구이를 먹는 것은 식사라기보다는 뭔가 특별한 의식 같은 느낌이다. 하여튼 이렇게 제자의 가족과 맛있지만 또 그렇게 맛있지는 않은 오리구이를 먹고, 이젠 귀가할 채비를 했다. 그런데 그가 나를 다시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겠다고 했다. 그의 아내가 어색했던 나는 집으로 가고 싶었지만 비가 내리고 있었고, 지금은 한창 차가 막힐 시간이며, 그는 기어이 나를 차로 바래다 주겠다고 했기 때문에 결국 나는 그의 집으로 들어가 차를 마시게 되었다.
집안 가구는 단촐했다. 방이 세 칸인데, 두 칸은 세를 주고 한 칸만 그의 가족이 평일에만 살고 있었다. 차를 마시는 동안, 그가 벽에 걸린 기타를 내려서 타기 시작했다. 그러자 꼬맹이 아가씨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잔잔한 기타 소리와 귀여운 음성이 어우러지면서 천지의 화음과도 같은 부드럽고 평화로운 소리를 만들어냈다. 알 수 없는 감동이 마음속으로 밀려들어 오면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것이 바로 천륜지락인 것인가?”
갑자기 세월은 먼- 뒤로 바뀌고, 나는 가족들을 데리고 평화로운 저녁을 보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 아늑하고 행복한 기분에 휩싸였다.
바깥에서 우박이 쏟아졌다. 나무들이 아우성을 질렀고 밖에서는 수선스러운 소리가 들렸지만 방안의 평화로움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우박은 금세 지나갔다. 이 우박처럼 모든 일은 지나가리라. 하지만 어쩐지 그날 느꼈던 이 천륜지락의 느낌은 영원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청안님께서 경험한 제자의 집 방안의 장면이 저에게도 감동을 주었습니다. 불확실한 미래보다, 그 순간의 행복이 진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 같아요. 행복한 순간들의 기억이 인생에 빛을 주는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