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며칠간 경비실 쪽에서 옷차림이 남루한 웬 남자가 장작도 패고 마당 청소도 하면서 일하는 모습이 가끔씩 보였다. 

처음엔 회사에서 받아들인 사람 같아 보여서 그냥 지나쳐 버렸는데 후에 뭔가 심상치 않아서 식구들과 물어 보았더니 숙모가 데려온 사람이라고 하였다. 

어떻게 불러들였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노동당원이고 은덕에서 왔는데 정확히 말한다면 나진에서 일하고 벌어먹고 살려고 온 것이었다. 가족도 없는 것 같고 아침에 배낭 하나를 메고 와서 장작 패는 삯으로 점심 밥을 얻고 있었는데 숙모가 내다 주는듯 했다. 

지대 밖에서 살기 힘들어 지대 안에 잠복(여행증 없이 비법으로 들어옴)한 그런 사람들은 사실상 거지였고 나진에서는 꽃제비라고 불렀는데 많은 꽃제비 중에서도 유독 은덕에서 온 꽃제비가 제일 많았었다. 키가 작고 얼굴이 까마잡잡했으며 몸이 겨릅대같이 야위어 있어도 장작은 잘 팼다.   

“저 은덕 꽃제비가 좀 이상하오.”  

내가 숙모한테 얘기하니  

“얼마나 불쌍하오? 그 많은 걸 다 팼는데 점심을 주는 게 아깝지 않습데. 우리가 시간이 없어 패지 못하잖소?”  

그러는 거였다.   

그랬다. 종업원들이 많이 패주었는데 요즘은 일거리가 많아 팰 시간이 없었고 장작이 딸리고 있었다.   

“우리 회사 사람이 아닌 사람이 일하는 게 별낳소(이상하오). 저런 사람이 혹시 간첩일지 모른다오.”  

훈춘의 180호 차 주인인 전기사의 차를 여러번 쓰면서 어느 한번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전기사는 이미 자기 차로 나진에 다니면서 운수업을 벌인지 1년 남짓이 되었다. 다니면서 나진 이야기를 많이 했더니 부모님들이 믿지 않으시더란다. 개국한지 50년이 되었는데 그렇게 낙후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고 여름철에 부모님들을 모시고 나진 관광을 했다. 며칠 후 두만강 건너 훈춘 땅에 들어서면서 부모님들이 개탄해 마지 않으셨단다.  생활이 어렵다는 걸 들어왔지만 진짜 어렵게 사는 걸 처음 눈으로 확인했고 나진부터 원정 사이는 옛날 모습 그대로였다면서 지금 살고있는 모습이 오히려 광복 후 개국하기 전보다도 못한 것 같다고 말이다. 

일제에게 수십년 동안 시달렸지만 광복 후에는 그래도 굶지 않았다. 나진시는 그때보다 많이 변한 것 같으면서도 일제시기의 건물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그 어려운 형편으로 어떻게 살아가는 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얘기를 마치고 나중에 내게 두고두고 명심할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해주었었다.  

“우리 중국 놈들한테는 조선 사람이 다 도둑같이 보이고 조선 사람에게는 중국 놈들이 다 간첩같이 보이거든.”  

내가 그 은덕 꽃제비를 간첩같다고 한 것은 노동당원이 그저 삯일이나 하면서 밥을 얻어먹으려고만 하는 일 같잖아서 한 말이었고 설사 간첩이 회사 안에 침투되어 들어와도 무서울 것이 없다. 

다만 회사 재산이 많아짐에 따라 재산을 도난당하거나 재해입지 않게 보호하는 것이 오히려 돈을 버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므로 조선 사람들이 외국 간첩때문에 민감한 것처럼 우리도 도둑에 대해 무던히 신경쓰고 있는터이다. 

몇달 동안 적지 않게 도난당했으므로 회사 실정을 잘 알고 있는 종업원들까지도 경계하고 있는 판인데 삯 일군이 여러날 째 일을 하는 것이 회사를 정찰하러 오지 않았는지 하고 의심을 갖게 했으므로 그 꽃제비를 간첩 즉 도둑으로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일단 그런 경계심이 있어야 했다. 일만 하는게 아니고 하루 밤을 경비실에서 자기까지 했다. 불안해서 더 둘 수 없었다.  마침내 내가 찾았다.   

“아저씨, 일을 그만하고 여기를 떠나시오. 다시 여기에 나타나면 그땐 후과를 본인이 책임져야 하오.”  

손에 쥐고 있던 도끼를 내가 받았다. 경비실 안에 들어가더니 배낭을 메고 뒤도 돌아보지 않으면서 나진 시내로 통하는 도로를 따라 내려갔다. 로따는 그러는 나를 가만두었고 숙모도 다른 말이 없었다.   

그 해 겨울에 나의 추측대로 이 자는 한밤중에 일부영감과 짜고들어 끝내는 배터리 세개를 한꺼번에 훔쳐갔던 것이다. 그 것도 그자가 배터리를 팔아보려고 여러 사람들과 물어보던 중에 우리 종업원과 맞띄웠기 때문에 발견된 것이다. 

배터리를 잃어버린 이튿날 아침에 일부영감은 해고되었고 스피어가 당분간 없었으므로 버스 석대가 노선에 나가지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하고야 말았다. 이상한 것은 일부영감이 나간 뒤로 더는 밤중에 도난 사고가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은덕 꽃제비를 쫓아버린 그날 저녁이었다. 로따가 식사중에 우리 식구들이 깜짝 놀랠 화제를 끄집어냈다.   

“저 아래 선봉 가는 길목에 버스 대기실을 지을까 한다.”  

그때까지 로따는 밥술을 뜨네 마네 하고 있었는데 표정도 심각해져 있었다.   

“너네 좀 말해 봐라. 짓는 게 옳은지, 아닌지. 내 생각은 짓는 쪽이다.”  

로얼과 영철이는 단마디에 반대했고 용철이도 반대하는 눈치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말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지금 회사는 기반이 좀 닦아져 있는 것 같지만 자금난으로 부지 면적이 큰 대기실을 짓는다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며 주관상에서 볼 때 정책의 영향으로 예견하지 못하는 손실을 보는 실책을 빚어낼 수 있다. 

결국은 반대 의견이었다.  

내가 그렇게 말 한데는 나로서의 이유가 있었다. 인수원 노릇을 하면서 엄청난 자금난을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실감하고 있었다.  회사 건물을 완성하는 데와 버스 수리에 자금이 많이 들었고 그동안 자재 구입을 하면서 늘 외상 놀음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금난을 해결하기 힘들었는데 우선 은행에서 돈을 꺼내고 다시 외화 전환하는 돈 작업이 시원치 못했고 중고차와 휘발유를 판매하는 데서 먼저 돈을 받고 있으나 계좌에는 돈이 남아있을 때가 얼마 없었다. 게다가 평상시의 비용도 무시할 수 없는 거였다. 내가 알고있는 조건에서 자금난이 해결되기 전에는 대기실 건설이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정책상에서도 나라적으로 지대 건설을 하는데 경험이 없었고 무슨 일이든지 정확 여부를 판단하는 척도가 없었기에 오늘은 이랬다, 내일은 저랬다하는 말 그대로 갈팡질팡하는 정책이었으므로 그렇게 자꾸 변하는 정책에 대비한 투자자들의 경험도 적다고 판단되었다. 

그러나 로따는 그때 이미 대기실 건설을 결심했고 10월에는 본격적으로 공사를 시작해 12월 달에 건물을 번듯하게 일떠 세운 기적을 만들어내는 정력적이고 능률적인 투자자와 사업가였다.  

내가 분석한 데는 결코 틀린 데가 없었다. 원견성이 부족했고 나진의 지대법과 투자유치 정책을 몰랐으며 투자 기교를 터득하지 못했으므로 그런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자기가 계획했던 일을 성사시킬 수 있는 사람은 투자자들 중에 몇명 안되었었다. 그만큼 로따는 경험이 풍부했고 계획 중의 일을 반드시 성사시키는 가장 성공적인 투자자중의 한사람으로 각광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 투자 계획이 아무리 방대하고 어려울지라도 결연히 밀고 나가는 특유의 집착이 마침내는 성공을 갖다 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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