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파도 사건 후 외삼촌이 처음 경험 부족으로 사고 아닌 사고를 친 적이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에야 입국 도장을 찍지 않은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것도 부부가 함께. 지난해 나진에 나와 있던 외숙모도 오래도록 나오지 않아서 깜빡한 모양이었다.
숙모가 지난해 한 달 동안 입국 도장을 찍지 않았을 때 매일 2천의 벌금이 나온다는 걸 알았었다. 그때의 벌금으로 말하면 조선 원으로 무려 6만 원인데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기억에 안 남았다. 2월 말에 위홍이가 7일간의 벌금 문제를 휘발유 20킬로로 마무리한 적이 있다. 위홍이와 휘발유 값을 내라는 말을 하지 않던 이모가 주방에 들어오면서 다짜고짜로 말했다.
“오빠네 벌금을 내야겠소!”
두 사람이 다해서 규정상 거의 10만에 가까운 벌금인데 줄타기를 해서 만 원으로 해결될 수 있게 만들었다고 덧붙이면서 자체로 부담하라는 거였다. 외삼촌 내외는 아무 말도 없었다. 기분이 엉망일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이 어떻게 해결되었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외삼촌은 잡일을 했었다. 하루는 내가 변소로 나가는 길에 벽돌을 펴는 그의 일을 도와줬었다.
“넌 자존심 없니? 여기 와서 일하는 게 자존심 상하지 않나?”
그렇게 묻는 외삼촌에게 내가 반문했었다.
“내게 자존심이 있었으면 좋겠소?”
“글쎄, 나는 자존심 상해 죽겠다. 300명도 넘는 사람을 다루던 것이 지금 이런 일 한다는 게… 쯧쯧!”
“자존심은 세울 때가 있어야 한다고 보오. 필요 없는 자존심은 버리고. 그렇지 않소?”
“네 말이 맞다.”
그러던 외삼촌이 선봉 탐사대의 유리를 베여 주다가 뻰지를 잃어버린 적이 있다. 마침 내가 옆에 있었고 중국어로 어찌했으면 좋을지 나에게 물어 왔다. 탐사대의 부기와는 잘 아는 사이이고 그 당시 탐사대의 사람들밖에 없었던 연고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들 중에 가져간 사람이 있으니 유리를 주지 마오.”
그러고 나서 탐사대 사람들에게
“당신들 중에 뻰지 가진 사람이 있소. 내놓기 전에 유리를 가져 갈려니 생각 마시오.”
하고 말했다.
몇 장 안 되는 유리를 7~8명이 가지러 왔고 이미 돈을 물었다. 규격에 따라 가격을 계산해서 돈을 다 받은 후에 베어 주었는데 탐사대 사람들이 그 장소에서 맴돌다가 외삼촌이 주의하지 않는 틈에 도둑질한 것은 뻔한 일이었으나 마구 수색해 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부기의 입장이 곤란하게 되었다. 부기가 자기 종업원들에게 내놓으라고 한참 소리 지르다가 약간 떨어져 있는 상점에 가서 뻰지 하나를 사 왔는데 그것을 받고 유리를 줄 때까지 내가 그 장소에 있었고 도둑 당했던 뻰지는 후일 밤 경비가 유리 베는 테이블 옆에 무져놓은 슬레이트 틈에서 찾아내었었다. 휘발유 탱크를 넣은 지하실 위에서 유리를 베여 주었고 자리가 없어 그 주변에 슬레이트와 오일 철통들을 쌓아두고 있었다.
이장근이 해고된 후에 부비서였던 박동혁이 다시 운전수 반장을 맡았다. 순번제를 할 때 기사 중에서 유일하게 반대하던 사람이었고 회사 안에서의 하차 작업을 포함한 모든 일 중에 버스 운전과 회의를 내놓고는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순번제가 어떻든 언제나 제일 먼저 버스를 회사 주유소에 갖다 대였다. 러시아 유조차가 어쩌다 나온 후 버스가 다시 노선 운행을 시작했고 박동혁은 예나 다름없이 습관대로 제일 먼저 주유소에 나타났다.
술 먹지 않는 것과 차 정비기능도 좋았으나 너무 일찍 굳은 잠에 빠져 있는 우리들을 깨워 놓았고 손님들과 다툼질도 잘 하고 군대들을 잘 태워주지 않았다. 지난해 관곡 정류소에 거의 도착할 대 멀리서부터 승객 전부가 군대들인 것을 보고 정류소를 지나쳐 버리려고 했었는데 군대 한 명이 손에 쥐고 있던 굵직한 막대기를 들이밀어 윈도 글라스가 박살난 적 있다. 당장 똑같은 걸로 맞출 수 없는 형편에서 평면 유리를 두 조각 맞추어 넣고 다시 운행에 나갔었다.
또 한 번은 지난해 단오날에 나진에 왔던 선봉 사람들을 거의 2백 명이나 실은 적이 있었는데 박동혁의 말대로만 되면 단 1회에 6천 원을 벌 수 있었지만 관곡 고개를 거의 올라갈 때 액슬 기어가 다 닳아버리는 고장을 냈었다. 어쨌든 불가사의한 일만 빚어내는 인간이라 할 수 있었다. 아침 일찍 나가면 장마당 정류소 쪽에 선봉에 가는 사람이 얼마 안 되었고 차장이 타지 않았는데도 자기 절로 그 손님들을 싣고 선봉에 가버린다.
아침에는 선봉에서 나진 쪽으로 오는 사람들이 더 많았고 그 손님들을 싣느라고 어떤 땐 선봉 운수대에서 나오기 전에 빈차로 선봉에 가는데 그걸 두고 《날아간다》고들 했었다. 손님을 뺏기운 선봉 쪽의 아우성이 높아갔고 우리는 우리대로 하루에도 몇 번씩 버스가 날아다니는 걸로 손실을 보고 있었지만 차를 따라다니지 않는 이상 말리지 못했고 회의 때마다 날아다니는 일을 극력 피하라고 하는 데도 기사와 차장들이 날아다니면서 챙기는 돈으로 유혹을 물리칠 수 없는 지 거의 매일 발생되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오전 중에는 나진으로 오는 사람이 많고 오후에는 선봉으로 가는 사람이 많았기에 날아다니는 일을 피면하기 어려워 저녁 늦은 시간에 선봉에서 빈차로 돌아오는 경우도 심심찮게 많아서 묵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처럼 승객이 많던 현상을 요즘 와서는 거의 볼 수 없게 된 형편을 분석해 보면 한 가지 원인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개인 장사를 철저히 막아 버리려는 결심을 많은 사람을 풀어놓아 단속하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었는데 승객 중 장사꾼이 적어지면 사실상 버스 운행의 의의가 없을 정도로 되어버린다.
창주의 222호를 팔았는데 정비에 들어간 넉 대를 제외하면 여섯 대밖에 나가지 않는 데도 하루에 2회 운행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지나해에는 회마다 70~80명 지어는 거의 백 명이던 것이 지금은 50명이면 잘 타 주는 형편이었다. 그럼에도 로따는 나머지 넉 대를 잘 정비하여 6월부터는 열대가 다 나갈 수 있게 만들라고 했다.
보험비를 5월 말이 다 되어가도록 물어주지 않았으므로 나는 자꾸 재촉했다. 그러다가 27일 토요일 날에 로따가 생일을 쇠게 되었다. 종업원들은 간단한 인사로 사람마다 나진 소주 한 병이 아니면 중국산 맥주 두어 병씩 들고 왔었다. 술 마시지 않는 로따는 반갑게 받았으나 저녁에 식사를 마치고 난 뒤 욕설을 퍼붓는 거였다.
“차장 간나들은 수익금에서 떼 낸 돈으로 술을 사 왔을 거란 말이야! 정말 더럽다야!”
생일을 쇠는 일은 이미 3월 초와 며칠 전에 한 번씩 있었었다. 장송이 음력으로, 설화가 양력으로 생일이 다 3월 초이고 며칠 차이였기에 중간 날짜에 두 사람의 생일을 쇠어 주고 얼마 전에는 위홍의 생일을 쇠어 주었는데 그날 비비를 잡았던 것이다. 이모는 4월에 집에 들어가서 생일을 쇠었었다.
29일 월요일에 로따 부부가 또 갑자기 귀국했다. 처가에 일이 있어 영철이도 함께 떠났는데 이모는 처음으로 나한테 금고 키를 맡기고 갔었다. 여객수입과 매점의 수입을 챙겨 두어야 했고 도장도 관리하고 은행에도 뻔질나게 다녀야 했다. 남연숙과 춘화가 업무에 능란했기에 현금 관리만 잘하면 되었다.
오후에 남연숙을 태우고 은행에 가면서 검차 신청서에 도장 찍는 일을 말해 주었다. 함께 보험회사의 담당 지도원을 찾아가서 보험비를 후에 물기로 하고 도장을 먼저 찍을 수 있게 하려는 거였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이제 이틀 시간밖에 남지 않았는데 다음 달로 미루면 규정상 그 다음 달에 검차 받게 되므로 차가 한 달 동안 세워져 있어야 한다. 하루 이틀 차이로 달이 바뀌었지는데 그것 때문에 한 달을 세울 수는 없었고, 차 감독소는 이 문제에서만은 철저했으므로 유일한 방법은 바로 40만 정도 되는 보험비를 무는 것뿐이었다.
어제까지 금고에 백만 넘어 있었다는 이모의 말을 들었으므로 국제전화를 걸어 물어보고 난 뒤에 보험비를 물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저녁에 수익금을 금고에 넣을 때 텅 비여 있는 금고를 보고 적이 놀랐다. 조선 원 백만이면 중국 돈으로 4만이고 미화로 5천 불 되는 돈이다. 바삐 달려나가 막 퇴근하려는 춘화를 불러 세워 물어서야 오전에 무역은행에 입금시켰다는 것을 알았다. 이모는 떠나기 전에 금고를 비워놨던 것이다.
하루의 수익금이 현금으로 10만이 안 되였기에 내일까지 모아도 필요한 보험비의 절반도 안 되었다. 저녁에 국제 전화를 걸려다가 에라, 내일 무역은행에 가서 40만 원 꺼내오고 말지 뭐 하고 생각하고는 이튿날 아침 춘화가 출근하자마자 출금 신청서를 쓰게 하고 데리고 가서 출금하기로 결정했다. 보험비를 종이돈으로 하지 않고 현금으로 했기 때문에 내가 개인적으로 결정지은 이 일로 31일 모따에게 줄 욕을 얻어먹었다.
이튿날, 보험 도장이 찍힌 검차 신청서를 차 감독사에 전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31일 원정까지 마중 와 달라는 로따의 전화를 받았다. 어쩌다가 먼 길에 88호를 운전해 보았는데 그날따라 로따는 물자도 싣지 않고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서 장걸이와 위홍이를 데리고 내가 원정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로따는 오랫동안 집 짓는 일 때문에 집에 가보지 못했다. 나진에 나올 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오늘은 몹시 흥분하고 있었다.
중국 연유 값이 계속 올라가고 러시아의 연유도 많이 내 올 거란다. 연유 값이 오르면 주유소가 잘 될게 뻔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번 길에 연유 창고를 하나 크게 만들고 그 위치를 관곡 쪽의 비파도에 들어가는 길옆에 정하고 싶다는 것과 곁들여 주유소도 하나 더 만들 계획을 세웠다고 했다. 훈춘의 딱 친구 로빠이가 싱가포르로부터 나진항으로 연유를 싼값으로 들여올 수 있게 해주고 필요한 자금도 제공해 준다는 좋은 소식도 들려주었다.
로빠이(老白)는 중국어의 습관으로 부르는 호칭인데 그대로 옮기면 나이 많은 백씨라는 뜻이다. 로따와는 오랜 친구였는데 극심한 자금난에 허덕일 때 도와주었을뿐더러 중국 쪽의 거의 모든 일을 거들어 주었다. 그중에서 교두의 수출품 수속과 외화 환전을 도와준 것 말고도 제일 중요한 상업정보도 보류함이 없이 제공해 주고 있는 터였다. 부동산 회사를 경영하고 있었고 막강한 경제력을 보유하고 있어 외화 암시장을 통제할 수 있었을뿐더러 로따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는 인물이었는데 국내 사업은 물론 해외 관계도 상당히 좋은 편이여서 무슨 사업을 하든지 성공해 내고야 마는 정력적인 사업가이기도 했다. 싱가포르에서 나진까지 한 번에 수천 톤의 연유를 사들이는 장사는 두 집 다 벌 수 있는 장사여서 지금 흥분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첫 고개는 원정과 하여 평 사이에 있다. 지난해 원정 차장을 하면서 어느 하루 창주와 함께 정상 바로 아래의 굽이에서 하마터면 H 그룹의 컨테이너 차와 접촉 사고를 치를 뻔했었다. 그 굽이를 지나 산 아래의 하여평 마을을 바라보면서 보험비 문제를 말했다.
– 너 정신 있니? 사람이 없을 때 너 아무 짓이나 다 하는구나. 돈 문제에 신경 쓰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니? 응? 그런 일일수록 끌어야 한다. 무역 은행은 수수료를 받는다(그건 내가 모르는 일이다). 너 정말 담이 크기로 말이 아니구나. 이제는 은행 돈에도 거리낌 없이 손대는구나. 왜 전화라도 하지 않니? 엉? 이게 무슨 지랄이고 개 짓이야?! 40만이 적은 수야? 정말 개좆같다야, 신경질 나게 노니, 너?
내가 음악을 틀었다. 조수석에 앉았던 로따가 신경질적으로 꺼버렸다.
-왜? 내 말을 안 듣겠다는 거야? 차가 뛰지 못하면 내가 방법이 없을 가봐 그랬나? 시키지 않은 일을 자기 생각대로 하지 말란 말이다!
“내가 잘못했소!”
나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옆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정도였다.
-에씨, 개좆같이! 멀 잘못했다는 거야? 응? 니 어미 씨팔!
중국어에서 가장 더러운 욕을 하고 있었다.
순간, 핸들을 잡은 두 손이 떨렸고 액셀을 밟고 있는 오른쪽 다리가 뻣뻣해 났다. 굽이가 많은 영 길이어서 옆의 로따를 쏘아 볼 수가 없었다.
액셀을 힘껏 밟으면서 오른쪽으로 골짜기 쪽에 차를 통째로 처박아 버릴까 하는 무서운 생각이 순간적으로 뇌리를 쳤다. 그런 의지와는 달리 브레이크 쪽에 발이 옮겨졌고 원래 속도가 빠르지 않던 차가 갑자기 기우뚱하는 바람에 로따의 몸이 앞으로 쏠려졌다. 로따는 과장적으로 머리를 윈도 글라스에 부딪치고는 나를 일별했다.
로따의 큼직하게 생긴 코를 보고 나니 웃음이 나갔다. 룸미러로 뒤 자리의 두 사람을 보았더니 긴장하게 앞의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때까지 오토미션의 차는 아주 천천히 굴러가고 있었고 나는 다시 음악을 틀어 놓았다.
무서운 생각이 일거에 사라진 것은 큼직한 코 때문이었다. 로따의 속셈은 어떻든 그 큼직한 코를 보면 모든 잡념이 없어진다. 저절로 없어지는 게 아니고 월초의 동생 해고 때부터 혼자 궁리해낸 방법이고 거의 한 달간이나 훈련해왔다.
로따의 코는 못생긴 게 아니고 다른 사람 것과 비교해 볼 때 유난히 커서 첫 대면에 깊은 인상을 준다. 그 코를 보면서 양파를 연상했고 저절로 웃음을 웃고는 로따에게서 오는 스트레스를 물리칠 수 있는 정도로 되어 있었다. 이미 여러 번 훈련을 거쳤기 때문에 이번에 큰 효험을 볼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여러 가지 생각을 많이 할 수 없는 때에 자신의 정서를 조절할 수 있는 이 방법을 익혀 두었기에 오늘 같이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위험한 시각에 써먹을 수 있었다.
참으로 아슬아슬한 순간을 겪었고 하여평 고개를 지나 청학 고개를 넘고 저술령을 지나서야 침묵을 깨고 로따가 말했다.
“넌 내일 쯤에 들어가라. 아마 유조차를 몰고 가야 할 거다. 디젤 한 차를 실어 와야 한다.”
선봉 수금소에서는 로따가 얼굴을 보이기만 하면 도로세를 받지 않는다. 출국 첫날에 영철이한테서 들었고 나도 지금은 도로세를 내지 않고 다닌다. 대신 담배와 술을 사다 주고 배터리도 사다 주었는데 이제는 욕심이 커져 값이 비싼 쪽으로 사다 달라고 청들고 있었다.
아직은 해가 걸려 있는 오후 시간이었는데 수금소에 도착하고 보니 군복 입은 사람이 누군가를 정신없이 욕해대고 있었다. 수금소는 도로세를 받는 역할을 했을뿐더러 청학 초소처럼 보위부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검열하는 장소이기도 했는데 그것은 매일이 아니고 드문 이 나와서 하는 검열이고 오늘은 웬 사람이 걸려든 것 같다.
“이 빌어먹을 쌍 개간 나야! 좀 깨끗이 쓸어라!”
수금소 주변을 쓸고 있는 웬 노친의 등 뒤에 대고 욕한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아무리 규정 위반이라도 어찌 연장자에게 상욕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나진에서 나는 무수히 목격했다. 잠깐 돌아서서 이쪽을 곁눈질하는 노친의 얼굴에 눈물이 맺혀 있는 걸 보았고 수금소 사람들과 인사 수작을 끝내는 로따의 눈짓이 앞을 가리키자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며칠 전에 정화를 욕하는 보위부 담당 지도원인 강순주의 욕을 침실 복도에서 들어 보았다.
“야! 정화! 이 쌍 개간 나야, 빌어먹을! 내 말 안 듣게?”
순주가 간 다음 물어보았더니 늄 재료로 초상화 틀을 만들어 달라는 걸 못해 준다고 해서 욕을 먹었다고 했다. 강순주의 입장에서 로따의 구명 은인이고 로따에게 얘기 한마디 곱게 하면 그냥 만들어줄 수도 있는 거였지만 그는 그렇게 안 하고 정화를 닥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내가 불끈 쥔 주먹을 겨우 풀면서 눈을 지릅떠 보았더니 강순주는 긴 말없이 도망쳐 버렸었다.
로따가 공짜 공사를 막으려고 결심한 뒤로 세포 비서와 정화는 늘 《주문》을 받았고 로따는 막부득이한 일이 아니면 절대로 해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짖꾿은 사람들의 주문은 그칠 새 없었고 세포 비서와 정화는 그 입에 담지 못할 상욕을 거의 매일 뒷덜미에 달고 다녔다.
어쨌든 오늘은 욕과 인연이 있는 하루였다. 로따의 큰 코와 음악은 나를 욕에서 벗어나게 했고 선봉부터 관곡까지의 아스팔트 길에서는 신이 나는 드라이브도 했다.
욕은 일을 잘하든 못하든 어김없이 찾아왔고 나는 반드시 면역이 되어야 했다. 누워 있는 나에게 욕지거리가 떨어져도 자장가로 들어줄 수 있고 서있는 나에게 욕하면 노래처럼 들어주면 되는 일 가지고 깊이 생각해볼 건 없었다.
일 년 동안에 생각할 만큼 다 생각했고 내가 없어지면 로따에게 욕할 사람이 없어져 어쩌지 하고 오히려 내가 로따를 걱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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