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회사의 대기실 건설에 필요한 물자를 많이 실어내간다.
번마다 훈춘의 구매로부터 나진의 하차 작업까지 뇌력과 체력 이중 노동을 해야하는 일을 싫어하지 않고 신나게 해제꼈다. 힘든 일을 하면서 피곤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자고나면 새 힘이 솟구쳤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이번에도 무엇을 배워낼 수 있다는 기대감이 유혹했으므로 바보처럼 보일 정도로 일에 집착했다.
청진에서 나진에 온 제23건설 사업소의 건설자 70명 정도가 추위를 무릅쓰고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일은 잘했지만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청진에서는 100원 정도의 생활비가 나오고 배급이 있긴 하지만 생활을 보장하기 힘들다. 나진에서 일하는 동안에는 700원 정도의 생활비를 받을 수 있었는데 거의 쓰지 않고 모아 두었다가 청진에 갖고 간다고 했다. 그 수입은 청진에서 바라지도 못하는 것이지만 나진에서는 제일 낮은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이불짐을 갖고 오는데 숙식은 기업소에서 해결해주는 모양이었다. 어쩌다가 아직 허물지 않은 허은희 어머니 집에서 점심 식사하는 그네들과 맞띄웠다. 반찬은 된장 한그릇에 시퍼런 시래기 김치가 고작이었고 밥은 백미로 지은 것이지만 냉수에 말아먹고 있었다.
머리는 씻지 않아 먼지 투성이고 때가 주덕주덕한 옷을 걸치지 않았어도 완전한 짐승몰골이다. 얼굴은 때에다가 눈꼽투성이로 사람인지 짐승인지 가려보지 못할 지경이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버린 겨울 헝겁신을 주어다가 약간 기워서 다시 신고 다녔는데 바닥에 널린 다른 신발과 비교해 볼 때 그래도 제일 온전한 신발같아 보였다.
겨울옷이라곤 동복 한벌 정도뿐인데 그 것도 솜이 삐죽삐죽 나와 있는, 언녕 버렸어야 할 옷이고 안에는 속벌 한벌로 겨우 가리고있는 정도였다. 모자도 거의 쓰지 않고 일하는 모습을 많이 보아왔다.
건설 업체가 기계 없이 거의 수작업으로 일한다. 기계가 더러 있긴 했지만 전기가 없어 무용지물이다. 나진시 안의 건설 업체보다 건설비를 적게 받고 있었기에 우리한테는 더없이 좋은 선택이었고 높은 생활비에 습관된 나진 사람들보다 일축도 빨리 내었으므로 감독이 잘되면 품질을 보장할 수 있었다.
로따는 요즘 매일 현장에서 한편으로 감독하고 한편으로 물자 공급을 보장해 주고 있었다. 중국에서 내간 물자는 어찌된 영문인지 예산대로 다 나가지만 계속 딸리고 있었고 나진에서 오래 거래해온 여러 건설 업체들에게서 일정하게 도움을 받고 있었다.
모래와 자갈 등을 실어다 주는 대가로 연유나 부품을 내주고 급히 필요한 적은 양의 시멘트도 나진 현지에서 물물 교환으로 임의의 시간에 보충하는 등 방법은 우리한테나 여러 건설 업체들에게 있어서 다 좋은거였다.
23건설에도 돈 대신 일부의 연유와 중고차를 주는 것으로 합의했으며 모자라는 부분은 자동차 부품을 주기로 했는데 장부책을 만들어놓고 임의의 시간에 부품을 내갈 수 있었다. 가격을 적은 뒤에 가져간 사람의 사인만 있으면 두 집에서 다 인정하는 걸로 했고 나진시 안의 여러 기업소들에서는 돈이 다 떨어지면 먼저 돈을 넣어두고 부품의 가격을 누계해내서 빼내는 방법을 그때부터 쓰기 시작했었다.
넣은 돈을 다 썼을 때 영수증을 내주었다. 거래하는 업체들에서는 좋은 반응을 보여주었는데 돈을 먼저 내고 (바로 종이돈이었는데 부품을 사는데 필요한 적은 돈을 종이돈으로 지불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상태여서 일반적으로 2천이상 정도의 종이돈을 가져오군 했었다.) 후에 필요한 부품을 임의의 시간에 가져가면 많은 번거로움을 피면할 수 있었던 것이 그때의 사정이라면 사정이겠다.
그러나 외상은 없었다. 그렇게 장부 책은 하나 둘 늘게 되어 거래 업체들마다 다 한책씩 있게 되었으므로 나중에 수십 권이 되었다. 현금을 받는 다른 업체와 회사들과는 다른 풍경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었고 그렇다고 종이돈만 받는 것이 아니고 현금도 많이 받아들였다.
특히 지대밖의 사람들은 현금으로밖에 살 수 없었다. 지대밖의 종이돈은 지대 안에서 사용할 수는 있었지만 국내 기업사이에만 국한되어 있었기에 우리 회사와 같은 단독 기업은 받을 수 없었던것이다.
장마철에 비가 많이 내리지 않은 것을 보충하기라도 하듯이 이해 겨울에 눈이 퍼그나 많이 내렸다. 세찬 바람 덕에 눈은 대부분 날려가고 불과 하루밤만 자고 나면 길이 틔어지는 것이다. 버스는 계속 달릴 수 있었고 국경도 눈때문에 아직까지는 막히지 않았다. 제일 큰 우환거리라면 대반령과 저술령이었는데 양국에서 눈치기를 잘해주어서 가까스로 통행이 보장되고 있는터이다. 회사 구내에서 겨울철의 눈치기를 종업원들과 같이 많이 해보았었다.
대기실 주체 건물 옆에 임시 건물로 우리의 침실을 지었는데 온돌방 세개가 나왔다. 안화동 회사건물 중에서 원래의 창고장 사무실을 내어 침대 두개를 놓고 숙모와 외숙모가 침실로 썼는데 날씨가 추워 더는 쓰지 못하게 되었다.
전기 스팀마저 사용하지 못하는 데야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병을 얻게 된다. 남자들이 전부 아랫집의 방에 널려 자고 원래의 온돌 침실을 두 여자에게 주었다. 일은 윗집에서, 식사도 윗집에서 했고 잠은 아랫집에서 잔다.그때부터 윗집, 아랫집이란 말도 생겨난거다.
대기실도 역시 안화동 구역이었기에 다르게 이름지어 부르기도 곤난했다.
유난히 추위를 무서워하는 숙모는 아랫집에서 방 하나를 내어 거기서 버스 수익금을 받아들였으며 그 방에 임시로 전화도 하나 놓았는데 역시 윗집 것과 같은 수동식 교환전화였고 경비실 겸용으로 썼다.
교환을 통해야만 통화가 가능한 그 전화는 불편하기 그지없었는데 교환원들의 불친절한 말투에다가 정전 때면 하루 종일 통하지 않아서 차로 직접 찾아갔다오는 경우도 있었으므로 일능율이 어떠했는가를 상상해도 알 수 있으리라.
체신 운영국에서는 윗집 전화를 여객 수송회사 경비실, 아랫집 전화를 여객 수송회사 대기실이라고 했고 잘못 걸려오는 전화도 무수히 많아서 언젠가는 자동전화를 놓아야 한다는 생각도 했지만 로따는 비용때문에 결심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듯 했다.
공사 현장에 때로는 여러 부문의 책임자들도 나타났다. 책임자들을 중국에서는 링또우(領導)라고 불렀는데 한자를 음역으로 《령도》라고 우리가 많이 써왔기에 원정에서나 나진에서도 우리 습관대로 《령도》라고 곧잘 불렀다.
령도들이 오면 목적 있게 오는 것인데 처음엔 현장을 돌아보는 것처럼 꾸미다가 나중에 시멘트 한 지대(마대), 슬레이트 몇장, 벽돌 한 달구지 하면서 찾아온 진짜 용의를 말한다.
“령도들이 우리 회사 건설에 필요한 물자를 가져가는 것은 투자자들의 돈을 요구하는 것과 같은데 나는 그런 사람한테 령도자격이 없다고 보오. 자리를 내놓아야겠소.”
로따는 농담을 하면서도 고약한 고집에 꺾여 요구하는 물건을 내주었다. 령도한테 잘 보이면 사업에 많은 도움이 된다. 잘 보이더라도 오늘 필요한 물자가 모자라는 정도로 적다고 생각되면 절대로 주지 않았다. 그러면 령도들은 안타까이
“야-아! 야-아!”
만 연발하다가 물러가군 했었다.
알고보니 물자가 예산보다 더 많이 수요되는 것은 령도들이 퍼런 대낮에 날강도 식으로 많이 채가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비싼 부품에다가 연유를 마구잡이로 끌어가는 어떤 령도들을 그런 식으로 평가하고 싶은 것이 내 진심일뿐이다.
어느 때인가 로따는 매달 그렇게 나가는 돈이 최고로 인민폐 4천원이상이라 했다. 그 돈이면 내화 10만이상에 가는 돈인데 그네들한테는 천문적인 수자라고 할 수 있는 가치의 물자를 그런 식으로 가져가는 행위를 나의 인식으로는 그렇게밖에 인정할 수 없었던것이다.
마음에 우러나서 지원을 할 때가 있다.
초창기 때에는 회사의 발전을 위해 많은 지원을 하지 못했지만 후일 새 원정 종합검사청사와 나진의 사적관 건설 때 2천불 이상의 지원도 서슴지 않고 했었다.
마음에 내켜서 한다기보다 어느정도 강요를 받는다는 느낌이 더 적절한 지도 모를 그런 지원도 통쾌하게 할 수 있었던 로따는 처음부터 자그마한 물자의 손실을 지원하는 것이라고 좋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령도들중에 일부 사람들은 이미 친한 관계로 되어서 허물할 사이가 아니었으므로 놀러 다니고 싶을 정도로 가까운 몇명이 있었는데 친구를 한번 도와주는 셈치는 지도 모르겠다. 다만 정책때문에 개별적으로 만나는 일이 극히 드물뿐이다.
바로 옆에 시내가 흘렀으므로 물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작업 중에 자꾸 얼어들었고 그렇게 지은 집이 견고할는 지는 귀신이나 알 노릇이다.
콘크리트 기둥을 세우고 나서 남산 호텔옆의 노천 극장 하나를 허물면서 나온 트레스도 구해왔으며 다른데서 더러 구해서 트레스를 올릴 모든 재료가 준비되었다. 크레인 차를 빌어 트레스를 올리고나서 천정 작업을 할 때 11월달은 다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로따가 소개해준 크레인 기사 이영감을 알게 되었고 크레인 소속인 57호 지휘부(지금도 무슨 부문인지 모른다.)의 소장동지도 알게 되었다. 후일 유리부리는 작업과 기타 크레인 차가 필요한 작업을 할 때마다 차영감과 함께 57호 지휘부에 갔고 외국인을 들여놓지 않았기에 차영감이 소장동지를 찾아 의논한 후 크레인 차를 빌려다 쓰군 했다. 구소련의 《마즈》차에다 크레인을 장착해 놓은 거였는데 20t급이었고 이영감이 그 차를 30년동안 운전해 왔고 낡았지만 그런대로 쓸만했다.
안화동 회사건물의《ㄷ》자모양 트인 곳이 남동으로 향해있는데 구내에 들어가면서 오른쪽은 경비실에다가 수리반의 작업실로 쓰고있었고 왼쪽은 매장과 창고로 썼으며 정면 청사는 왼쪽끝이 침실이고 가운데가 사무실 여러개로 된 나머지 오른쪽 끝방이 회의실이었다.
침실 옆의 방은 창고장 실이었는데 여자 두 명이 침실로 써온지 몇달 되었고 그 옆의 사장실 안방은 새로 온 김위홍, 남설화 부부의 침실로 만들었다. 난방이 없어 유난히 추운 방이었지만 침실이 부족했기에 위홍이네 부부가 와서부터 고역을 치르는 판이었다.
위홍이는 로따 누님의 아들이다. 며칠전 내가 출국수속을 다 했고 두명이 함께 나와서 영철이의 일을 더러 맡게 되었다. 연유와 윤활유관리를 위홍이가 하게 되었고 매점의 판매원으로 설화가 혼자 볼수도 있었으므로 영철이의 일은 이제 창고종합관리만 남았을뿐이었다.
원래의 회의실을 샤시 작업장으로 만들었다. 몇 명의 종업원들을 더 모집하고 거기에 단련대에서 돌아온 전은선과 정비때문에 세워둔 버스의 운전수, 차장들로 늄창조(샤시 작업반)가 성립되고 임장송이 반장을 맡게 되었다.
북서풍을 막아주는 벽에 의지해 수리반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리였지만 대형 창을 만들거나 할 때에는 밖에서 작업했고 실내 작업도 밖에서 하는거나 마찬가지의 추위를 감내해야 했으므로 두터운 겨울옷을 입고있어 행동이 굼뜬데다가 처음 손대는 일이어서 서툴기만 했다.
우리 대기실의 창문 작업을 먼저 한 것이 오히려 누구에게나 다 유리한 일로 되었다. 우선 종업원들이 일에 익숙해졌고 그래서 이미 들어온 주문 작업도 빠른 시간에 품질도 보증할 수 있는 기초를 닦게 되었으므로 회사가 더 큰 경쟁 능력을 갖출 수 있는 계기로 되었다.
당시 나진에 샤시 작업소가 여러집 되었지만 우리가 질 좋은 재료로 만들고 시간과 작업 질을 담보하고 지어 현장에까지 가서 작업해주고 더우기 종이돈을 받았기때문에 많은 일감을 당겨왔고 적지 않은 마진이 남게 될 수 있었던것이다.
그 외에도 작업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운전 경력이 있는 버스 기사와 차장들이었기에 회사에서 버스기사와 차장을 수시로 바꿀 수 있는 영활성을 갖게 되었고 그 때문에 회사 내의 종업원들 사이에도 일정한 경쟁력이 발생하여 노동 적극성을 높이는데도 유리하게 되었다.
버스운행에 나가게 되면 도급하는 것과 비슷했기에 생활비가 고정적인 늄창조에 있는 것보다 더 유혹적이었다. 승객이 많았던 그 당시에 계획을 완성(차마다 정원에 따라 계획에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하기는 식은죽 먹기였고 적어도 늄창 조의 두배 정도 되는 생활비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종업원들사이에 버스를 타다가(버스 운전을 하거나 차장으로 버스 운행에 나가는 일을 가리킨다.) 늄창조에 가는 사람을 이상한 눈으로 보았고 지어는
“단련대에 가서 혁명화를 한다.”
고까지 말이 돌기도 했다.
로따가 그 때문에 종업원 회의를 열고 회사 내에서 쉬쉬한 말을 나르지 말라고 경고한 뒤에야 시비없이 각자 맡겨진 일을 하게 되었고 후일 운전수와 차장들은 거의 다 샤시 작업을 할 수 있게 되어 인원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정도까지 이르렀고 어떤 자는 유리베는 기능공으로, 또 어떤 자는 재료 절단 기능공으로 독립적으로 일할 수 있는 수준급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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