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중고차 여섯 대 중의 한대가 나진으로 가다가 대반령 남쪽 산비탈에서 물호스가 터지면서  엔진이 절어 붙는 사고를 냈었다. 그 차를 내가 교두까지 보내주기로 했는데 아직 운전 경험이 적은 나로서는 어디까지나 낼만한 사고였다. 

내리막이었는데 얼마든지 사고를 방지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오히려 사고를 저질렀기때문에 공부할 기회를 얻었는 지는 모른다.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부를 잘 해뒀기에 차 고장을 잘 진단하는 전문가로 되기에 손색 없는 정도에까지 갈수 있었던 것 같다.   

그날은 면허증이 없었기에 단속을 피해 밤 시간을 이용해서 먼저 외갓집까지 갔다가 이튿날 다시 보내줄 계획이었다. 

낮에는 이 길에 차가 많다. 그런데 고개 저쪽은 어디까지나 6천명 정도의 사람이 널려져 사는 국경 지대의 편벽한 곳이었으므로 밤 11시경에는 차를 만나는 일이 극히 드물다. 사고 지점에서 제일 가까운 소반령까지 가려해도 5키로 되는 거리에 어차피 늦은 시간이어서 어쩔 수 없이 고개에서 하루 밤 지냈었다.   

극도로 지친 몸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큼직한 돌로 차바퀴를 고여놓고 운전석에 오르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 버렸는데 새 포장 도로공사에 동원된 차가 옆을 지나갈 때 깨어났다. 

이미 막 아침 7시가 되는 시간이었다. 두번째 도로 공사차를 세워서야 내 차를 구원해 줄만한 차가 외가집 마을인 경신 쪽에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가는 방향이 그쪽이었고 낮에 자기 번호가 아닌 번호판을 단채 다른 차에 끌려 시내 쪽으로 되돌아 가다가 혹시 몰수당할 수도 있었으므로 일단 경신에 끌어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경신에 갔다가 구원차로 다시 고장난 지점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한낮이 되었다. 경신까지 16키로 정도 되는 거리를 아주 늦은 속도로 천천히 끌려갔다. 거기서 허름한 수리소에 차를 맡겼고 오늘 그 차가 다 수리되어 내가 나진까지 몰아가게 되었다.   

얼마를 못가서 새로운 고장으로 물이 조금씩 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물통을 하나 준비하고 있었으므로 교두에 도착하기전 경신에서 권하까지 11키로 구간에서 두번 물 보충을 할 수 있었다. 

약간씩 새는 고장이어서 나진행을 포기할까하고 생각하면서도 저녁 시간 전에 두만강 다리를 건넜고 원정에서 수속을 마친 후 나진으로  출발했다. 모두 열번 정도의 물 보충을 했고 저술령을 천천히 넘었으므로 원정에서부터 세시간이 지난 아홉시에야 나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부영감이 반갑게 맞아 주었고 로따네는 뜻밖이라는듯한 표정이었으며 나때문에 다들 저녁 한끼를 더 먹을 수 있었다. 로따는 내일 나오는 줄로 알았다면서 너도 이젠 운전수로 쓸만하다며 농담을 걸어왔고 몹시 배고팠던 나는 두그릇의 밥을 뚝딱 해치웠다. 나진에 다니면서 끼니를 건너는 고생도 수태 하였었다. 그 끼니를 건널 때마다 사건이 터지는 것도 나중에는 이상하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이튿날 오래간만에 만난 얼굴들은 반가운 얼굴을 보여주었다. 특히 차영감은 더욱 반가워했다. 시계를 사다 드렸던 것이다.   

“이보게, 그날 싸움 장소에서 김동무가 중국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청계 사람들이 다 나와서 뚜드려 팼는 지도 모르는 일이요. 춘근이 그 자식이 나를 찾아다니면서 애 먹이던데 말이야. 이제부터 둘이 만나게 되겠구먼, 만나면 또 전쟁 해보지 그래?”  

차영감은 이제 말투도 고치고 있었다. 나진 사람의 전형적인 사투리식의 반말은 존칭어와 일반어의 구별이 없이 쓰이고 있는 터이다.   

한달사이에 일이 많았다고 한다. 

용구 아저씨가 운전수로 들어온지 얼마 안되어 노선에서 소를 처박는 사고를 치러 요즘 단련대에 갔으므로 은선이와 같이 있게 되었고 김옥화가 해고되었으며 새벽에 정류소에서 버스 위의 배터리를 몇개 잃어버리고 박동혁의 차는 관곡 정류소에서 군대들의 손에 앞 그라스가 박살났다.   

버스 기사들은 군대를 싣기 싫어하였다. 돈을 내지 않았으므로 될수록 적게 실으려고 했고 동혁이의 성격으로는 노선 상의 중간 역에서 군대를 더욱 실으려고 하지 않았었다. 선군 정치여서 모든 것은 군대가 우선이었고 군대는 노선 버스도 공짜로 타게 되어있었던 것이다. 

기사들은 한달의 수익금이 계획을 초과했을 때 생활비 외에도 많은 상금을 탈 수 있었는데 가장 많이 탈 때 총 만 6천을 탈도 있었고 적어도 8천 정도는 되었으며 차장은 운전수의 80% 정도 탈수 있었기에 수익금을 높이면 그만큼 자기 수입도 올라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이미 높은 생활비에 맛을 들여서 짐 하나를 가지고 옥신각신하는 차장과 기사가 울며 겨자 먹기로 어쩔 수 없이 군대를 실어야 되는 것이다.    

어떤 때는 한차가 몽땅 군대를 실을 때도 있었다. 조선에서는 이상하게도 거리에서 수시로 군대를 볼 수 있었는데 이동도 수시로 하는 모양인지 노선에서 버스나 트럭에 군대가 앉아 다니는 걸 늘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우선이라는 그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쁜 버릇과 습관이 많이 자라나 있었다.  태워주지 않는 가사를 죽도록 패주는 때도 있었고 그 기사가 중국 기사라 할지라도 가만 놔두지 않았다. 

우리 집 물자를 늘 실어다 주는 박기사도 그렇게 한 무리의 군대들에게 곤욕을 치렀다. 중국 차를 탈수 없게 된 군대들이 도어를 부수어 놓고 박기사를 한바탕 때려준 후 물러갔다고 한다. 동혁의 차가 서지 않으니 들고 있던 막대기 하나를 버스 앞쪽에 뿌려서 그라스가 박살나게 만든 거였다. 

원래 군대에게 후래시를 도둑맞힌 후부터 군대를 안 좋아하던 나였다.  군대를 안 좋아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또 있었다. 매점에서 군대들이 늘 차 부품을 훔쳐 내가고 어느날엔가는 영철이와 말싸움까지 났는데도 주머니에 훔쳐 넣은 부품을 끝내 내놓지 않았다. 

해상금에 낙지 실으러 다닐 때 초소에서 담배를 뇌물로 내놓아야 통과시켰다. 닛산 부품도 군대가 훔쳐갔고 그러면서 경비인 용철이를 보고 삐치면 죽인다고 하는 바람에 눈을 펀히 뜨고 도둑질 당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군대가 또 와서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사실은 며칠 전에 나진-선봉 구간의 포장 도로공사를 하는 군대들의 불도저가 작업 도중 길 옆의 구덩이에 떨어지면서 굴렀는데 다시 세우고 보니 작업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으나 겉이 볼꼴 없이 되어서 도장 작업하려고 온 거라고 했다. 

로따가 그들이 말하는 어투에서 공짜로 하련다는 것을 알아낸 후 돈을 내야만이 해줄 수 있다고 말해둔 지 며칠 되었다고 했고 군대들은 매일 해달라고 성화다. 우리 회사에서만 도장 작업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기업소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걸 왜서 기어이 우리 회사만 고집하는 지 그게 궁금하고 이해되지 않는다.   

이 젊은 군대 두명이 실수로 불도저를 번지고난 뒤 군관한테서 비평을 받았겠고 무조건 도장을 해가지고 오라고 해서 그 임무때문에 부리는 고집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군대들에게 뭐가 수요되면 뭐를 만족시켜 주는 것이 조선에서는 상례라고 한다. 물론 돈도 받지 않는다고 한다. 그게 우리한테는 통할 리가 없다. 페인트와 필요한 인력과 시간이 소요되는 데 값으로 따지면 조선 사람한테는 어마어마한 돈이다. 그런데 기어코 해내려고 했고 나중에는 명령식으로 나오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로따는 기어이 해주지 않았고 우리 식구들한테도 단단히 다짐을 받아 두었다.  

며칠 후의 어느날이었다.   

군대 두명이 말도 안되게 성을 내면서 지나가는 개를 때려 죽이고 그걸 우리 회사 하수도 구멍에 처넣었다. 개 임자가 찾아와서 우리더러 배상하라고 반나절 동안이나 어처구니 없이 소란을 피웠고 후에 누구한테서 들었는지 군대가 한 노릇이라는 걸 알고는 다시 떠들지 않았다. 군대 두명은 그 모든 걸 울바자 밖에 세워둔 불도저 안에 앉아 내다보면서 깨고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로따는 중국으로 일보러 가면서 돈을 내기 전에는 절대 해주지 말라고 우리에게 당부하고 떠났는데 그때 며칠 동안 말없이 지켜보던 차영감이 군대 두명을 보고 어찌어찌하라고 시키는 거였다. 로따가 없을 때면 항상 사장 행세를 하는 차영감인데 합작 회사때의 습관도 있었거니와 지금의 경우같은 때에 군대를 도와줘야 한다는 쪽으로 더 많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회사 구내는 울바자로 막고 있었는데 울바자 밖에는 큼직한 연유 탱크 몇개가 놓여 있다. 유조차가 도착하면 탱크 옆에 주차시키고 부리웠는데 탱크밑에 달린 밸브를 틀어서 연유를 받아 쓴다. 요즘 차영감은 유조차가 탱크 옆의 좋은 위치에서 연유를 부릴 수 있게 하기 위해 흙을 날라다 펴고 있었다. 전부다 인력으로 했기에 일이 축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차영감은 군대들을 보고 먼저 페인트를 구해 오라고 했다. 아무리 사장 행세를 한들 영철이가 페인트를 줄리 만무했던 것이다. 

영철이한테 사정해서 디젤 10키로를 겨우 받았고 불도저에 넣었다. 그 불도저로 마당 정리를 하겠다는 데는 영철이가 디젤을 내놓지 않기도 난처했었다. 

배터리 하나를 내다가 키스시켜 시동을 걸고 나서 불과 한시간도 안되어 마당 작업이 끝났다. 차영감이 혼자서 거의  한달을 해야 하는 작업량이었다.   

군대가 페인트를 구해온 후 차영감은 창주의 차에서 휘발유도 쓸만큼 빼놓았다. 용철이에게서 분무기를 빌려 내온 다음에 도장 작업에 필요한 재료와 도구가 다 준비되었는지라 이제 전기가 오면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군대들을 보고 포장함 따위를 얻어다가 드러나 있는 엔진을 막아놓게 했고 겉을 잘 다듬어 놓으라고 시키고나서 정전되는 사이사이에 차영감이 직접 작업을 해서 일을 끝낼 수 있었다. 정전때문에 수차 중단되었지만 우리가 옆에서 거들어 주어서 무난히 작업이 진척되었다. 하루를 세워두어 페인트가 자연 건조된 다음 군대들은 아바이한테 깊이 사의를 표했고 우리한테는 인사도 없이 떠나가 버렸다. 

로따가 다시 나진에 온후 아바이 보고 다시는 그런 일 해주지 말라고 당부했으며 그러는 로따는 공짜 공사가 습관처럼 되어 버리지 말게 처음부터 막아보자는 의도였고 후에 우리도 견결히 나왔으므로 다시 공짜 공사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회사 구내에 들어온 차라도 수리비를 내지 않으면 절대로 해주지 않았다. 물론 로따와 사이가 좋은 사람이 차수리를 맡기면 작은 공사 정도는 무료로 해줄 때도 있었으나 조금이라도 큰 공사는 기어이 돈을 받고야 말았다. 

그럴 때마다 로따는 방문객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거였다.   

“돈은 당신 개인 걸 내는 게 아니잖소?”  

나진의 기업소들에서는 일년 내내 차수리에 드는 비용을 국가 예산이 없는지 해결할 능력과 방법이 없어했고 그래서 낙지와 다른 수산물 따위를 얻어다가 수리 비용으로 내놓기도 했었는데 그 것마저 없으면 차를 세워두는 수밖에 없다. 

어떤 기업소에서는 우리 회사에 자주 다녀서 체면이 좀 섰다고 인정되는 운전수에게 무조건 수리해 오라고 압력을 주어서 보내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에는 더 해주지 않았고 운전수는 하루 종일   

“야-아! 야-아! ”  

만 연발하다가 땅이 꺼지게 한숨을 지으면서 돌아가군 했었다.   

먼거리 운행에 나간 운전수들은 길에서 차잡이 하는 사람들을 실어주고 더러는 돈을 받아낸다고 한다. 그 돈으로 부품과 수리에 드는 비용을 조금씩 해결하고 있기는 하나 큰 고장에 필요한 수리비까지 감당하기는 턱도 안되었고 그래서 나진에는 세워둔 차들이 상대적으로 많았었다. 그만큼 차에 드는 비용을 기업소에서 내놓을 형편이 못되었기에 기사들한테는 차수리 후 비용을 자기가 내고 난뒤 기업소에서 결제 받는다는 식의 개념은 전혀 없었다.   

차를 기업소에 두고 쓸 형편이 아니면서도 고급쪽으로 선호하는 데는 뭔가 문제가 있다. 

군대가 그까짓 불도저를 사용할 수만 있으면 될 것을 가지고 기어이 국가 기업소에 손을 내밀고 남한테 손실을 끼쳐서까지 겉이 보기좋게 만들려는 것도 그렇고 또 일상 생활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걱정인데도 선풍기 외에 카세트 녹음기, 단색 TV 지어는 칼라 TV 등을 빚을 져서라도 사들이는 데서 겉치레를 좋아하는 우리 민족의 열근성을 엿보아낼 수 있었다.   

중국의 조선족도 60~70년대에 그런 시기를 겪어 왔는데 째지게 가난한 형편에 재봉침(미신)을 갖추는 것과 같은 겉치레를 유난히 좋아했었다. 

조선족이 겪은 재봉침 시대와 조선의 선풍기 시대(지금 현재)는 지구촌 어디서 사는 지를 막론하고 우리 민족이 비슷한 일면을 갖고 있다는 걸 설명해주고 있었고 형편에 맞게 살지 않는 현실로 나라 살림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통절히 느끼게 하는 거였다.   

조선족이 겪은 재봉침 시대는 재봉침을 갖출 형편이 아닌데도 빚을 내서 갖춘 것이 대부분으로서 그 빚은 나중에 따지고 보면 제일 큰 채권자가 나라였으며 조선의 선풍기 시대는 녹음기에다 칼라 TV 지어는 비디오까지 사놓고 사는 살림이라지만 사실은 선풍기 갖추기에도 걸맞지 않은 시대이다. 시간적으로 차이가 있을 뿐이지 하나의 공통점은 두 나라에 사는 우리 민족에게 다 있다고 생각되는 일이다.   

그런 시각으로 볼 때 주머니 사정에 맞게 아글타글 살아가는 중국인들에게서 배워둘 것이 너무 많은 우리 민족이다. 깨끗하고 근면하며 지혜가 뛰어난 민족이라고 자부감을 안고 말하기보다는 이제부터라도 용감하게 잘못된 데를 감추어두지 말고 고쳐가는 것도 좋은 마음가짐이고 해야할 일이라고 보아진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겠지만 그 완벽을 향해 달려 가느라면 한개 민족이 따라서 더 우수해질 수도 있고 위대해질 수도 있는게 아니겠는가? 

우리 민족 전체가 반성을 할 때가 온 것 같다.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민족의 미래를 책임지는 입장에서 한사람 한사람이 진심으로 노력해야 할 때가 진정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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