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이 다가오니 집 생각이 더욱 깊어진다. 어려서부터 설날에 늘 집에서 많은 친척들과 함께 보냈지만, 서른을 넘긴 지금의 설날이 오는 것이 조금은 부담스럽기도 하여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오늘은 유난히 집 생각을 많이 한 하루이다. 특히 어릴 때 살던집 생각이 많이 났다.
내가 어릴 때 살던 집은 도문시 장안진에 있던 작은 집이다. 태어나서부터 살았던 곳이자, 유년 시절과 소학교까지의 기억이 모두 담겨 있다. 앞마당에는 작은 텃밭이 있었고, 가을이면 싱싱한 오이와 토마토, 고추, 앵두, 복숭아 같은 채소와 과일을 직접 따 먹곤 했다. 봄에는 아버지와 함께 여러 가지 채소 모종을 심었던 기억도 난다. 지금 돌이켜보면, 봄에 심은 모종이 가을이 되어 풍성한 수확으로 돌아오는 일은 참으로 기쁜 일인데, 그때의 나는 그 소중함을 알지 못했다. 집과 텃밭 사이 작은 공간은 시멘트로 구성되어 있어, 여름이면 깨끗하게 물로 청소하고, 그느지가 내려올때즘 바닥에 얇은 담요를 펴고 잠을 잤던 기억도 난다. 그리고 평평한 가마 위에서 콩기름을 넣고 계란볶음을 하려다 꿀을 넣어버려 엄마에게 한소리 들었던 기억도 난다. 그러게, 왜 기름통과 꿀통을 똑같은 용기에 담아 두는 건지 아직도 의문이다. 색깔도 비슷했다.
이 집을 떠나게 된 이유는 공부였다. 시골에서 자랐지만 어머니의 교육열은 남달랐다. 향진에 있는 학교보다 도문 시내의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셨고, 어느 날 갑자기 이사를 결정하셨다. 기억 속에서 나는 도문에서 과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중 부모님의 전화를 받았다. 집으로 오지 말고 기다리라는 말이었다. 그렇게 나는 많은 추억이 담긴 집과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한 채 이별을 당했다. 내가 가장 아끼던 인형들과 직접 바느질해 만든 여러 벌의 인형 옷들은, 이제 공부를 해야 한다는 이유로 모두 버려졌다고 했다.
훗날 청명에 할아버지 산소를 찾아갔다가 그 집에 다시 가보았다. 대문에는 ‘军人之家’라는 패가 걸려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었지만, 이미 남의 집이 된 공간을 함부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대문 앞에서 서성이다가 옆집 상점을 하시던 아주머니를 보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들어가 보라며 말을 해주셨지만, 왠지 그러지 못했다.
두 번째 집은 도문 시내에 있던 아파트였다. 오렌지색으로 칠해진 아파트 단지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고, 석사 과정을 마치고 돌아온 곳도 이 집이었다. 새 건물에 새 인테리어, 새 침대와 새 책장이 참 좋았다. 중학교 때부터 공부에 매달렸던 탓인지, 놀았던 기억은 많지 않다. 잘 되지 않는 공부를 하느라 참 애를 썼다. 고등학교에 들어가 미술을 한다는 이유로 야자를 다니지 않으면서 숨통은 조금 트였지만, 성적은 점점 떨어졌다. 대학 입시 모의고사에서 최저 기록을 경신했던 기억도 있다. 그때 처음으로 성적표를 집에 가져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인지 그 시절의 기억은 전반적으로 어둡다.
망친 모의고사에 비해 훨씬 잘 본 대학 시험이었음에도, 이후의 심리적 압박감 때문인지 지금도 가끔 대학 시험을 다시 보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빨간색 『文言文 수첩』과 파란색 『唐诗宋词 수첩』을 꺼내 들고, 한숨을 쉬며 시를 외우고 있다. 참으로 이 만한 악몽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이제 이 두 집은 이미 다른 사람의 집이 되었고, 집도, 마당도, 텃밭도, 내가 잠들던 시멘트 바닥도 더 이상 내 기억 속 모습으로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속상하지만 이제 그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나중에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집이 아니라 두만강 광장에서 산책을 했으면 좋겠다.

아, 집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뿌리채 뽑혀 인형들과 생이별하고 갑자기 시내로 이사를, 너무 가혹해요.
ㅎㅎㅎㅎ 참 가혹함다 가혹해 ~~~!!!!!!!!
두만강 광장산책은 꼭 이루시길. 저는 대학교 캠퍼스로 올라가던 오르막길을 걷고 싶네요. 비오면 바지밑단에 흙이 묻던 비포장도로.
기회가 된다면요. 가볼 생각임다. 캠퍼스로 올라가던 길도 꼭 나중에 걸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