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요염한 애정의 울림 youen naru kizuna no hibiki 妖艶なる絆の響き

이하 링크-

https://youtu.be/FHB3BCjPHI4

달빛이 검의 날처럼 푸르게 번뜩일 때가 있다. 노련한 무사마냥 소리없이 세상에 스며들어 그 폐부까지 깊숙히 찌르는 날, 어떤 부류의 인간들은 그런 날을 보름달이 뜨는 날이라고 불렀다. 달이 제 몸집을 온전히 드러내고 가장 찬란한 무기를 드는 밤,  치명적인 해를 가하는 존재는 오히려 다른이들이었다. 푸른 빛이 그들의 얼굴 위로 떨어질때면 그들의 눈은 달을 닮아 더욱 커지고, 입술은 자줏빛이 감돌기 시작하며, 피부는 조각상마냥 창백해졌다. 아름답고 매혹적인 모습이었다. 

  "인간들은 참 재밌단 말이지. 별것 아닌 날들에 의미를 더해. 의미 없이는 못 사는 존재들처럼."

이안의 말소리가 바람을 타고 부유했다. 도시를 내려다 보는 그의 눈에는 조금의 측은함과 과반의 조소, 나머지만큼의 무심함이 배어있었다. 

  "우리에겐 그저 식사하는 날인데 말입니다."

파비앙이 이안의 옆으로 착지하며 거들었다.  옆 건물에서 뛰어 올라온 것치고는 기척없이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입가에 번진 적빛의 흔적을 혀로 핥아내며 마저 말했다. 

  "맛있어 죽겠네."

  "죽지도 못하면서."

그들은 불로불사의 존재였다. 육체의 젊음이 영원해서 언제나 아름다웠고 영혼의 시간이 무한해서 욕망이 없었다. 단 하나 빼고는.

  "몇천년을 살아도 식욕 하나는 사라지지 않는군."

  "식욕마저 사라지면 저희같은 존재들은 고독사 할겁니다. 원하는 게 없는 삶은 너무 황폐할 것 아닙니까."

  "미물들의 피나 빨면서 살고 싶지 않아서 그래. 저속하고 추잡해."

  "하지만 맛있는 걸요."

파비앙이 어깨를 으쓱 들어올렸다. 이안이 그런 파비앙을 흘깃 바라봤다. 

  "와인병이라도 드릴까요? 동맥을 끊은 뒤 흐르는 피를 병에 담아뒀다가 냉장 보관 하시란 말입니다. 한 일주일 지나면 풍미가 좀 살더군요. 그리고 와인잔에 담아서 치즈랑 즐기시면 분위기도 나고 그래요."

  "역겨운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군, 요즘 인간들의 말을 빌리자면… 그래 극혐이야, 극혐."

이안의 미간이 한껏 좁아졌다. 파비앙이 그 모습에 키득키득 웃어댔다.  사수를 놀리는 일은 몇번을 해도 즐거웠다. 

어딘가에서 달이 서서히 차오를 터였다. 도시의 검은 밤은 보름달일지라도 모습을 드러내는 걸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뱀파이어들은 달의 호흡을 익히며 살아왔기에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이안이 숨을 둬번 고르고는 힘껏 뛰어올랐다. 인간이 본다면 날아오른다고 표현했을 것이다. (물론 인간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한번 뛰어오르면 몇십미터를 족히 넘을 수 있었고 공중에서 잠시 멈춰있기도 가능했다. 여러 채의 건물 사이를 점프하며 밤하늘을 갈랐다. 파비앙이 그 뒤를 따랐다. 검고 무거운 옷자락이 움직일 때마다 펄럭였다. 

열두 번의 점프 끝에 이안이 다다른 곳은 어느 대학가의 낡은 건물 옥상이었다. 인근의 대학교를 기점으로 이어진 거리에는 젊은이들로 들끓었다.  알콜과 네온사인, 혼잡한 거리일수록 그들의 표정은 더욱 밝아졌다. 버스킹 노래 소리가 상공으로 흩어졌다. 달이 가장 환한 날이지만 도시는 마치 거꾸로 뒤집힌 것 같았다.  밝게 빛나는 것들은 위가 아니라 아래에 산재했다.  

  "그래서 이안님이 고르신 곳이 여기란 말입니까? "

  "…"

  "젊은 친구들이 많네요."

이안이 발밑의 건물을 응시했다. 일층과 지하에는 클럽이, 이층에는 펍, 삼층에는 네일샵, 사층과 오층은 모텔, 육층에는 고시원이 있었다. 그 모든 곳들에 사람들이 가득 차있었다. 

  "네일샵이 너무 뜬금없이 껴있네요."

  "그런가? 난 오히려 좋은 것 같은데. 혹시 아나, 죽기를 결심한 사람이 마지막으로 손톱을 정갈하게 다듬고 싶을지."

  "아, 죽은 자를 흡혈하시려고요?"

  "내가 원래 싸늘하게 식은 것들을 좋아해서."

  "…"

  "매니큐어 냄새도 좋아하고."

  "으 극혐."

 

파비앙이 이안을 고상한 변태로 취급하던 순간,  시끄러운 욕설들이 밑으로부터 전해졌다. 클럽 앞에서 젊은이들끼리 시비가 붙은 모양이었다. 주먹다짐까지 가진 않았지만 주변의 이목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누군가는 핸드폰을 들고 현장을 찍고 있었다.  때아닌 소란에 클럽의 보안요원이 나와 거구의 덩치를 내세워 상황을 제압했다. 클럽 오른쪽의 골목에서는 삼삼오오 모여 담배 피는 무리들이 고개를 삐쭉 내밀고 구경하다 상황이 종료되자 다시 골목 속으로 들어갔다. 깜빡깜빡 점멸하는 담배불들로부터 삐져나온 연기들이 공기 속에서 한데 엉켜 들었다. 위에서 내려다 보면 까만 정수리들이 뿌연 안개에 휩싸여 난국에 빠진 바둑알마냥 혼란스러웠다.

  "이안 님의 사냥 패턴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이 조잡한 건물에 모든 답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아-"

이안의 말뜻을 골똘히 생각하던 파비앙이 박수를 치며 깨달음을 표했다. 

  "그러니까 나름의 시나리오를 써보자면, 손바닥만한 고시원에 갇혀 인생을 비관하던 누군가가 끝내 생을 마감하기로 결심하겠지요. 그리고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펍에 가서 술을 진탕 퍼마신 뒤 클럽에 가서 아무한테나 추근덕거리는거예요.  생에 마지막 섹스를 하려고요. 그래서 누구든 붙잡고 모텔로 데려가 아주 값싸고 처절한 섹스를 하겠지요? 마지막으로 일을 끝낸 뒤 옥상으로 올라와 후련하게 투신을 하는..!"

파비앙의 답안에 이안은 그렇다할 점수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침묵의 태도가 정답을 의미할 것이라고 파비앙은 생각했다.  그들이 발딛은 건물엔 온통 쾌락이 흘러넘쳤다. 돈과 쾌락이 등가교환됐다. 고시원만이 그 영역을 벗어났다. 고시원과 교환된 가치가 무엇인진 알수 없어도 쾌락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똑같이 방들로만 빽빽이 들어찬 곳일지라도 오층과 육층의 간극은 지구와 달만큼이나 아득했다. 

기다림이 얼마나 됐을지도 모를 무렵, 파비앙이 무료함에 주저 앉으려 할때 옥상의 문이 열렸다. 구부정한 인영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왔다. 이안이 조용히 뒤돌아보며 그 인간의 행동을 주시했다. 인간의 눈에 자신들의 모습이 보이진 않겠지만 저벅저벅 걸어온 인간이 마침 이안의 옆으로 와서 섰을때, 둘은 살짝 당황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파비앙이 인간의 등 뒤를 지나서 다른 쪽에 나란히 섰다. 두 비(非)인간 사이, 인간 남자 하나가 난간을 잡고 서있었다.

  "진짜 이안 님 생각대로 뛰어내릴까요?"

자신들의 목소리 역시 들리지 않을게 뻔한데 파비앙은 저절로 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이안은 인간 남자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봤다. 까치집이 된 머리와 몇개월은 면도를 안한 듯 덥수룩한 수염. 오랫동안 바깥을 나가지 않은 흔적이 역력했다. 인간 남자가 난간의 틈새로 머리를 집어넣고 밑을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발아래 모든걸 빠짐없이 봐두려는 듯 시선이 집요했다. 이안도 덩달아 아래를 내려다 봤다. 소란스러운 분위기는 여전했으나 길바닥이 더욱 다채로워졌다.  외설스러운 룸싸롱 전단지들이 바닥 곳곳에 누워서 저를 밟고 가는 수많은 발목들을 덥썩덥썩 잡아뒀다.  밤이 깊어 갈수록 태우다 만 담배꽁초들은 도시의 땅을 지배했다. 그만큼이나 뱉어진 희멀건 침들이 보도블록을 적시다가 틈새에 말라붙었다. 아주 화려하고 불쾌한 지옥같다고 이안이 생각했다. 

 

  "근데 이 인간, 술냄새 안나는데요."

뱀파이어의 후각은 상어가 피냄새를 찾아내는 만큼이나 뛰어났다. 파비앙은 인간 남자에게 코를 들이밀고 다시 한번 냄새를 추적했다.

  "알콜냄새도 없고, 싸구려 모텔 냄새도 안 나는데요? "

  "난 너의 시나리오가 맞다고 한 적 없어."

코웃음을 치며 답하는 이안에 파비앙이 입을 삐죽거렸다. 

인간 남자가 내밀었던 머리를 도로 거두어 이번에는 하늘을 보기 시작했다. 하늘은 끝없는 터널같이 어둠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래 들여다 볼수록 블랙홀에 흡입되듯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정월대보름은 개뿔, 썅"

마침표같은 욕설을 달며 남자가 낮게 읊조렸다. 그리고는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멀어지는 인간을 보며 파비앙이 아쉬운 얼굴을 했다.

  "에이 뭐야.. 이안 님 오늘 식사 날리셨는데요?"

  "…."

  "아무래도 다른 작전을 짜보는게 좋ㅇ"

파비앙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눈앞을 휙 스쳐지나간 인간 남자 때문에 놀라서 뒤로 휘청였다.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난간에서부터 최대한 멀리 걸어간 인간 남자는 다시 뒤돌아서 전속력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파비앙이 두번째 마디를 이안에게 건넬 즘, 왼발로 쿵- 크게 도약하여 뛰어올랐고 오른 발을 뻗어 난간을 넘었으며  두 발이 허공에 뜨자 즉시 추락했다. 도약할 때 반동으로 튕겨져 나갔던 왼발의 슬리퍼 한 쪽이 옥상 어느 지점에 떨어지고, 미세입자의 움직임과도 같은 근소한 시간차를 두고 건물 밑으로부터 둔탁한 소리가 전해졌다, 이내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산발적으로 튀어올랐다. 

  "달이 보이네, 이제야."

이안의 말이 주문처럼 퍼지자 달이 서서히 칠흑의 베일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도시의 밤하늘에도 곱게 연마된 푸른 빛이 날카로운 직선을 그리며 뻗어나갔다.

  "그리고 냄새 났어. "

  "네?"

  "매니큐어 냄새, 났다고."

 

이윽고 이안이 망설임 없이 뛰어내렸다. 얼굴에는 옅은 미소를 띄웠다. 펄럭이는 옷자락이 일으키는 바람을 쌩하니 맞으며,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파비앙이 넋이 나간 채 중얼거렸다.

  "식사 맛있게 하세요오…이안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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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정월대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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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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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별다른 이유는 없고, 그냥 제가 제일 좋아하는 남자 영어이름이라서요ㅎㅎ 발음할 때 유려하고 두 음절로 딱 정갈하게 떨어지는게 맘에 듭니다. 좀 신비로운 분위기도 있다고 생각하고요..!

  1. 요염한 애정의 울림은 이안이 인간들의 삶에 대한 측은함과 자기생에 대한 황량함을 더 진하게 표현하는것 같기도 하네요.. 그냥 노래만 들으면 뭔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썸을 타는 사인데, 12시쯤 되는 늦은 밤 밀페된 공간에서 밀당을 하는 장면이 상상되기도 하네요..서로가 서로에게 굴복당하지 않으면서도 깊게 빠짐을 주체할수 없고 그 피어오르는 두근거림과 일말의 냉철함을 지켜보려는 좁은 간극 사이 어딘가에서 헤매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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