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진은 6월 중순부터 장마가 약 두 달간이다. 장마 전에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바다의 날씨는 예측하기 어려워 어제 계획했던 일을 비나 바람 때문에 오늘 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하물며 초창기임에랴.  

어느덧 다망하던 5월도 다 지나고 6월에 들어섰다. 훈춘 식구가 두 명 왔는데 숙모가 부기장으로, 외숙모가 식모로 와서 우린 이젠 각자 맡은 일을 더 잘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게 되었다. 숙모는 이모부와는 사돈이었고 외숙모는 이모부의 사촌처남 댁이었는데 나한테는 다 가까운 친척이다.

이모부가 훈춘 M무역공사의 이름으로 합작 회사를 했던 그 시기에는 친척으로 영철이 한 명밖에 없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자기 안속을 채우는 데만 열중했기 때문에 결국 도둑 한무리를 먹여 살린거나 다름 없었다. 경험도 경험이거니와 친척들 혹은 사돈들을 불러 쓰면 불필요한 낭비를 막을 수 있었고 진심으로 일해줄 수 있어서 이익을 최대로 높이는 데는 그 이상 좋은 방법이 없다. 하물며 개인적인 투자임에랴.  

종수가 차를 사기로 했다. 그런데 원래 계획대로 닛산을 산 것이 아니라 더 보기 좋고 깨끗한 도요다로 결정했다. 《라선ㅡ외ㅡ88》라는 번호도 참 좋아 보였다. 이제 면허를 딴 다음 원정 택시로 쓰기로 했다. 창주의 222호에 손님이 많지 않았으므로 3~4명인 경우 88호를 쓰면 되었다. 

그래서 면허가 급히 수요되었다. 일단 신청했고 신청금도 냈다. 6월 10일에 차영감이 흐뭇한 얼굴을 하고 용철이와 나, 종수를 부르면서  

“너희들이 한 턱 내야겠다.”  

했다.  

이미 면허증이 다 되어 있었고 이제 막 받아왔던 것이다.   

배를 띄워서 낙지와 미역 등속을 걸어 들였다. 우리 배는 안주동의 해상금 앞 바다에서 고기잡이가 허락되었다.사공은 두 명이었는데 낙지는 낚시로 하루에 2백 마리 정도 잡을 수 있었다. 아침에 찦차로 바다에 나가 실어왔고 사무실 종업원들이 앞 시내에 나가서 밸을 따고 회사 구내에 밧줄을 늘여 말리웠는데 파리 떼가 욱실거렸다.   

배를 다 만드는 데는 힘이 좀 들었다. 중국에서 6마력 디젤 엔진을 사다가 장착했고 4마력 이하여야 무세금이었으므로 4마력으로 신고했다고 한다. 추진기도 자체로 만들어서 달아놓았다. 송길이 영감이 자기 적성에 맞게 배에 직접 손을 댔었다. 

또 자동차에 쓰는 발전기와 헤드라이트 몇 개를 장치해 놓았다. 차영감과 함께 내가 발전기 장치하러 바다에 간 적이 있다. 바다에는 어디라 할 것 없이 철조망으로 막고 있었고 전기선을 늘여 놓았었는데 전기 사정이 안 좋아 간첩을 막을 수 있을는 지 의심되기도 했다. 

그 철조망 있는 데까지 가려면 반드시 군대 초소를 지나야 했고 외국인들은 한발자국도 들어서면 안되었다. 그래서 나는 허름한 조선 사람의 옷을 걸쳐 입고 갔었다. 원칙상 공민증을 검열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차영감이 내려서 초병과 몇 마디 주고 받더니 무사통과 되었다. 내가 직접 차를 운전해서 바다가 가까이 백사장에까지 가기는 처음이었다.  

요즘 수산물은 낙지뿐이다. 찦차 안에는 낙지 냄새로 파리 떼가 모여들어 운전 하기에 귀찮았지만 면허증이 있은 후부터는 손이 근질거려서 매일 운전을 무던히 기대해보기도 했었다.   

나진시 차 감독소에서는 중국 B종 면허증(버스를 제외한 모든 차종 운전 가능함)이 있고 신청금 만원만 내면 며칠 내로 사회 안전부에서 발급하는 3급 면허증(모든 승용차 운전 가능)을 내주었다. 그 외의 모든 사람은 반드시 시험을 받고 합격자한테만 먼저 4급 면허증을 발급했다. 이모부와 영철이는 이미 2급 면허증(특장차를 제외한 모든 차종 운전 가능)을 받고 있었고 어제 우리 세 명의 신청금 3만 원을 내었는데 오늘 발급 받으리라고는 생각밖이었다.   

4급(지정된 승용차만 운전 가능)이었는데 이제 우리는 둘째 이모부와 같이 4급 면허로 각자 지정된 차를 운전할 수 있게 되었다. 차마다 신분을 증명하는 《자동차 자격증》(중국 행차증과 같음)이 있었는데 역시 사회안전부 발급이고 차종, 차번호, 엔진 번호, 섀시 번호, 기업소 명칭이 적혀 있었고 마지막 페이지에 지정 운전수의 이름을 적는다. 

86호에는 용철이와 나의 이름이 올랐고 88호에는 종수, 89호에는 둘째 이모부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말 그대로 지정이었기에 지정 외의 차를 운전하면 교통규칙 위반이었으며 일단 잡히면 제일 엄한 처벌로 차를 몰수했었고 경한 처벌이라고 해도 50~100달러의 벌금이 나온다. 또한 장거리를 나갈 때 반드시 운행증이 있어야 했는데 기업소, 운행 구간, 차번호 등이 적혀 있었고 운행 시간도 적어야 했다.

그러니 차를 운전하는 데 세 가지 증명서 즉 자동차 자격증(버스는 기술 검사증), 면허증과 운행증이 있어야 했고 면허증의 급수에 따라 지정차인지 아닌지도 확인 받아야 했으며 그중 하나라도 빠지면 곧 처벌 받았는데 2급 면허를 받은 이모부와 영철이는 세 차 중의 아무 차나 다 운전할 수 있었다. 

이제는 맡은 일 외에도 운전이라는 일이 더 추가되었다. 나진에서의 운전은 처음에 유혹적인 면이 많아서 서로 다투어 운전했지만 업무 양이 무척 많았을 뿐더러 도로에서 운전 기능이 약한 조선의 운전 기사와 교통 의식이 안 좋은 사람, 주정뱅이, 길을 막아 나서는 군대, 그리고 아무데나 쏘다니는 개들이 많았으므로 나중에는 안전문제와 무유혹으로 운전을 싫어하는 경향도 더러 있었다.   

단독기업으로 된 후 세포비서 자리가 줄곧 비여 있었다. 종업원들 중 남자들 대부분과 여자 한두 명이 노동당 당원이었기에 어차피 비서가 있어야 했다. 이 달에 나진시 노동당 위원회(다들 시당이라고 불렀다.) 비준을 거쳐 김정애가 세포 비서로 되었고 노동 지도원(주로 생활비 관리와 인원 관리를 하는 사람)을 겸하게 되었는데 생각지도 않은 차영감의 해임 통지도 같이 받게 되었다.   

차영감은 우리회사 건설에 크게 기여한 사람이다. 노동당원으로서 대의원을 지낸 적도 있었고 차 사업소의 기사장으로, 합작회사의 조선 측 사장으로 있기도 했으며 특히 전기에 특기가 있었다. 그런 사람을 아끼는 이모부가 가만 있을 리가 없다. 노력을 거쳐 월말에 노동자로 재 파견되어 왔는데 종업원 회의 때 이모부가 고문으로 임명했다.  

인원 파견장은 노동국에서 떼어 주었고 노동국은 임의의 시간에 일방적으로 해임 할 수 있는 권리와 생활비 결정 권한도 갖고 있는 부문이었다. 회사에서 계속 일할 수 없는 사람을 해고시키는 데도 간섭할 수 있었으나 시당보다 권력이 못하였다. 시당에서 압력을 주면 인원을 받을 수도 내보낼 수도 있었다.   

버스 11대도 만 가동으로 분주히 보냈다. 스피어 타이어를 주지 않았기에 펑크 나면 회사에 돌아와서 수리하고 난 뒤에 다시 나갔다. 

운전수들은 첫 손님을 실으면 재수 좋다고 하면서 아침 일찍 나왔으며 제일 먼저 정류소에 간 차가 첫 손님을 실었다. 처음에는 5시경에 나오던 것이 후에는 새벽 두시에도 나왔으며 장마당 옆의 노천 정류소에 세워 놓고 날 밝을 때까지 차에서 잠을 잤다. 

나진과 선봉의 20여 대의 버스는 그렇게 자기 나름대로 순번을 정해가면서 운행을 했는데 후창 쪽에 가는 차는 출입국 사무처 앞의 광장을 정류소로 쓰고 있었고 그 쪽의 순번도 기사들끼리 조절하고 있는 듯 싶었다.   

그런데 경쟁상대보다도 더 무서운 건 피로 운전과 음주 운전이었다. 6월 초의 나진시 운전수 회의에서 우리 회사의 김춘복이 음주 운전을 해서 면허증을 박탈당했다. 그래서 단독 기업으로 된 후 제일 처음 해고된 사람으로 되고 말았던 것이다. 언제든지 피로 운전과 음주 운전 때문에 꼭 사고를 칠 것만 같은 예감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게다가 영양 실조로 몸이 약한 기사들이 그 과중한 경쟁력을 감당할 수 있을는지는 정말 자신 없었다.  

운전기사를 해고했을 뿐만 아니라 차장도 해고하는 경우가 있었다. 정류소라는 건 패말만 박혀있을 뿐이고 노천이었기에 차장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표를 팔았다. 나진에서 선봉까지 30원이었고 중간 역이 존재했으므로 15원, 20원짜리도 있어서 한번 왕복에 보통 3천~3천5백 원을 회사에 바쳐야 한다. 

승객은 왕복에 160명 정도이고 짐값도 적지 않게 받을 수 있다. 아무리 적어도 2천5백원 정도는 되어야 했다. 어떤 차장들은 나간 표와 표 판 돈이 맞지 않았는데 돈이 많을 때도 있었고 돈이 적을 때도 있었다. 

하루에 3~4회 운행이 가능했고 저녁에는 1만원도 넘어되는 수익금을 가방에 넣어 가지고 들어왔는데 점심 식사 비용을 수익금에서 빼내는 것을 허락했으며 돈을 맞추기가 힘들 것 같지 않았다.  대부분의 차장은 많아서 5~20원정도 차이날 뿐이었다. 그런데 일부 차장은 거의 매일 100원 이상씩 차난다. 

김옥화가 제일 전형적이었다. 입사해서 1주일 동안에 매일 100원 이상 적게 입금했기 때문에 부득이 해고하는 수밖에 없었다. 중국 인민폐와의 환율이 25 : 1 정도였으니 중국 돈 4원에 해당한 돈이었지만 조선 사람한테는 상당히 큰 돈이었다. 지대 밖에서는 평균 생활비가 100원 정도 된다고 하니 이 차장은 하루에 지대 밖 한사람의 월급 정도 이상 되는 돈을 훔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런 큰 도둑을 회사에 둘 수 없었던 것이다. 

차장이 기사와 결탁하여 돈을 조절해서 조금씩 남기는 것 같았지만 증거가 없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차장들이 쓰는 화장품이 고급스러워 지고 옷도 많이 깔끔해 졌으며 기사들은 한 갑에 100원씩 하는 《검은 고양이》담배도 매일 피워댔는데 그 것을 훔친 증거라고 할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차마다 감독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어서 눈을 펀히 뜨고 당하면서도 묵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객 수송으로 수익금이 엄청 많이 들어오고 있었다. 매일마다 저녁 10시경까지 돈 붙히는 작업을 했고 늦은 때는 11시 후에야 끝났다. 

번호 틀린 돈은 정말 골치 아팠다. 돈 종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가운데 접어놓은 자리가 뭉텅 끊어진 돈이 많았었고 붙히다보면 서로 다른 장의 같은 면의 한쪽씩 붙혀진 돈으로서 번호 틀린 돈이라고 불렀다.   

10원짜리와 50원짜리를 붙히는 작업이 정말 볼만 했다. 한사람이 전문 테이프를 가위로 잘라 내고 차장과 출납원 그리고 우리 훈춘 식구들도 돈 붙히기 전투에 뛰어 들었는데 테이프마저도 중국에서 사다가 공급했고 한시도 떨어지면 안 되는 비상 용품이었다. 

초창기 때에 테이프를 무던히도 많이 사 내갔었는데 연말에 10원짜리와 50원짜리 새 지폐가 나오면서부터 테이프 사용량이 대폭 줄어들어 원래 하루 당 3개로부터 후에는 사흘에 한 개 정도로 되었었다.   

작업하면서 별의별 상담과 잡담이 많이 오갔는데 하루의 피곤을 푸는 좋은 시간이 되었다. 기사들은 장난으로 여자들의 가슴을 잘 만지었는데 특히 처녀들은 그 여린 가슴을 많이도 주물렸다.
그 중에서 조경화와 최광수, 리창주의 처녀 몸 만지는 재주가 뛰어 났다. 처녀들은 그 세 명만 있으면 멀리서부터 피하는 눈치였고 주물리고 나면 한바탕 욕설을 해댄다. 

“야! 이 놈아! 니 언제 사람 질 하겠니, 응? 좌우지간!”  

훈춘 식구중의 젊은 친구들은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귀엽다는 듯이 안아주는 정도에서만 그치었다. 하루는 내가 오선희를 껴안아 주었더니   

“야~아, 영도 선새임, 이러지 마쇼!”  

하면서 몸을 빼내고는  

“부인 접촉 갈망증이 있구나.”  

하고 혼자 말처럼 되뇌는 것이었다.   

내가 홀아비라는 것은 이미 비밀이 아니었다. 그 말이 떨어지자 부기실은 떠나 갈 듯한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거의 매일 부기실은 그렇게 웃음바다여서 하루 낮일 뒤끝에는 누구나 다 모였는데 뽀얗게 퍼진 담배연기마저도 오히려 흥을 돋구는 듯 했다. 

이야기가 너무 야한 쪽으로 나갈 때면 차영감이 호통쳤다.   

“이 쌍 개 간나들아, 그만 히히닥 거려라!”  

그런 웃음바다 속에도 오래 있지 못했다. 6월부터는 인수원 노릇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중국 측의 권하 통상구와 다리 건너 원정 종합검사청사에서 해야 하는 여러 가지 수속 절차와 요령에 많이 익숙해졌고 교두에 도착하기 전 훈춘 시내 안에서 해야 하는 작업과 나진 도착 후에 밟아야 하는 검사 절차에서도 차실이 생기지 않게 신경을 많이 썼다. 

그래서 나의 인수원 작업은 언제나 합격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모부의 만족스러운 긍정과 정비례로 욕하는 차수와 목소리도 함께 올라가고 있었다.   

회사 초청으로 나진에 다니는 사람이 우리 훈춘 식구 외에도 30명 정도 되어서 초청장 심부름도 적지 않게 했다. 초청장 수속은 그야말로 복잡했는데 관계부문이 너무 많았고 사람이 나진에 왔다가 되돌아간 후에 정화가 영접 보고서를 써 올리기까지 작업 양이 무척 많았다. 관계 부문으로서 보위부는 늘 틀거지를 차리고 뇌물을 보내줘야 싸인도 잘해 주었는데 휘발유를 제집 것처럼 내갔고 자동차 부품도 공짜로 많이 가져갔다. 

이듬해부터는 이모부가 고려 끝에 휘발유 전표를 달마다 100키로 짜리를 무상으로 주었는데 100키로 이외는 꼭 돈을 받았기에 오히려 더 절약하는 셈이였다. 그렇잖으면 공짜로 얼마 나갈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15호실 (보위부 소속), 담당 지도원(보위부 소속), 나중에 대외 사업국까지 싸인 받아야 승인되었고 대외 사업국에서 내주었다. 

훈춘에서는 회사 초청으로 나진에 가는 사람들의 통행증 수속을 내가 했었다. 훈춘 M무역공사는 유명무실해졌지만 하나밖에 남지 않은 도장이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 도장으로 초청을 받은 40명 정도의 사람들(우리 식구 포함)의 통행증을 만들 수 있었다. 

우리 식구들 외의 다른 사람들은 주로 개인적으로 장사를 했었는데 초청장뿐만 아니라 와크(수입품 신고서 즉 상품 수입을 허락하는 세관 문건과 그 외 수입품에 관계되는 모든 서류를 포함)도 많이 빌려 썼었다.

이 글을 공유하기:

동방영도

작가를 응원해주세요

응원합니다 응원합니다
11
응원합니다

댓글 남기기

글쓰기
작가님의 좋은 글을 기대합니다.
1.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글의 초고는 "원고 보관함"에 저장하세요. 2. 원고가 다 완성되면 "발행하기"로 발행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