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산문을 그리 기대하지 않는 편인데, 술에 일가견 있는 권작가님인지라 제목에 끌려 샀다. 코로나 기간에 읽은 <안녕 주정뱅이>로 권작가님 덕후로 스스로 굳혔으니. 술은 약하지만 그냥 술에 대해 잘 이야기하는 문장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잘.
물론 이런 책은 첨부터 마지막까지 읽는게 아니라 어느날 한편씩 읽는거다. 기분따라 뿌리는 향수처럼, 크리스마스 한달전부터 뽑아먹는 어드벤트달력 초콜릿처럼.
목차를 보니 계절별로 나누셨다.
읽기 첫편을 만두로 정했다. 한국사람들이 만두라고 하면 우리 식으로는 교자 즉 밴새다. 권작가는 만두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냐고 한다. ‘만두가 맛없기 위해선 광장히 만두스럽지 않은 일이 벌어져야 한다’고 권작가님이 그러시는데, 나는 이런 그럴듯한 헛소리를 좋아하는 편. 물론 나는 그 밴새에 맛들인게 삼십대 후반 어떤 계기로. 뭐 아무튼 지금은 밴새 아주 좋아한다. 나날이 맛이 변해가지만 엄마 스스로 만족하는 엄마밴새랑, 연길 어느 체인점의 아주 평범한 삼선교자를 좋아한다.
글을 계속 읽었다.
그런데 술 이야기 아직 나오지도 않았는데 어떤 문장이 나를 붙잡았다.
“대학 다닐 때였다. 어느 봄날 나는 좀처럼 하지 않던 공부를 하고 늦은 저녁에 도서관을 나왔다. 적당히 고요하고 적당히피로한, 그런 강아지풀 같은 기분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런 기분을 느끼기 위해서라도 가끔은 공부라는 걸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아지풀 같은 기분’, 이 표현도 좋지만 (강아지풀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름. 본다해도 금방 까먹음)
‘그런 기분을 느끼기 위해서라도’, 이 구가 마음에 들었다.
살다보면 좋은 날 나쁜 날 어이 없는 날 억울한 날 내가 바보스러워서 후회되는 날 등등 참 많은데,
매일 꽃길만 걷는 것 만큼 지루한 일도 없지 않겠는가 라고 이런 철없는 이야기를 하고나서 나중에 힘든 일 있을때 꼭 그런 말을 했던 스스로가 참 밉지만 오늘 이 문장을 읽고 나니 더욱 나는 ‘이런 기분‘, ‘저런 기분’을 느끼는걸 그닥 싫어하지 않는다는걸 확신했다.
그 이런 저런 기분을 가져다준 내게 온 모든 사람, 왔다 간 사람, 그들은 미세하게라도 나를 만들지 않았겠는가. 내게 발생했던 일이라고 약화시켜 말하려고 해도 그건 모두 사람 또 사람이다. 징하고도 귀한 사람 그리고 사람.
내 그릇이 부족하여, 서로 만나고 부딪칠때 많은 경우 고르로운 소리를 내지 못했겠지만, 그들도 자기의 부족함을 헤아리면서 애매한 세상보다는 자기 자신과 남들의 그저 그럼을 두루 인정하면서, 엄한 세상 탓하지 말고 잘 살아가길 바란다. 해보니 사실 남탓보다 내탓할 때 평정심을 찾기가 더 쉽더라는.
물론 인간은 끝까지 겉으로는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가 어려우므로 우리는 반성은 속으로만 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지. 마치 아버지들이 절대 사과라는거 안하듯이. 우리 안에도 자아라는 아버지 한명씩 살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우린 모두 적당히 꼰대고 가부장적이다.
가부장적이라는 말은 최초의 기득권이 남자였던지라 ‘부’가 들어가서 꼭 남자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지겠지만, 사실 나와 남의 다름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인간의 어떤 속성과도 통하는거 아닌가, 라고 나는 아무 근거없이 생각해본다.
물론 이제 나이를 꽤 먹었고 귀차니즘이 많은 나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자주 만나고 생각의 지경을 넓히자’는 그런 말쯤은 곱게 접어두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더욱 좋아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더욱 좋아하자고 오늘도 자기 깜냥에 맞는 결론을 내린다만,
최소한 스스로 자기가 어떤 인간인지는 알고 살아야 할것 같다.
반성하고나서도 바꿀 생각이 없는 이런 정신상태가 사도바울이 말한 ‘곤고한’ 인간상인가보다.
만두이야기로 시작한 이 글에 책임을 지자면, 권작가님 말씀하시건대 만두는 술안주로도 좋고 만두국은 해장에도 좋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