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진을 다니는 외국인은 대부분이 중국 사람이었고 특별 비준이 없이는 초청장이 떨어지지 않았기에 이 달 나진에 다니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몇 번을 원정에 갔었는데 갈 적마다 한적했고 지난해 원정 국경무역시장이 문을 닫았을 때보다도 더 한적해 보였다. 

휘발유는 먼저 돈을 받고 전표를 주었는데 그 전표로 쓸만큼 조금씩 가져가거나 한꺼번에 가져갔는데 구매자들 대부분이 종이돈을 내고 전표를 받은 지대 안의 기업소, 농장과 군대들이었다. 지하 탱크에 있는 기름 수량보다 나간 전표에 적혀 있는 숫자가 더 많았기에 휘발유는 언제나 딸렸었다. 

우리 버스에 쓰게 남겨 두는 휘발유는 많아서 2톤 정도밖에 안되었는데 그것은 또한 괜찮은 인물들이 오면 야금야금 덜어 주어 버스는 항상 휘발유가 딸리는 상태이고 그때마다 나는 유조차로 나진 연유 상사 혹은 선봉 연유 상사에 가서 비상용으로 몇 톤씩 사오 군 했었다. 

요즘은 러시아 휘발유가 연속 네 번 50톤 이상이 왔는데도 불구하고 딸리고 있었고 오늘은 다섯 번째로 오는 휘발유차를 마중하러 나는 원정에 가게 되었다. 만일을 대비해 빵을 몇 개 갖고 갔다. 1년 넘어 다니면서 점심밥을 얼마나 굶었는지 모른다. 오후 첫 시간에 수속이 끝나 나진에 대인다 해도 네시가 넘어서 밥을 먹을 수 있었기에 결국 저녁 식사나 진배 없었고, 식구들이 여섯 시쯤에 식사할 때 끼워들지 않고 여덟 시쯤에 한끼 더 먹으려고 하다가 잊고 먹지 않기가 십상이었다. 

88호에 앉은 채 원정 검사장 밖에서 점심때까지 기다렸으나 두만강 건너 권하 교두에 그 특징적인 러시아 차가 나타나 주지 않았다. 

요즘 다니는 차는 림이라 부르는 기사가 몰고 다녔다. 원래 12톤 싣는 카마스 견인차는 베쨔와 위쨔라 부르는 두 러시아인이 번갈아 몰고 다녔는데 번마다 인민폐로 팁 200원씩 주었었다. 그들 두 사람의 중국 비자 유효 기일이 지났고 러, 조 두 나라도 역시 무비자여서 초청장으로만 다닐 수 있었다. 

오늘 같이 오전에 도착한다던 차가 오후에 도착할 때가 가끔씩은 있었지만 오늘은 웬 일인지 너무 늦다. 다른 때 같으면 점심 시간에라도 차가 권하 교두에 도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오늘은 점심 시간 후 이슥해서도 나타나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간은 나에게 참으로 기념할만한 시간이 되었다. 원정 꽃제비들과 식사를 같이 하고 회의하는 시간이 되었던 것이다. 

꽃제비들은 지대에 다니는 차들에 매달려 옷, 담배와 라이터 그리고 먹을 것을 얻어 가졌는데 많을 때는 10명 이상 되었고 적을 때도 6명 정도 되었다. 원정 종합 검사장에서 빠져 나온 차들은 일단 올리막 길에 매달리고 약 500미터 정도 더 가야 오불꼬불한 영 길에 들어서게 된다. 이 올리막 길에서 짐을 만재한 차들은 속도가 느리었는데 꽃제비들은 이 기회에 차에 매달리고 기사에게 물건을 내 놓으라고 소리 친다. 

나이가 17살 이하로 되어 보이는 애들이 벌써부터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추울 때는 길 옆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차를 기다리고 있는다. 기사들이 물건을 주지 않으면 차의 뒤등을 박살내고 콘테이너가 없는 차들에는 피워 두었던 모닥불을 올려 던졌다. 시끄러움을 덜기 위해 어떤 기사들은 집에서 입지 않는 옷가지들을 갖다 주었고 담배와 라이터도 가끔 주고 먹거리도 뿌려 주었다. 어떤 기사들은 전혀 주지 않았는데 꽃제비들은 묘하게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런 기사들의 차는 언제든지 꼭 화를 당하군 했다. 

나진에 다니는 차들의 뒤 등을 보면 거의 다 철망으로 감싸 놓았는데 꽃제비들이 마스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중고차들을 몰고 다니면서 꽃제비들과 면목 익혔고 담배와 라이터를 적지 않게 주고 먹거리도 더러 주면서 우리 차 번호들은 알려 주어 다치지 말라고 얘기해 준 적이 있었다. 애들은 승용차에만은 손을 대지 않았고 매일 괜찮은 소득으로 원정에서 살고 있었는데 가끔씩 나진에 나타나는 때도 있었다. 

초청장 발급이 중단된 때라 다리 양켠은 조용하기만 하다. H그룹 차들이 가끔 오가는 외에 다른 차량들이 거의 없다. 올리막 한쪽켠에 차를 세워 놓고 중국 쪽 권하 교두를 내려다 보고 있는데 꽃제비들이 몰려 왔다. 

“쑤쑤, 이 차가 쑤쑤네 겁니까?” 

“그래, 우리 거다!” 

“원래 승용차였는데 지금 사파리로 됐음다, 예?” 

이놈은 우리 차가 번호를 바꾸어 달고 있는 것까지 알아차릴 정도로 우리 식구들과 친해져 있었다. 

나진에서는 4륜 구동의 찦차를 전부 《사파리》로 부르고 있었다. 꽃제비 중에서 제일 키 작은 애고 키는 내 아들애 만한데 열두 살이라고 했고 로따에게서도 과자 몇 봉지 따위를 어렵지 않게 얻어 가진 적이 있다. 귀엽게 생겼는데 옷차림이 말이 아니고 얼굴에 때 자국이 얼룩져 있었지만 꽤나 영리하다. 

“야, 하나 물어보자. 너네 두령이 누구니?”

“광철임다.” 

“그 새끼 어디 우리 두령이니? 우리 여기에는 두령이란 게 없음다!” 

몰려 온 애들 가운데서 키가 제일 큰 놈이 한마디 했다. 광철이는 요즘 앓아서 나진에 가 있다고 덧붙였다. 

“광철이 너네 물건을 다 빼앗아 혼자 가지니?” 

“그 새끼 제일 크다고 조꼼 우쭐거림다. 다 똑같이 나누어 가지자고 해 놓고 언제나 제가 더 많이 가지자고 해서 우리 다 미워 함다.” 

키 큰 애는 여럿을 둘러보면서 시큰둥해 말하는 것이었다. 

“그램 니가 두령이 되어서 광철일 쫓으렴?” 

“광철이 제일 처음 원정에 오고 후에 우리를 데리고 왔음다. 광철이와 처음에 같이 왔던 애는 겨울에 죽고 광철이도 군대 갈 나이가 되어 인차 집에 가게 될 검다.” 

“내가 보니까 니가 두령 할만하다. 광철이가 간 다음 니가 여기 애들을 잘 이끌어야겠다. 너희들이 우리 회사 차들을 다치지 않고 잘 지켜만 주면 우리 사장 아바이한테 말해서 너희들을 잘 돌봐 주게 하겠다.” 

“야-, 그 사장 아바이 정말 좋습데다!” 

키 작은 애가 탄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로따는 원정 꽃제비들한테 먹거리를 여러 번에 걸쳐 많이 주었었다. 

“그런데 요즘 너희들은 여기 오지 않는 게 좋겠다. 차들이 별로 다니지 않는데 얻을 것도 없잖니?” 

“그러게 말임다. 그 김대중 아바이가 우리 나라를 방문한다는데 그 때문에 우리가 손해보는 검다. 빨리 이 달이 지나 갔으믄 좋겠음다.” 

키 큰 애는 제법 어른스러웠다. 나는 회사의 차 번호들을 일일이 알려줬고 애들은 우리 차를 잘 지켜 주겠다고 약속하고 나서 점심 먹으러 간다며 흩어져 버렸다. 키 작은 애만 떠날 념을 하지 않고 혼자 남았다. 

“야, 여기 어디쯤에 물이 없니?” 

“저 아래에 샘물이 하나 있음다. 우린 다 거기 가서 점심 먹슴다.” 

빵을 가져 왔지만 물을 갖고 오지 않았다. 차안에서 빈 물병 하나를 찾아 들었다. 

“가서 물 좀 떠와야겠다.” 

애는 나를 이끌고 지난해 국제무역시장으로 쓰던 곳의 변두리 쪽으로 갔다. 좋은 샘터였는데 애들은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솥을 걸어 놓고 강냉이 죽을 쑤어 먹을 거라며 키 작은 애가 말해주었다. 

“넌 강냉이 죽을 안 먹니?” 

“강냉이 죽만 먹으면 배가 부르지 않음다.” 

나는 주머니의 비닐 봉투에서 빵 한 개 꺼내 애에게 주었다. 

“쑤쑤, 정말 감사함다. 잘 먹겠음다!” 

애가 이제까지 나를 쫓아다닌 것은 이것때문이라는 걸 이내 알아볼 수 있었다. 얼마 전에도 유조차 마중을 하면서 갖고있던 과자를 조금 덜어 준 적이 있는데 애는 언녕 재미를 붙이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다 먹고 가라. 다른 애들한테 빼앗기겠다.” 

“예!” 

둘이는 샘터에서 빵으로 점심을 에 때웠다. 내가 한 개의 절반도 못 먹었는데 애는 벌써 한 개를 다 먹고 나서 작별 인사를 했다. 

“먼저 가겠음다. 다음 번에 또 갖다 주쇼, 예?” 

“그래, 가서 죽을 더 먹어라.” 

애는 즐거워하며 깡충깡충 뛰어 갔다. 물 한 병을 받아 가지고 차에 돌아오면서 빵 두 개를 더 먹으니 그제야 허기진 배를 조금 달랠 수 있었다. 

오일 사건 후 쟈쟈가 수리된 유조차로 나진에 디젤 5t을 실어 내왔고 회사의 다른 일들도 무난히 풀리고 있었지만 나는 가슴에 항상 고패 치는 이상한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어 밥맛을 잃고 있었고 아침밥을 대충 먹고 다녔다. 그 이상한 느낌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새도 없이 피곤이 억수로 몰려 들어 시트를 제끼자 바람으로 깊은 잠에 곯아 떨어지고 말았다. 

얼마나 잤는지 창문 두드리는 소리에 어렴풋이 깨여났다. 꽃제비 하나가 다리 저켠을 가리키고 있었다. 

애들은 요즘 다니는 특징적인 러시아 유조차를 알고 있었다. 조금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계속 잠을 청했다. 양쪽 수속을 다 마치려면 아직도 시간이 걸려야 했었다. 림이 운전하는 견인차는 일제 미쯔비시였는데 최고 시속이 120키로 되는 성능이 좋은 차였다. 

올리막에 매달리는 차에 헤드라이트로 신호 주고 앞서라고 손짓하면서 시동을 걸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차 마중을 하면 뒤에서 따라 주었는데 특히 콘테이너가 없이 물자를 실은 차들은 반드시 뒤에서 따라야 했다. 길에서 습격조가 많이 출동하는 청학 고개와 저술령에서 도둑 방지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유조차가 관곡 고개에 매달리자 나는 유조차를 추월했다. 먼저 도착하여 부릴 준비를 할 수 있게 만들려는 거였다. 

림의 유조차가 도착한 다음에야 나는 림의 차가 러시아 쪽에서 다른 차를 추월하다가 사고 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운전석 쪽의 백미러가 박살나고 도어도 볼품 없이 일그러진 것이다. 비쯔비시는 일제 중고였는데 운전석 역시 오른쪽에 있었던 것이다. 내가 원정 올리막의 도로 왼켠에서 우회전하는 유조차의 오른쪽을 볼수 없었기 때문에 나진에 도착한 다음 발견할 수 있었고 림은 로따와 사고때문에 늦어졌다는 것을 손짓, 몸짓을 해 가면서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그 사고때문에 림은 그후 다시 나진에 오지 않았는데 유라가 림을 해고했다는 말을 썩 후에야 로따에게서 전해 듣게 되었고 유조차는 웬 영문인지 그때부터 8월 말까지 줄곧 오지 않았다. 도어는 용철이가 수리해 주었고 영철이가 백미러를 한 개 내주었는데 이튿날 오후에 림은 귀로에 올랐다. 

14톤의 휘발유는 그 하루사이에 거의 다 나가고 1톤 가량밖에 남지 않았다. 버스 열대가 4일간 쓸수 있는 양이었는데 안면때문에 수백키로가 나가게 되는 걸 감안하면 앞으로 3일 동안 운행이 보장될 수 있을는 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이날 로따의 로모가 뇌혈전이 와서 입원했다는 소식이 왔으므로 로따는 림의 차로 귀국하게 되었다. 림의 차가 떠난 다음 다음날에 마침내 주유기가 탱크의 기름을 뽑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로따가 없어 안면 기름을 주지않아 조금 잔고가 있는 것까지 더하면 500키로쯤 남았는데 이때면 주유기가 더는 탱크의 기름을 뽑지 못한다. 

탱크는 널찍한 지하에 세개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디젤을 넣는 것이었고 세개 다 밸브가 달려있어 주유기를 쓰지 못하는 때 그 밸브를 틀어 밑바닥에 남은 기름을 뽑아 썼었다. 이미 여러번 작업을 했는데 운전수들끼리 지하에 내려갔고 받아서 올려보내는 걸 차장들이 버스탱크에 넣는 동안 위홍이가 옆에서 확인하군 했었다. 

통풍구가 세개 있었는데 슬레이트를 옆에 많이 쌓아두고 있었고 요즘 새로 만든 뚜껑으로 전부 다 막아놓고 있었다. 아침 식사시간에 주유기가 기름을 뽑아올리지 못한다는 걸 집식구들에게 말해 놓고 어디로 갔는지 위홍이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언제나 중국 시간에 맞춰 일했는데 조선사람들은 자기 시간에 맞춰 일하다보니 아침 식사 때에 주유시간이 겹쳐지게 된다. 이모가 위홍일 찾다 못해 나보고 기름 작업하는 걸 보라고 시켰다. 

마지막으로 김중신의 223호가 넣을 차례였다. 김중신은 변소에 간다고 하면서 지하로 내려가는 걸 피했다. 먼저 들어갔던 운전수 몇 명은 휘발유 가스가 사람을 질식시킨다고 하면서 들어갔다가 얼마 안되어 이내 나오군 했었다. 통풍구 뚜껑을 닫아둔 건 요즘 일이었고 그걸 닫아두었기 때문에 유독가스가 증발하지 못했던거고 기사들은 먼저 뚜껑을 다 열어 놓은 뒤 한참 후에 들어갔고 자주 사람을 갈았었다. 요즘 차 핸들위에 엎디어 배가 아프다면서 줄땀을 흘리던 김중신을 여러번 보아 왔기에 측은한 생각이 들었고 누구도 없는 마당에 내가 내려가기로 작심했다. 

위홍이가 500키로 정도 남았다고 한건 순 거짓말이었다. 내가 그후 짐작해 본데 의하면 그날의 잔고는 많아서 300키로밖에 안되었다. 14톤의 휘발유가 어떻게 나갔는지 정확한 기록과 확인을 하지않는 위홍이었고 주유기가 뽑지 못하는 상태에서의 잔고가 300키로정도 되는 것을 500키로 정도 남았다고 한것은 순 넘겨짚은 말일뿐이었다. 

먼저 들어간 기사들한테는 그래도 시간을 단축할 수 있게 휘발유가 빨리 나와 주었지만 내가 나중에 들어갔을 때는 형편없이 적은 양으로 나왔고 한 바게쯔를 받는데 시간이 무척 걸렸었는데 처음 한 바게쯔를 다 받고 나서 통풍구로 나왔을 때까지도 위홍이와 김중신은 보이지 않았다. 

한 바게쯔가 7키로 정도여서 1회 운행하는데 부족했으므로 적어도 한 바게쯔는 더 받아내야 했다. 조금 쉬고나서 어쩔 수 없이 다시 들어갔다. 휘발유가 졸짝 거리면서 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우두커니 선채로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눈앞의 세계는 칼라가 없는 흑백의 세계였다. 그 흑백세계 멀리서 여자 목소리인 듯한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고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머리에는 온갖 잡념이 다 사라지고 흑백세계 저쪽에서 간간이 

“으-으, 아-아!” 

소리내던 여자가 내 옆으로 다가오고 있는듯 했는데 입에서 물이 흐르고 있고 약간 떨어져 있는데도 물 흐르는 소리는 가까이에서 들리고 있었다. 여자가 캡을 쓴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물 흐르는 소리가 멎었고 그 다음엔 뭐가 어찌되었는지 아무 것도 몰랐다. 

깊은 잠에서 깨어 난 후 나는 내가 모르는 집에 누워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팔에 링게르 주사가 꽂혀 있는 걸 보고 이모가 옆에서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병원에 누워 있다는 걸 알아챘다. 

“니가 깨났구나. 에구 에구, 나는 하나 더 뿌려던지는 줄 알았다.” 

이모는 작은 동생이 죽은 뒤 또 한 사람 더 죽는 줄 알았고 그래서 마음이 한줌 만해 있었던가 싶었다. 내가 정신이 들어 팔다리를 움직여 보이자 그제야 긴 한숨을 내뿜는 것이었다. 눈에서는 고였던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처럼 흘러 내렸다. 내가 이승과 저승을 오락가락 하면서 환영에 시달렸던 얘기를 하자 눈물을 거두고 의아한 두 눈을 더 크게 해가지고 나를 정신없이 들여다 보았다. 

김중신의 담당 차장인 한보경이 지하에 들어간지 이슥해서도 나오지 않는 나를 여러번 불렀으나 응대하지 않으니 늄창조에 달려가 일하는 임씨형제를 불러 내왔다. 김중신이 그때에야 나타나 먼저 내려가서 넘쳐흐르는 휘발유와 서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밸브를 닫아버릴 생각을 잃은 채 나를 안아서 위로 올리 밀었고 위의 사람들이 나를 끄당겨 올려 왔다. 

올라오는 동안 나는 배속의 음식물을 죄다 토해냈다고 한다. 임씨형제는 시멘트 바닥에 누워 있는 나를 구급하러 병원에 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못하고 조선 종업원들과 함께 퀭하니 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밖에 나왔던 이모가 영철이를 불러 차를 대였고 다들 축 늘어져 있는 나를 89호에 싣고 시 인민병원으로 갔다. 

시 병원에서는 내가 외국인의 신분이라는 걸 알고 구급을 거절했다. 외국인을 접수하지 않으며 외국인숙소 안에 있는 의료센터를 찾아가면 받아줄 것이라며 사람을 들여가지 못하게 막더란다.

외국인숙소의 의료센터가 전문 외국인 환자만 상대하는 곳이라는 걸 그날 알았다. 거기서 수입약인 독일제 《덱사》라고 부르는 주사를 맞고 나니 중독 증세가 거짓말처럼 없어졌고 이모와 함께 회사까지 걸어 왔다. 

임씨 형제와 영철이는 입구로 들어오는 나를 문안했지만 위홍이는 경비실 안에 앉아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주방에 들어서니 외삼촌 내외가 문안을 해왔고 건강한 나를 다시 못보게 될 줄 알았다면서 혀를 끌끌 찼다. 이튿날 로따는 중독 사건을 훈춘에서 들었고 들으면서 가슴이 꿈틀했다고 하면서 나를 위로해 주었다. 

종업원들도 다 주방에 모여와 문안했지만 위홍이 부부는 가타부타 아무 말도 없었다. 꼭 마치 모르는 사람을 상대하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날은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 방문을 이틀 앞둔 6월 11일이었다. 생각지도 않은 가스 중독 사건을 경험하고 나서 나는 몸이 더없이 피곤해 짐을 느꼈고 매일 궂은 잠에 빠져 있었다. 

12일, 로따가 나왔는데 다들 로모에 대해 문안했고 종업원들도 더러 와서 문안을 했다. 로따는 종업원들을 볼 때마다 이런 말을 했었다. 

“동무들은 요즘 기분이 둥둥 떠서 좋겠구만.” 

다름 아닌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을 두고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 사람들이 거의 다가 우리 중국에 사는 조선족보다도 통일 의식이 못해 있다는 걸 그때 진정 느끼게 되었는데 오히려 우리가 중국의 홍콩이나 마카오 반환을 예로 들면서 1국 2제의 통일 방식을 선전해 주는 형편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나저나 통일이 되면 나쁠 게 하나도 없다. 그건 중국의 통일 문제를 놓고 봐도 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은 이제 대만 하나가 남았다.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이들이 더러 있지만 통일을 위한 노력은 수십 년 동안 끊어지지 않았다. 

문화적인 교류를 진행하고 서로 친척방문하고 관광하는 데까지는 무난히 이루어진다. 요즘에는 대만의 골수 센터에서 중국의 백혈병 환자에게 당일로 건강한 골수를 보내주어 새 생명을 얻게 하는 감격스런 일도 더러 생기고 있다. 대만의 투자가 많이 유치되고 서로 적대시하던 심리적인 모순이 없어지게 되었다. 그보다도 통일을 바라는 국민의 심리 자질이 많이 제고되어 언제든지 받아들일 수 있게 마음의 준비가 다 되어 있다. 

그런데 안타까운 건 조선사람들은 그런 마음의 준비가 있는 것 같지 않고 더우기는 적대시 적인 심리 모순 정도도 아직 해소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한국인들의 금강산 관광도 어렵게 나마 이루어지긴 했지만 썩 잘 진행되는 것 같이 느껴지지 않고 이산가족 만남도 몇 해에나 한 번씩 이루어지는지 아주 적은 사람들만 만나는 정도다. 

중국의 통일 문제에서 많은 것을 배워 두어야 할 조선 사람들이다. 오랫동안 종업원들과 그 밖의 아는 얼굴들을 많이 상대해 왔지만 통일의 이야기를 나눠보지 못했다는 것이 나진행에서의 제일 큰 유감으로 남아 있다. 

로따의 말처럼 누구나 다 기분이 둥둥 떠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통일보다 더 급한 게 의식주인데 뉘라서 통일을 두고 이러쿵 저러쿵 하겠는가? 

중국은 13억의 먹고 입는 문제를 기본상 해결했지만 조선은 아직도 해결 중에 있다. 생존만을 위해 도둑질과 거짓말하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으로 된 마당에 통일은 너무나도 거창하고 아득한 일일뿐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고 두 정상이 공동 선언을 채택하는 3일간 나는 중독 후유증을 앓고 있었고 매일 흐리터분한 기분 속에서 지내었다. 전기 공급이 잘 되어 TV 방송도 어느 때보다도 잘 볼 수 있었다. 수십만이 나와서 영접하는 평양 시내를 보았고 손에 손잡고 《아리랑》을 부르는 두 정상도 보았다. 이제 우리 배달 겨례가 진정 통일의 참뜻을 이룩하게 될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끼게 하는 3일 간이었다. 

후유증이 심해 더는 나진에 있지 못하게 되었다. 16일 나는 끝내 귀국 길에 오르고야 말았고 20일 간 집에 와서 있게 되었다. 정화의 아버지가 간암으로 새벽에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떠났는데 나는 기분이 엉망이었다. 

며칠 푹 자고 나니 몸이 날듯이 가벼워 졌고 기분도 좋아 졌다. 다음 며칠은 병원에 다니면서 종합 진찰을 받았다. CT도 하고 피검사도 했으며 엑스레이 검사도 받았다. 20년 전 급성 간염으로 앓은 적이 있어 몹시 피곤한 것이 간염이 도진 표현이 아닐까하고 의심했지만 모든 것이 정상으로 나와 있었고 몸이 억수로 피곤한 상태어서 푹 휴식해 두면 된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가슴 위에 쌓였던 묵직한 돌들을 다 들어내는 듯한 기분이 되었다. 

다음 며칠은 지붕을 손질하는 시간이 되었다. 우리 집은 아파트 제일 윗층인 7층이었고 봄에 눈이 녹기 시작한 이래 지붕에 난 틈으로 물이 시냇물처럼 흘러 들었다. 아래 6층으로 셋방을 옮긴지 얼마 안된 동생과 함께 옥상 작업을 3일 만에 끝낼 수 있었다. 7층 옥상까지 아파트 서쪽 벽에 붙어 있는 사다리로 올라가야 했는데 현훈증이 일어 겨우 오르내렸다. 

삯일을 시켰더라면 다른 사람이 일하는 것을 감독만 하면 되었겠는데 3일간 오르내리고 나니 팔다리가 뻣뻣해 났으나 큰 문제를 해결해 놓았으니 마음만은 즐겁기 짝이 없었다. 

그동안 아내한테 전화하려는 생각이 간절해지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나라 통일이 각일각 박두해 오는 때, 그 거대한 공사가 곧 이루어지는 판국에 개인의 자그마한 화해 문제도 못 풀랴 싶었다. 2년 넘어 되는 시간 동안 아내의 마음이 어떻게 변화해 가고 나의 제의에 어떤 반응을 보여 주겠는 지도 몹시 궁금했다. 

공중 전화를 사용했다. 내가 오래 동안 이용했었던 그 전화 번호를 누르면서 가슴의 피가 끓고 벅차 오르는 감을 느꼈다. 

“여보시오, 나 영도요!” 

“예…, 무슨 일임까?” 

“우리도 통일하기요!” 

“통일이라뇨? 멈니까?” 

“다시 합치자는 거요!…” 

“정말 천진하고 유치함다!” 

“뚜, 뚜, 뚜…” 

전화는 벌써 끊어져 있었다. 둘이는 중국어로 대화했고 1분도 걸리지 않았는데 저쪽에서 일방적으로 끊은 거였다. 

아내는 역시 아내였다. 결혼 생활 중에서 늘 느껴왔던 그 서늘한 분위기를 다시 한 번 느꼈고 이제는 사람마저도 서늘한 감을 주어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온몸이 오싹해 나는 거였다. 

첫 번째 가출 뒤로 아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어떤 거리감 같은 것을 나에게 느끼게 했고 상냥한 표정이나 친절한 행동대신 명쾌한 표현이 없는 냉정함을 보여 주었다. 고집불통이고 잘못은 늘 타인의 몫으로 안겨 주는 매서운 기운이 감도는 집에서 나는 더 지내기 어려워 탈출의 꿈을 꾸면서 익혀 갔다. 높은 자존심과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 앞에서 나는 점점 피곤해져 나중에는 결혼 생활에 철저히 지쳐 버리고 말았다. 

남자란 동물은 강한 여자에게는 약한 속물이라는 말이 나의 결혼 생활에 딱 맞는 얘기인가 싶다. 떠돌이로 세상을 빙빙 돌다가 찾아 든 집은 내 집 같지 않았고 아내는 차가운 얼굴로 나를 맞이했었다. 어수선한 집안에 퀭하니 앉아서 참말 헤어져야 하는가 하고 수없이 자기에게 물어 보았었다. 

나의 탈출이 아내한테 그 어떤 영향이라도 주어 둘의 거리감을 줄이고 적극적으로 결혼 생활을 꾸미는데 동조해 주었으면 하는 꿈이 여지없이 짓뭉개 지고 터무니없이 의심까지 하는 사람에게서 사랑은 있으되 존중과 믿음이 결여 하다는 걸 발견한 다음에 나는 계속 미칠 듯이 지겨운 결혼 생활을 유지할 생각이 없어 졌다. 

이러다가 둘 다 피곤하고 지쳐서 더 기막힌 결과가 나올 지도 모른다. 잘못된 결혼이라면 어차피 일찍 헤어지는 쪽이 누구에게나 현명한 선택일 것이었다. 아내의 두 번째 가출은 이혼의 계기가 되어서 우리는 크게 떠들지도 않고 조용히 헤어 졌다. 내가 기어이 이혼하려는 결심과 노력이 아내 마음에 상처되었다면 저주를 받아도 괜찮았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둘의 이중주이기 때문에 손바닥 하나가 박수 소리 내지 못하는 것처럼 다 같이 책임이 큰 것이다. 

나는 나의 책임을 밀어 버리고 싶지 않다. 다만 아내가 나를 저주하더라도 어느 날엔가 나를 이해하고 애를 위해서 간단한 교류 정도까지 할 수 있는 친구 사이로 지낼 수 있기만을 바라는 것뿐이다. 

그러나 아내의 기세는 나의 모든 소박한 염원들을 여지없이 꺾어 놓고 있었다. 내가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계기로, 공동 선언이 채택된 것에 힘입어 다시 합칠 것을 제의한 것이 충동에서 생겨난 것이라 할지라도 아내의 건방진 태도에는 납득이 되지 않았고 나를 전혀 다시 알아보려 하지 않는 아내한테 무한한 유감과 실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중국어로 된 격한 편지가 순식간에 씌어 졌는데 아무런 주저함이 없이 부쳐 보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집안은 당신의 말처럼 개 가족이다. 그러므로 나나 나의 아들은 다 개새끼다. 당신은 그 개새끼가 곱다고 자주 장난감과 옷가지들을 보내 주군 하는데 개새끼한테는 필요 없는 것이므로 이후부턴 삼가하기 바란다. 그러나 나는 당신에게 감사하고 싶다. 왜냐하면 당신이 내가 개로부터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참 행운스럽다. 이제부터는 사람 노릇하게 되었으니… 

대개 이러한 내용이었다. 

《남자가 싫다 하면 같이 못 산다.》, 《아들은 그래도 아버지를 따라야 한다.》는 말들이 어떻게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아내는 이 논리를 가지고 나와의 이혼에 동의했었고 아들애도 밀어 맡겼다. 재산도 대부분 차지했으니 이혼녀로서 챙길 것은 다 챙긴 셈이다. 나한테는 이혼으로 그 혹독한 결혼 생활을 하루 빨리 종말 지어야 하는 것이 급선무여서 재산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개운해 졌다. 애가 혹시 엄마한테 놀러 가더라도 집이 있고 그 외 모든 것이 다 있고 보면 그것도 좋은 일이고 나는 내 능력으로 얼마든지 그보다도 더 훌륭한 가산을 이룩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히 생각했었다. 아내와 통화한 후 나는 잘된 이혼이라는 생각도 해 보았다. 죄 없는 아들애한테 죄 지은 마음을 내놓고 다 잘된 거라고 생각해 보았다. 

피곤한 결혼 생활이 완전히 지쳐버리기 전에 끝나 버렸으니 샤워한 후의 개운한 느낌 같은 것도 없지 않다. 그런데 가슴속에 찬바람이 부는 것처럼 허전해 지고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황량한 벌판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은 왜서 떨쳐 버릴 수 없는 걸까? 아내와 화해하려는 것이 부질없고 덧없는 일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왜서 자꾸 계획하는 걸까? 그래서 사람은 동물과는 다른 모순체라는 걸까? 

하여튼 아내와의 즐겁든 슬프든 겪어 왔던 짧은 사랑을 정리할 때가 인제는 된 것 같았다. 지나간 일은 흘러간 물결과도 같은 것이어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아내의 첫 번째 가출 전까지만 해도 행복했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만으로 나는 마음이 위로가 된다. 이혼이 그녀가 나에게 늘여 놓은 덫이라 할지라도 용서해 주고 싶다. 나한테 깊은 사랑을 쏟기 위해 노력했지만 내가 잘난 척 하면서 외면하고 보답해 주지 못한데 대해 자책감도 없지 않다. 내가 안 좋아서 기우는 짝이 될 바엔 차라리 일찌감치 그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제는 아내를 내 마음에서 영영 지워버릴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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