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열사의 손자다. 이 말은 이제까지 나진에서 숨겨두어 온 말이었다. 중국에서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자랑차게 여길 말이고 조선의 어디 가서든 언제나 떳떳하게 할 수 있는 말을 끝내 하게 되었다.  

연변에 다녀가신 분들은 길 옆에, 산 언덕에 유난히 많은 기념비를 보셨을 것이다. 기념비들마다 《혁명렬사들은 영생불멸하리》 혹은 《혁명렬사기념비》라고 씌여진 글발을 볼 수 있다. 백두산 가이드를 할 때 관광객들에게  

“이것은 항일 투사들을 기념하여 세운 것입니다.”  

하고 얼렁뚱땅 지나버렸었다. 중국 땅에서도 연변에 특별히 많은 그 기념비들에 깃 든 사연, 독자들은 알고나 계시는지?  

연변TV방송국에서 우리말로 된 드라마 하나를 만든 적이 있었다. 조선족 3대 고부간이 함께 사는 열사 가족에 대한 이야기였다. 시할아버지는 중국의 해방전쟁에서 전사하고 시아버지는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衛國-항미하여 조선을 지원하고 집과 나라를 보위하자는 뜻, 한국에서 말하는 6.25사변)전쟁에서 전사했으며 남편은 1979년에 있은 자위반격전(自違反激戰-대베트남전쟁)에 참가했다가 다리 하나를 잃은 불구로 환 고향한다.

3대 고부는 늘 기념비를 찾아가서 청소도 하고 꽃도 얹어 주는데 어느 하루 아내 옆으로 장애자 남편이 군복 차림으로 나타난다. 시할머니와 시어머니는 생과부로 수십 년을 살아오면서 열사의 가족이란 자랑 가득했겠지만 새 세대의 아내로서 열사에 대한 이해가 어떠한지? 드라마는 그나마 다행으로 환고향 한 남편을 맞는 아내와 할머니와 어머니가 눈물로 맞이하는 장면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연변에 열사의 가족이 수없이 많다. 남자가 없는 살림들이 늘어가는 세월 속에 거기에 정비례로 기념비가 늘어만 갔으니 이것은 이상한 현상이 아니다. 드라마에 나왔던 가족과 마찬가지로 우리 집도 바로 그런 가족 중의 하나였다.  

우리 집은 두만강 건너 동만주에 이주한 후 왕청의 육지촌이라고 부르는 시골에서 30년을 살다가 1950년에 훈춘에 이사해 왔다. 왕청에서 살던 식구 중에서 1949년에 네 식구나 죽어서 방대한 가족이 13명으로 줄어든 후 동쪽으로 가면 좋겠다는 무당의 말을 듣고 이사했던 것이다.

할아버지의 형제 중 넷째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래로 형제가 세 명이나 죽었었다. 할아버지 형제는 4남 1녀가 남았는데 나의 할아버지가 맏이였고 다섯째 할아버지는 막둥이로 아버지보다 두 살 연상이었으며 아버지 형제는 아버지 혼자만 남았다. 할아버지와 둘째 할아버지가 징병에 뽑혀갔다가 광복을 맞이한 그 해에 나란히 집에 들어서서 증조모는 기쁨의 눈물을 얼마나 많이 흘렸는지 몰랐다.

이사하기 전에 아직 장가가기 전인 셋째 할아버지가 참군했고 바로 조선에 나가 인민군에 편입되었다. 나의 막내 삼촌이 아직 태여 나지 않았을 때 할아버지와 둘째 할아버지도 참군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이사한지 2년 되던 1952년의 일이었다.  

한창 38선의 전쟁이 대치상태인 시기였고 군대에 가지 못해 안달을 떨던 할아버지는 마침내 소원 성취했던 것이다. 최전방으로 떠나면서 증조모를 잘 모실 것과 이제 태어 날 삼촌을 잘 키워달라는 부탁을 남기셨다고 한다. 아버지가 겨우 열 살밖에 안 되던 해였다. 그 가혹한 전쟁마당에서도 가끔 편지를 보내왔고 집에서는 삼촌이 태여 난 소식을 알리기도 하면서 다시 아들을 본 기쁨을 안고 할아버지는 그 해는 무사히 넘기었다.  

집에서는 농망기에 남자 손이 없어 큰 걱정이었다. 가을걷이 때 소달구지에 벼를 가득 싣고 오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증조모는 넉두리를 하다가 며느리들을 불러 겨우 다시 싣고 돌아 왔다고 한다. 쪼들린 생활에다가 새 남편까지 병으로 몸져누워 계셔서 남자 없는 가정을 이끌어 가는 것이 증조모에게는 더없이 힘에 부친 일이었을 거였다.

그러다가 비보를 접하게 되었다. 1953년 1월 31일에 조부가 전사했으며 묘지는 금강산 부근의 월비산과 351고지 사이의 까치봉에 두고 혁명 열사로 추인 되여 열사증과 무휼금을 받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처자가 있었던 둘째 할아버지가 먼저 돌아오고 몇해 후에 셋째 할아버지도 돌아 오셨다.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였다.

열사 대우를 받아 증조모 앞으로 생활비가 나오기 시작했고 할머니와 살아 돌아온 두 형제도 취직하게 되어서 농민 신세를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썩 후에 아버지는 대학에 갈 수 있는 행운이 차례졌으나 중국어를 거의 몰랐기 때문에 1년 후 중퇴했다. 그때 아버지와 같이 열사 대우로 대학에 갔던 많은 사람 중 조선족으로는 두 명만 공부를 다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후에는 조부 뒤를 이어 참군하게 되었다.  

할머니는 생전에 나에게 가족의 불행에 대해 종래로 얘기 한 적이 없었다. 두 삼촌과 고모 한 명이 있었다는 얘기도 아버지한테서 들은 터이다. 들은 것이 있다면 조선 전쟁(할머니는 그렇게 말했었다.) 후에 기념비가 많이 세워졌다는 것뿐이다.  

서른 두 살에 과부로 되어 숱한 시집식구들을 거두어 온 할머니, 밥상에 밥을 올려놓고 나서 누룽지로 끼니 드신 할머니, 14세에 우리 집에 민며느리로 들어 온 할머니에게는 친정에 대한 기억도 까마득한 일이였다. 그 고독한 할머니한테 유일한 마음의 안식처가 바로 기념비였다. 마음의 고통을 묵새긴 채 할아버지에게 제사상도 차려 올리지 못하는 심정을 그 누가 이해해 주었으랴?

기념비들마다 과부들의 손에 깨끗이 청소되고 정갈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 점점 뜸해지는 발길로 산뜻한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나의 기억에 소학교 다닐 때까지 만도 기념비에 꽃을 얹어주던 일이 남아있다. 지금은 관리를 어떻게 하는지를 모르겠고 나는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감정으로 기념비를 대하게 되었다.

만일 50년 전의 그같은 전쟁이 재발한다고 할 때 조부네들처럼 떳떳하고 용감하게 전쟁마당으로 달려 갈 우리 민족의 동포가 도대체 몇 명이나 될 것인가? 자기 형제를 참살하는 그 마당으로 구경 누가 달려 갈 것인가?

감정상으로 너무나도 받아 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동족상잔의 뼈저린 아픔은 여기 조선족에게도 참혹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기념비에 이름을 남기고 열사증을 받아 안은들 가족에게 남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고 이 민족에게 남는 것은 또 무엇인가?  

우리 이웃으로 살던 할머니 한 분은 열사증을 받은 지 45년 만에 캐나다에서 날아온 남편과 만났다. 전쟁에서 죽었고 그래서 열사증을 받아 안고 수십 년을 온갖 고생을 다 하면서 살아 온 그 할머니는 살아 돌아오는 남편을 만나리라고 어찌 꿈에선들 생각이나 했으랴?  

역사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큰 장난을 쳤다. 그저 그 장난이 결코 우리 민족이 화합할 수 있는 길에 장애로 나타나 주지 말아 주었으면 하는 바램만이 어슬프게 남아 있을 뿐이다. 내가 이 같은 마음의 상처를 갖고 있다는 걸 종업원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우연하게 세포 비서한테 말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던 것이다.  

11월이 막 지나가는 어느 날 아침이었다. 선봉에서 해안선을 따라 동쪽으로 가노라면 이 나라 동쪽 끝인 우암(牛岩-일명 서수라라고도 부름)에 도착 할수 있다. 나진에서는 거의 50키로가 되는 거리다. 로따가 운수 관리국으로부터 나진-우암노선을 허락 받고 오늘 노선 답사를 하게 되었다.  

선봉을 지나 웅상이 첫역이고 다음이 굴포였다. 웅상을 지나 자그마한 고개 하나를 넘으니 넓은 담수호가 나타났는데 이름이 만포였다. 고개 밑의 갈림길에서 만포의 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두만강 쪽에 갈 수 있고 원정으로도 갈 수 있다.

만포의 북쪽과 동쪽에 조산과 부포가 있고 만포의 남쪽에 새로 개척하려는 운행노선이 있었다. 굴포에 도착하니 부포, 조산, 두만강 쪽으로 갈 수 있는 또다른 곧은 도로가 보였다. 전망적으로 국제공항이 건설 될 자리였다. 계속 가다가 도로 옆의 초가를 보면서 로따가 말해 주었다.  

“여기에 사장의 외갓집과 외삼촌 집이 있다. ”  

동행자로 221호 기사인 김종형과 차장 채정심 그리고 박동혁과 김성옥이도 버스에 탔었다. 다음 고개 오르기 전의 마을은 서포항이었는데 호수와 바다가 이어진 곳에 놓여진 다리를 건너야 도착 할 수 있었다. 고개 넘어 인가가 없는 비포장 도로를 한참 가니 등대가 있는 마을에 대였는데 그 곳이 우암(서수라)이였다.  

수산사업소 소장과 만났고 오후에 나진에서 출발하여 우암에서 1박을 하고 이튿날 되돌아오는 코스여서 버스를 세워 둘 자리와 기사와 차장이 자는 주인집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남겼다. 광고가 불가능해서 소장이 홍보해 줄 것도 부탁하고  나서 귀로에 올랐다. 박동혁과 김성옥이랑 의논하여 체대가 작은 버스인 217호, 220호와 221호 석대가 윤번으로 운행할 것을 결정했다. 내일 첫 운행에 오늘 우암까지 갔던 221호가 나가고 주인집에 쌀 50키로를 먼저 갖다주기로 했다. 전부가 로따가 착상한 일이고 우리는 따르기만 했을 뿐이었다.  

회사에 도착했을 때 세포비서가 김중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해고 된지 몇달 되는 김중신의 죽음이 우리한테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다른 기업소로 전근하는 수속을 하는 중이고 그 전에는 우리 회사에서 모든 일을 거들어 주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로따가 다시 확인하고 실행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고 점심식사 후에 나더러 세포비서와 남연숙을 태우고 유현에 갔다 오라고 말해두었다.  

김중신은 광수 다음으로 키가 큰 기사였다. 딸 넷을 두고 있었는데 닭공장에서 일 하다가 차영감의 소개로 입사했었다. 여름 내내 앓아서 두 눈이 움푹 꺼져들어가 몰골이 말이 아니었었다. 큰딸이 시집 갈 때 회사에서 부조를 보내 준 적 있고 가끔 내가 집에까지 실어다 준 적이 있는데 마늘 심은 것을 뽑아서 식사 때 먹으라며 한 아름이나 주던 인정 많은 아저씨였다.

성격이 괴팍한 일면도 있어 기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으나 운전만은 기막히게 잘 했다. 정비도 잘 했었다. 중국어를 배운 큰 딸이 원정차장을 하게 해 달라고 청 든 적이 있고 늘 회사경비실에서 밤잠을 자면서 출근을 했었는데 식사는 담당차장이 갖다 주었었다. 후에는 오토바이 한 대를 사서 타고 다녔는데 오일을 잘 조절해 주지 못해 엔진이 고장이 났고 부품을 사다달라고 나한테 부탁한 적이 있었지만 그가 쓰는 휘발유가 어쩐지 버스에서 받아낸 것 같아 끝내 사다주지 않았었다.  

간암 진단은 해고 된 뒤에 받은거 였다. 찬 밥을 먹고 빈속에 술을 그렇게도 즐겨 마시더니 끝내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다. 새벽운동의 패해자라 할 수도 있었다. 욕심이 너무나도 많았던 아저씨는 버스로 유현의 집에 가면서 후창 손님을 싣고 짐 값을 많이 받아 낸다고 고발 되여 시당의 지시로 강제 해고된 것이었다.  

남연숙은 딸 자식을 여러 명을 둔 김중신의 마누라를 걱정하고 있었다. 항구를 지나 유현동에 들어서는 커어브를 돌 때 도로 옆의 비석을 보면서 두 사람에게 말했다.  

“조선에 기념비가 많은 것처럼 연변에도 기념비가 많습니다.”  

어디까지나 우연하게 나온 말 이였다. 처음에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말한 것이였지만 연변의 기념비에 대해 상세히 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열사의 손자라는 것은 닭공장에 도착했을 때 한 말 이였다.  

“영도가 열사 가족인 걸 정말 몰랐소. 거의 2년 동안이나 숨겨 오면서, 비서의 체면도 보아주어야지?”  

세포 비서는 미안한 투로 말했고 남연숙은 경이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룸밀러로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나서  

“크게 자랑할만한 일도 아니걸 가지고 멀 그럽니까?”  

했더니  

“그게 어디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오? 다 비서인 내가 제대로 하지 못한 탓이오.”  

하고 심한 자책감으로 말하는 것 이였다. 비서가 왜 그러는지 나는 아무리 해도 이해되지 않았다.
그 궁금증은 지금도 풀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 날 이후부터 나에 대한 종업원들의 태도가 전에 없이 달라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김중신의 집에 도착 한 후 가족의 요구를 들었다. 집(관)을 만들고 비석을 세워 달라는 거였는데 비서는 총경리와 의논을 해야 한다고 했으며 나는 두 여자와 함께 인사하고 나왔었다. 후일 나무관 하나와 비석을 만들어주고 종업원의 일부가 장례식에 참가했었다.  

평양 강성회사 나진 지사가 수리소 건물을 사겠다고 나섰다. 나는 나의 침실의 물건을 전부 장걸의 방으로 옮겨 진정 이사를 하게 되었다. 강성회사는 든 날부터 수동식 교환전화를 마음대로 썼고 수리소 마당이 매일 방문객들로 북적거렸는데 일단 먼저 들고 후에 돈을 내기로 했던 것 같았다.  

약간의 사고가 났었다. 김봉식 영감이 장작을 훔치다가 로따에게 들켰다. 유리포장을 했던 판자들을 외삼촌과 내가 패서 장작으로 쌓아둔 것을 봉식영감이 가져 가다가 아침 일찍 밖에 나온 로따에게 발견된 것이었다.

김 영감은 중국에서 이주해 간 사람이여서 드문히 중국어 몇 마디 하는 정도였고 운전술과 정비기능이  뛰여나 있어 이제까지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던 어리무던한 영감이었다. 저녁에 로따를 만나 사죄했는데 남수남 다음으로 두 번째로 잘못을 진정으로 빈 사람이다.  

서종호가 김중신이 몰던 223호를 타게 되었다. 하루는 장마당 정류소에서 후진하다가 언제 세워놓았는지 모르는 나진 수산사업소의 일제 승용차를 떠 박았다. 앞 유리가 깨졌고 보닛은 약간 긁히웠을 뿐이었다. 

매일 경비실에 찾아와 서너시간씩 앉아 있으면서 줄담배 피우고 로따를 찾아 소란 피운 기사의 얼굴을 지금도 기억한다. 어떤 날에는 서너 명이 와서 한창씩 싱갱이질 하다가 돌아 갔었다. 버스 정류소에 함부로 주차시킨 자기네 잘못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고 어떤 날에는 생트집을 잡고 지어는 쌍트러운 욕까지 거리낌없이 내 뱉았었다. 썩 후에 중국에서 유리를 구해서 내왔고 용철이가 맞춰주었다.

이 날 바람이 또 한 차례 세게 불었다. 수리소 쪽의 슬레이트가 또 날려 떨어졌다. 닛산의 옆창 하나가 깨지고 다른 차들은 긁히우기만 했다. 차영감이 작업을 하다가 파손 된 슬레이트가 옥상에서 떨어지면서 발등을 상했는데 나오지 말라는데도 기어코 우기면서 출근했다. 슬레이트 실은 차는 그 후 며칠 뒤에 나왔는데 그 동안에 있은 일들에 대해 쓰려고 한다.  

김중신이 죽은 후 차영감은 늘 우울해 있었다. 그러는 영감은 무슨 일이나 속에 두지 않았었다. 슬레이트가 나오기 전에 화목(땔나무) 두 차를 사 들였다. 우리가 판매한 중고차를 산 무창에서 실어다 준거였다.

무창은 지대안에 속했지만 후창세관을 지나서 철조망밖에 위치해 있었고 주로는 임산업으로 사는 동네였다. 뒤집의 사람을 삯내여 베게 했는데 길이가 30cm 되게 뚜르지바(엔진톱)로 잘랐고 나는 허은희와 함께 비어있는 창고에 날라들였다. 이틀동안 날랐더니 온 몸이 땀에 후줄근해지고 저녁을 먹은 후엔 그대로 꼬꾸라져 잤다. 그런데 그 이틀간의 점심시간에 차영감에게서 색다른 이야기를 듣게 되었던 것이다.  

첫날 얘기는–  

차영감은 두만강변에서 농사일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김중신도 차영감과 함께 그 농장에서 일 했는데 하루는 낮에 김중신이 실종되었다가 저녁 늦게 돌아왔었다. 며칠에 한번씩 그런 일이 있었다.  

두 사람은 지기여서 못 하는 말이 없었다고 한다. 두만강을 건너 중국쪽에 갔다 왔고 점심밥을 배불리 먹었을 뿐만 아니라 저녁엔 술도 얻어먹고 온다는 것이다. 그것은 김중신이 결혼 전이던 총각 때의 일 같았다. 둘은 말을 내지 말자고 약속했으나 김중신이 절로 불어버렸다. 농장원대회가 열리고 김중신은 이제 운명의 시각을 맞이했다. 그의 운명이 어찌 될는지는 농장위원회의 결정에 달렸다.  

김중신의 착오(엄중하게 말하면 죄)에 대해 다들 규탄하고 나서 결판날 때가 되었다. 나중에 차영감이 일어나 말했다.  

“김중신 동무가 착오진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일입니다. 본인은 이미 승인했고 철저히 잘못을 뉘우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동지로 끌어 안아 잘 교육하는게 옳다고 생각됩니다. 돌아온 자체가 뼈저리게 뉘우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어떤 처벌이라든가 하는 것은 오히려 동지를 배척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잘못을 뉘우치는 동지는 철저히 혁명동지로 되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김중신 동무의 결심을 들어보고 용서해 주도록 합시다.”  

김중신은 단단히 결심을 내렸고 용서를 받은 후 처벌이 내려지지 않았다. 후일 농장을 떠나면서 차영감이 나진으로 데려왔다고 한다. 그러니 차영감은 동생 맞잡이로 김중신을 보살핀 거였고, 중국에서 태여나 조선으로 간 사람중의 하나였던 김중신은 그렇게 차영감한테 신세가 많은 사람으로서 차영감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들어왔었다.  

다음은 두 번째 날 이야기–  

합작회사 때의 일 이였다. 차영감은 사장 겸 기사장으로 있었다. 하루는 승객을 싣고 달리던 버스가 발동이 꺼졌다. 고장은 휘발유가 공급되지 않는 것, 휘발유 엔진을 차 앞에 장착한 버스였다.  

이 고장은 여러가지 원인이 있다. 휘발유 부족, 연유 파이프거나 필터가 막힌 것, 연유 펌프고장과 기화기(구식 자동차)고장 등이 연유가 올라오지 않는 고장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이 버스의 기사는 제일 미련하고도 위험한 방법을 썼다. 탱크에서 휘발유를 받아 버스 안에서 기화기에 휘발유를 부어넣으면서 운전하는 것이었다. 휘발유 엔진은 불을 붙여주어야만 휘발유가 연소하고 좁은 공간에서 폭발하면서 피스톤을 밀어주어 동력이 생긴다.

휘발유의 공급양이 많거나 적거나 다 연소에 불리하다. 휘발유를 부어 넣는 사람이 인공으로 그 양을 조절해준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리고 그보다도 기화기가 정상적으로 휘발유를 공급할 때처럼 불이 거꾸로 달리는 위험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그 위험이 시시각각 존재하는 것이므로 운전자들에게는 절대 금물이다.

지금은 거의 전부 전자식으로 불을 붙여주고 휘발유 질이 좋은데다가 일반적으로 탱크로부터 엔진에 이르는 구간에 큰 고장이 생기지 않는다. 가장 기본적이고 원시적인 기계식 부품만 달려 있는 구식 자동차는 정비가 잘 안되어 있으면 이 고장이 비일비재로 많이 생긴다.  

불과 10m도 가지 못하고 불이 거꾸로 달렸고 휘발유 용기를 든 자가 용기를 놓치는 바람에 버스 안에 대번에 큰 불이 일었다. 당시 차장은 김영옥이었는데 머리가 그을고 옷이 좀 탔을 뿐이었고 기사는 사고를 저질러놓고 도망쳐 버렸다. 3명은 버스 안에서 타 죽고 화상이 엄중한 네 명은 병원에서 죽었다. 기사는 후에 잡혔는데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차영감이 말해주지 않았다.  

차영감은 사고의 주요 책임자로 류치장에 같히게 되었다. 뭐 1학년이 며칠이고 2학년이 또 며칠, 그렇게 5학년까지 악몽같이 지내고서야 햇볕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버스가 불에 다 타버리고 7명이 사망한 대단한 사고, 내가 고중을 다닐 때 같은 학급에 다니던 동학이 그런 사고를 당한 적이 있었는데 역시 몇 명이 타 죽었었다. 80년대 중반이니 거의 20년이 되어 간다.

그런 사고가 나진에서도 있었다니? 그것도 내가 나진에 다니기 시작하기 1년 전에 이모의 막내 동생이 죽은 이튿날에 생겼던 사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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