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달은 내 평생에 더 없이 행복한 한 달이었다.   

그토록 열망하던 자동차 전기수리를 이제 기본적인 것으로 터득하게 되었고 앞으로는 이미 배운 것을 확고히 해두는 것만 남았다. 한창 들떠있는 때에 인수원이라는 새로운 임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국에서 물건을 구입하고 두만강 교두에서 양국 수속을 다 할 줄 알아야 하며 물자를 안전하게 나진까지 보내줘야 하는 사람이 인수원이란다. 이미 두번 출국할 때 이모부 뒤꽁무니를 따라 다니면서 대충 알아둔 것이 있다. 그걸 살려서 임기응변하면 되는 것이라고 되는 대로 착각했던 것, 후일 수도 없이 두만강을 건느면서 일에 익숙해지면서 그 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가슴깊이 절실히 느낄 때가 많았던 것이다.   

4월의 마지막 날은 내가 두번째로 나진에 간 지 한달 되는 날이었다. 

초청장 기한이 다 되어서 어차피 중국에 돌아가야 했다. 헌데 이미 그 다음달 초청장도 다 되어 있는 상태어서 그 초청장을 들고 두만강을 건너는 작업을 왕복으로 한번 하면 그만인 것이다. 

열시가 거의 될 무렵에 이모부가 나를 불렀다.   

“내일 우린 들놀이를 간다. 이제 내가 말하는 것들을 오늘 내로 사가지고 되돌아 와야 한다.”  

배구공, 사진 필름, 도장 작업 때 필요한 테이프와 신문지, 구라이다 돌 (그라인더 디스크), 야채, 고기류 등 수십 가지나 되었다. 오후 여섯 시에 교두는 문을 닫는다. 그전에 수속이 끝나야만 나는 다시 나진에 올 수 있었다. 차 걱정을 말고 이 물건들을 다 사오라고 한다.   

5월 1일은 국제 노동절인데 중조 양국에서 다 굉장히 쇠는 명절 중의 하나였고 휴식일이 거의 없는 회사의 종업원들을 이 기회에 한번 탕개를 풀고 맘껏 놀 수 있도록 해줘야 했다.   

시간을 맞춰 원정 종합검사장을 빠져 나오면서 뒤를 돌아보니 바로 퇴근 시간이라 다리 목을 차단봉으로 막고 있었다. 여기 두만강 다리의 출입국 통과 시간을 양국에서 똑같이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아차 약간만 지체했어도 중국에 되돌아 갈 번했다. 몇 대의 차들은 다리 위에 갇혀 버렸고 사람들만 다리 저쪽으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저녁 퇴근시간이 되면 사람들은 되돌아 가고 차는 규정에 의해 다리 위에 다음 통과시간까지 세워둬야 했다.  

땀으로 물참봉이 되어 가지고 금방 같이 통과한 차의 신세를 져서 내가 구입한 물건 모두를 싣고 원정 고개에 오르니 창주가 버스 옆에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다 부리어 옮겨 싣고 나니 이젠 눈을 뜰 힘조차 없다. 신세진 기사한테 인사 말을 할 수조차 없었는데 다행히 창주가 나대신 인사하고 있었다. 늦은 시간까지 기다려서 겨우 승객 한 사람을 싣고 있었고 나는 그나마 나진까지 갈 걱정을 던 셈이었다. 

갖고 온 물건중에서 신문지를 몰수 당했다. 출판물을 통과시키지 않는 규정 때문에. 이렇게 인수원 노릇이 시작되었다.   

이제 인수원 첫날 작업을 돌이켜 본다.  

돈은 은행에서 내화를 내오고 암시장에 가서 외화로 바꾼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내화는 조선원이고 외화는 달러, 일본 엔 혹은 중국 인민폐로 되여야 한다. 

조선의 은행은 외화 축적이 적어 직접 외화를 내오자면 너무 힘들었다. 중국에서 나진에 나가 수산물을 걷어 들이는 사람들한테는 수산물 값으로 반드시 내화를 주어야 했기때문에 내화가 필요했고, 그래서 중국에서 갖고 간 외화로 내화를 대량 바꾸었으며 우리는 수표를 받거나 현금으로 들어온 수익금을 은행에 입금시키고 어느 정도 돈이 모아지면 그중 일부를 꺼내다가 다시 수산물 장사꾼들과 외화를 바꾸어야 했다.  

일단 돈을 바꾸려는 사람을 통털어 암시장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 여기에는 외화를 갖고 있는 조선측 회사도 포함된다. 

조선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 바로 은행에서 돈을 꺼내고 외화를 바꾸는 돈작업이었다. 이 작업이 순조로워야 자금이 제대로 돌 수 있어 중국의 물자가 빠른 시일 내에 나진에 도착할 수 있고 이윤도 크다. 

조선에는 외화가 발생할 수 있는 업종(주로 수산물관계업과 관광업)이 너무 적었기때문에 암시장도 크지 못했다. 그 사람들은 몇몇 그룹 밖에 안되었는데 그 것도 우리처럼 내화를 외화로 바꾸려는 사람이 너무 엄청나게 많아서 암시장이 얼마나 호경기인지 모른다. 자기 마음대로 가격이 조절되었다. 경제 규율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은 이런 좋은 장사가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그렇게 어렵게 한 번 두 번 환전해서 모아두고 그 돈으로 중국 물자를 구입했다. 나의 기억에 그날 중국 돈이 4천여 원이었던 것 같다(500달러 정도). 점심 12시에 가까스로 다리를 건너니 차단봉이 내 뒤에서 내려지고 있었다. 

어쨌든 나는 양국 다리 목의 두 차단봉과 깊은 인연을 맺은 셈이었다. 바삐 택시를 불러 훈춘 시내까지 가서 거의 세시간 동안 구입해서야 작업이 끝났고 다시 교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다섯시가 넘어서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이 교두는 너무 치벽한 곳이어서 불빛이 드물었고 또 조선 쪽은 정전때문에 다들 밝은 데서 수속을 마치려는 사치한 생각은 아예 단념하고 다니는 터였다.   

중국 쪽에서는 물건이 많지 않을 경우 그냥 보내 줬지만 조선은 그게 아니었다. 세관 신고를 해라 어째라 하고 한창 싱갱이질하다가 자기한테 필요한 물건이 보이면 주인의 허락도 없이 하나 둘 주어내곤 귀찮은 듯이 보내줄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치도 누구한테나 다 차례지는 게 아니다. 

원정에서 여객 수송회사의 김아바이(이모부를 다들 그렇게 불렀다. 나진에서 《아바이》는 연장자에 대한 높임 말로 쓰이고 있었다. )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사실 이모부는 40대 중반이었는데 겉늙어 보였고 나이도 잘 알려주지 않는 성미라서 나진이나 원정에서는 다 자기네 습관대로 그냥 김아바이로 불렀던 것 같다. 그 “김아바이”를 몇번 곱씹고 나면 마지못해 보내주는 것이다. 물론 주머니의 물건이 몇 개 손실 당하는 건 예사로운 일이다. 

그렇게라도 넘겨만 주면 대단히 감사하다. 나는 첫 임무를 그렇게 완수했다. 정당한 수속으로 떳떳이 가슴 펴고 씩씩하게 걸어나가야 한다는 내 의지와는 반대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말 그대로 고통일 수밖에 없었다. 이모부는 겉 보기엔 정당한 수속같으면서도 그 속에 많은 허실을 감추는 식의 일에 더 흥미를 느끼고 있는듯 했고 밑에서 일하는 우리들한테도 그렇게 하게끔 만들어주고 있는 거였다. 

세계 상의 어느 나라든지를 물론하고 자기 나라에 들어오는 물건에 대해서 통제도 하고 제한도 하고 신고되어 있지 않으면 퇴송(되돌려 보냄)시키기도 한다. 물건이 얼마나 작고 수량도 얼마나 적든 지간에 철저하게 하는 것이 관행이다.

그러나 권하와 원정 이 두만강 하류 쪽의 교두는 시설도 낙후했거니와 일하는 사람들의 양심도 모두 낙후해져 있었다. 더우기 원정 쪽은 기고만장해서 유조차 탱크의 휘발유나 디젤유도 공공연히 뽑아내는 정도였으니 다른 것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자고로 먹은 쇠 똥 눈다고 했다. 그 속담이 원정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그렇게 공짜로 수태 받아가고서도 다음 번에 통과시켜주지 않아서 애먹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다음 번에 통과할 때 모르는 사람을 대하듯 했으므로 뇌물도 1회만 작용을 발휘할 뿐이었다. 실로 굶은 개는 언 똥도 가리지 않는다는 속담을 떠올리게 하고 약한 다리에 찜질이라는 말도 연상케 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상황을 후일 무던히도 많이 겪었다. 또한 모든 것이 결핍한 조선 형제를 조금이라도 도와줬다는 생각 대신 강탈당하는 느낌을 받는 것도 바로 원정 그 곳이었다.  그러나 그 시기에 나진에서 사업하던 사람들은 다 바로 이 허점을 마음껏 영활하게 이용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배려하고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사정없이 무자비하다. 

담배 한 보루외의 것과 술 두병외의 것을 원정 현장에서 납세하게 하는 것은 《무자비》한 것이고(실은 원칙상 그렇게 되어 있지만) 인원은 적은데 담배 수십 보루, 술 몇박스(일반적으로 1박스에 20병정도)도 무관세로 통과되는 것은 《배려》를 베푸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정말로 그렇게 복잡한 일도 아니다. 

나는 2년동안 《배려》와 《무자비》를 무수히 겪었을 뿐만아니라 요구하는 물건들을 헤아릴 수 없이 갖다 줬다. 돈이 큰 것은 이모부의 허락을 받았고 돈이 적으면서도 실용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면 주저하지 않고 내동댕이쳤다. 또한 원칙적인 문제에서는 한치도 양보하지 않고 뻗대기도 해보았다. 휘발유 문제가 바로 그렇다. 처음엔 멋을 모르고 10키로, 20키로씩 연료 탱크에서 뽑아 주었지만 후에는 한 방울도 주지 않았다. 

이렇게 김아바이 이름으로 많이 행세해 보는 중 많은 경우에 순조로웠지만 더러는 심장이 식어들 지경으로 오도 가도 못하게 차단봉에 막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인수원 노릇 하는 동안 직업병을 하나 얻었는데, 무릇 중국에서 출발하면 나진에 도착할 때까지는 전 노정에서 긴장감에 모대겼고, 나진에서 되돌아 갈 때면 다음번 때문에 긴장 되어서 피곤은 극도로 모이고 스트레스가 사람을 질식시킬 지경으로 쌓여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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