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춘에 있을 때는 나진에 가고 싶고 나진에 가 있을 때는 계속 있고 싶다.   

그만큼 정이 들었다. 다닌 지 불과 3개 월밖에 안되었어도 마치도 외갓집에 놀러 가는 기분이라고 할까, 조선 사람의 몸과 조 선사 람이 많이 모여드는 장소에서 풍기는 특이한 냄새도 그리워질 때가 있었다.   

조선 사람들은 독한 잎담배를 잘 피웠다. 잘 건조하지 않아 색상도 안 좋은데다 맛이 나빴고 냄새 역시 안 좋았다. 게다가 담배 종이가 없어 신문지로 말아 피웠는데 향긋한 송진 냄새가 있어서 담배 맛을 돋구는 모양인지 남자들이 있는 곳에는 항상 담배 연기가 자오록했다. 

돈 때문에 옷 세척도 좋은 비누로 하지 못했고 그래서 그런지 때 자국이 얼룩진 옷에서는 언제나 땀내가 났으며 경상적으로 목욕하지 않기 때문인지 영양 실조로 야윈 몸에서는 이상야릇한 냄새까지 풍기였다. 그것이 야윈 사람의 비린내라는 것을 머리에 털 나고 나서는 처음 알았다.

게다가 작은 온돌방의 부엌에 돼지 혹은 닭을 기르고 있었기에 그 분변 냄새도 섞여 있었고 습기가 많아서 그런지 곰팡이 냄새도 나는 듯했다. 장작불을 지폈을 때 연기에 그을린 냄새와 된장 냄새, 간장 냄새와 같은 양념 냄새, 그리고 돼지죽 냄새도 더러 있었다. 

그 복합 냄새는 3명 이상부터 어찌도 강하게 풍기는 지 그 장소에 5분만 있으면 혼미해지고 만다. 이모부는 부기실과 경비실에 갈 때마다 3분을 초과하지 않았으며 차에 조선 사람이 타는 것을 제일 꺼리었다. 그 냄새를 싫어해도 보통 싫어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 냄새는 내가 경신에 있는 외갓집에 가서 놀 때마다 늘 맡아오던 냄새와 비슷한 데가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외갓집 냄새는 아무리 맡아도 혼미해지지 않는 거였다. 그리고 나의 외갓집은 전통적인 함북도 8간 집이었지만 조선 사람들이 사는 집은 일반적으로 집마다 면적이 20평방미터 정도 되는 작은 온돌방이었고 5세대 이상 한 줄로 붙어 있는 줄 집이었다. 

옆집의 말을 귀동냥할 수 있었고 냄새가 강하게 날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내가 어릴 적에 그런 줄 집에 살아본 적은 있었지만 냄새만은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돼지와 닭은 전혀 길러 보지 못했었다. 듣는 말에 의하면 조선에서는 밖에다 굴을 짓고 가축, 가금을 길러서 많이 도둑 맞히기 때문에 집안에서 기를 수밖에 없다고 한다. 안화동 회사 주변에는 김치움 속에 돼지를 넣어 기르는 집이 한두 집 있었는데, 입구의 문에다 자물쇠를 잠궈둔걸 본 적이 있다.

6월 중순의 어느 날 시퍼런 대낮에 우리도 알뜰히 기르던 개를 도둑 맞혔었다. 단오 날에 잡아 먹으려던 것인데 개를 다루는 데는 정말 이골이 터 있는 나진 사람들이었다. 나진의 개는 시래기에다 강냉이 가루를 섞어 먹여 길러서 고기 맛이 안 좋았기에 우리 절로 구수한 누룽지를 주거나 조선의 개들은 평생 먹어보지 못할 뼉다구니 같은 것을 주어서 길렀던 아까운 개였다. 그 먹이를 다투느라고 안화동의 개는 다 우리 회사 주변에서 오락가락 했었다.   

사투리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중국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서 함북 사투리와 똑같은 사투리를 제일 많이 쓰는 곳이 훈춘이다. 지역적으로도 함북도에서 사투리가 제일 강한 나진과 가장 가깝다. 어려서부터 많이 들어온 사투리를 그 것도 난생 처음 듣는 사투리와 만나는 것도 일종 쾌락이다. 우리말 다듬기 운동을 했었다는데 구수한 사투리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가장 많이 쓰는 것은 나그내(남편)와 안깐(아내 혹은 아낙)이었다. 이제 단오 날 오전 사공인 송길이 영감에게서 들은 안깐령 이야기를 적기로 한다.   

함북 어느 곳에 안깐령이라고 부르는 고개가 있는데 그 고개를 안깐령이라고 부르는 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오래 전부터 그 고개에 범(호랑이)이 나타나서 고개를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잡아먹었는데 사람들이 무리 져 다녀도 막무가내였다고 한다. 

어느 하루 친정에 다녀올 일이 있어서 웬 안깐이 홀로 고개를 넘고 있었다. 범이 출몰한다는 소문을 들어서 겁이 났지만 어쩔 수 없는 걸음이란다.   

마침내 범을 만났다. 벌벌 떨다가 에라 모르겠다 치마를 뒤집어쓰고 범을 향해 엉덩이를 내놓고 엎디었다고 한다. 

그런데 묘한 일이 생겼다. 마침 여자가 생리를 겪고 있었고 속곳을 입지 않은 채로였다. 

범은 난생 처음 이렇게 무서운 《동물》을 만났다. 입이 아래 위로 깊이 째져 있는데 입 주위에는 검은 털이 무수히 나있고 뭘 잡아 먹었는지 입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다. 범은 그만 질겁하여 걸음아 날 살려라 꼬리 빳빳이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한창 그런 자세로 엎디어 있던 그 안깐은 범이 물러갔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퍼더버리고 앉아 엉엉 울고 있었는데 그 장면을 지나가던 포수가 다 구경했었고 그녀를 친정에까지 무사히 데려다 주었다.   

그런데 그 후부터 범은 종적을 감추었고 고개를 넘어 다니던 사람들은 범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고개 이름도 그 안깐 때문에 안깐령이라고 불리워졌다고 한다.   

그렇게 야담을 잘하던 송길이 영감도 후에 배를 팔아 버리자 해고되었다. 다른 사공과 둘이 함께. 

어차피 모험적으로 한 일이었는데 비용이 엄청 들어가는 반면에 수입이 너무 적었고 회사 구내에서도 마른 낙지가 도둑 당했으므로 결국 장마당 가격보다 5배 정도 더 비싸게 주고 사 먹는 거나 마찬가지여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배가 없어서 이듬해부터는 미역 철에 매일 먹던 그 맛있던 참미역 회를 더는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철따라 청어, 이면수, 낙지를 훈춘에 들고 들어오던 역사도 끝나고 말았다. 그만큼 회사에는 손실이 많아질 뿐이었다.   

월말 때는 훈춘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어머니가 호적을 월초에 훈춘으로 옮겼다고 한 말씀을 듣고 난 다음부터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언제 폭발할지 모르게 팽팽해져 있었다. 가끔씩 종수와 노래방에도 다녔고 언제 해도 싫지 않은 낚시질도 다녔다. 아직 이른 철이어서 고기가 낚여지지 않았고 친구가 없는 생활은 무미건조하기만 했다.

요즘은 출국 바람에 일본이나 한국으로 간 친구들이 많아 졌다. 게다가 몇 명 남지 않은 친구들마저 거의 다 연길에 있었다. 그렇다고 매일 연길에 간다는 것도 무리였다. 술도 못 먹지만 이상하게 노래방에 가면 분위기가 좋아서 그런지 맥주를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평소에 못 먹던 술을 한꺼번에 다 마셔버리고 말 기세로. 그랬지만 스트레스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이날 오전에 종수와 함께 시내를 돌아 다녔다. 그러다가 4월 30일 날 나한테 엄청 큰 바가지를 씌운 장사꾼과 마주치게 되었다. 인수원을 처음 경험하는 날 억울하게 걸려들었었다. 

영화관 앞의 네거리에서 불과 서너 회합만에 그 자식은 얼굴이 장마당(시장판) 되어 버렸다. 한쪽 눈 통은 부어서 눈알이 보이지 않고 코에서는 덩지피가 쏟아지게 패주었다. 나는 어느 누구와 싸움하든 지간에 언제나 말보다 선손을 썼고 피를 보고서야 전쟁을 끝냈다. 

누가 신고했는지 경찰이 들이 닥쳤다. 중국 전 지역에서 경찰에 신고하려면 110을 이용하면 된다. 110 사무실까지 110 전용차 신세를 졌다. 싸움 경과를 설명했고 감방 비슷한 방에 갇혔다. 방은 사방 2미터 되는 듯했고 철창이 있는 자그마한 창문이 하나에다가 음지쪽이어서 약간 썰렁하였고 오줌 냄새가 코를 찔렀으나 장의자가 있어서 편안히 누울 수가 있었는데 저도 모르게 잠이 들어 버렸다. 

스트레스가 그렇게 풀렸던 것이다. 그것도 주머니에 있던 두툼한 돈지갑을 베개 삼아 베고서. 나진에 나갈 물자를 구입할 돈이었다. 세시간 정도 자고 났을 때는 오후 한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밖에서 종수가 사정해서 그 방의 청소를 말끔히 해준 후에 벌금 천 원을 내고 풀려 나왔다. 

종수는 내가 싸움할 때 손을 쓰지 않았다. 나올 때 대장이 나보고 한 마디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대학생이라는게 싸움은 왜 하니?”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를 말을 귀 등으로 흘려 보내면서  

“으음! 자~알 잤다!”  

기지개를 쭉쭉 켜니 옆에 있던 경찰들이 쿡쿡 웃어댔고 종수도 우스웠겠으나 웃음을 참는 모습을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에게 핸드폰이 하나 있었는데 천 원 빚으로 이모부한테 주고 말았다. 그때 나의 월급이 천 원이었다. 내가 출국 전에 넉 달 간 일할 때 받은 600원보다는 많은 거였고 2년 동안 줄곧 천 원이었으며 그 것도 내가 직접 받은 적이 몇 번 안 되고 이모가 어머니 손에 전달하고 있었다.   

이번 싸움으로 나는 스트레스 푸는 방법을 하나 알아낸 셈이었다. 사람이 살다보면 정신 질환 비슷한 증세를 보이는 때가 있는데 그때가 바로 스트레스가 많이 쌓인 때이고 사람마다 푸는 방식이 다르겠지만 언제든지 꼭 풀어 버려야 만이 진짜 정신 질환으로 되지 않는다. 

그런 도리를 후에 4차 더 걸쳐서 확인했다. 바로 다음날 나는 거뜬한 기분으로 나진으로 갔고 종업원 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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