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달빛이 세 사람의 그림자를 길바닥에 길게 드리워 놓는다. 봉선각에서 봉선이 휘장안으로 들어가 더 나오지 않는바람에 사람들은 잠깐 더 앉아있다가 삼삼오오 흩어져버렸다. 작정하고 일을 벌린 우사는 언제 가버렸는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고, 이여백은 먼저 신충일을 역사까지 바래다주고 서은과 함께 총병부로 돌아오기로 했다. 역사가 가까워오자 신충일이 입을 열었다.

"도련님, 요동의 인물들은 참으로 경외스럽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이여백의 대답에 신충일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련님의 명성은 미리 알고 왔지만 총병부에 임공자같은 인물이 계실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요동은 땅이 크고 넓으니 유능한 인물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저와 제 아우는 단지 무명소졸일뿐입니다."
"겸양치 마십시오. 총병부에 두분 말고도 또 하나의 범상치 않은 인물이 있었으니 총병님의 자제 교육이 세간 그 누구도 미치지 못할까 합니다."

신충일은 말을 마친후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아까 총병부에서…경합에서 이기면 그 사람을 만나보는 것이 바로 제 부탁이자 소원이였습니다."

이여백은 고개를 들어 신충일을 보았다.

"오늘은 늦었으니 이만 처소로 들어가 쉬십시오."
"도련님께선 제가 그 사람을 만나는 걸 왜 그렇게 두려워하십니까."

신충일의 어조가 살짝 날카로와졌고 이여백은 그런 신충일을 잠시 주시했다.

"신공자께선 왜 꼭 그 사람을 만나려 하십니까."

신충일은 뭔가 생각하듯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누르하치는…효웅입니다. 지금 건주여진에서 조선의 인삼을 사들이고 흑수부와 건주부에 표목을 사들이는 것을 도련님께선 아시는지요…"

이여백은 말없이 신충일을 보았고 신충일은 이어서 말했다.

"누르하치가 조선과의 이런 거래에서 큰 이익을 남기는 것은 그것을 공물로 명에 아부하기 위해서입니다. 명은 이런 누르하치에게 방심할 것이며…명이 약해지면 누르하치가 강해지고, 누르하치가 강해지면 조선은 궁해집니다…"
"…"
"저는 이런 조선의 앞날이 심히 우려 되옵니다. 꼭 선택해야 한다면 조선은 명에 굽힐지언정 여진에 짓밟히고싶지 않습니다."

이여백은 머리를 숙이고 깊은 생각에 잠긴 듯 했다. 신충일은 무거운 표정으로 말을 끝맺었다.

"그래서 그 어떤 기회를 찾아서라도 누르하치를 한번 만나서 그 사람을 소상히 알고 싶었습니다. 오늘 경합도 그러한 목적이었구요. 다만 제가 이기지 못했으니 이 역시 제 팔자이고 조선의 운명인가 봅니다."

이여백은 머리를 숙이고 있다가 담담히 시선을 들었다.

"내일 아침 말을 대령해 처소에서 기다리고 계십시오."
"말…요?"

신충일은 어정쩡한 기색이였다. 이여백은 웃는 듯 마는 듯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신공자께선…헤투알라성까지 도보로 가실 작정이십니까."
"명 받잡겠습니다…!"

신충일의 얼굴에서 넘실거리는 미소가 달빛아래 환하게 빛나고 있었고, 줄곧 옆에서 지켜보던 서은은 아무 말 없이 미소를 지었다.

……

"신충일로 하여금 누르하치를 만나게 하시렵니까."

서은은 후원의 연못가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달빛이 물에 비쳐 얼른거렸고 연잎은 물위에 누워 물결을 따라 출렁이고 있었다. 차거워지기 시작한 가을바람이 연못을 스쳐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어루쓸었다. 그녀는 또 한번 작게 미소를 지었다.

"긴긴 하루었네요.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았네요. 형님께선 제 질문에 해답을 해주신 셈이군요."

이여백은 그녀의 곁에서 무심한 듯 말했다.

"난 그저, 그들의 만남이 그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다는 판단이 섰기때문이다."
"허나 형님의 생각은 전혀 안하십니까…"

그녀의 말에 그는 고개를 돌렸다.

"내 생각이라니."
"누르하치는 철령 숲속에서 형님을 납치하려고 했었습니다. 헤투알라성으로 가면 범의 굴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까."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아버님께서 동가와 추잉을 인질로 데리고 있다는 걸 안후로 누르하치는 더이상 무모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지금 누르하치는 우선은 세력을 확장시킨 후에 니칸외란을 도모하라는 아버님의 계획을 받아들였지 않았더냐."
"그래도…"
"그렇다고 한평생 누르하치를 피해다니겠느냐."

그가 담담하게 웃자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진정 앞날을 귀신처럼 내다보는 재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형님을 조금이라도 도울수 있겠는데…"
"지금도 많이 도와주지 않았느냐."

이여백은 그녀를 보다가 뭔가 생각난 듯 말을 이었다.

"밤이 늦어 이만 쉬게 하고싶은데…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잠시후 들어가는 게 어떤가."
"네."

그가 아까 연회석에서부터 할말이 있다고 자신을 만류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녀는 괜스레 긴장해졌다.

"긴히 하실 말씀이…무엇입니까."

그는 그녀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고 연못위를 주시했다. 한참 그대로 그 자리에 그린듯이 서있다가 그가 소매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녀는 얼떨결에 그가 건네주는 그것을 받아들고 보았다. 상투에 꽂는 은잠이었다.

"이건…"
"네것이다."

그녀는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경성 망강루 주막에서 자객을 만났을 때, 그의 방문앞에서 그녀가 자객을 향해 날렸던 은잠이었다. 이게 뭐라고 지금껏 그가 가지고 있었던가. 그녀는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쳐들었다.

"이걸…여태껏 가지고 계셨습니까."
"귀한 물건인 듯 하여 보관해두었다."
"이게 뭐라고…"

웃으며 은잠을 소매안으로 갈무리하고 머리를 든 그녀의 시선이 그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달빛아래 그의 눈이 유난히 빛나고 있는 건 그녀의 착각이었을까.

"보통 은잠보단 수공이 범상치 않아보였다. 궁의 하사품도 이에 미치지 못하거늘."
"형님…"

그녀는 착잡한 눈길로 그를 주시했다. 그리고는 시선을 내리고 나직히 입을 열었다.

"아직 저를…완전히 믿진 않으시는군요."
"그러면 은잠을 돌려주지 않았겠지."
"그럼 저를 믿으시는가요?"
"…"
"되었습니다. 저도 무리하게 욕심내지 않겠습니다."

그녀가 앵돌아지자 그의 탄식소리가 등뒤에서 울렸다.

"넌 참…알아갈수록 모를 아이로구나."

그의 어조에는 이유 모를 체념 같은 것이 섞여있었고, 그것을 가려듣는 순간 그녀의 마음은 조금 흔들렸다.

……

"사실 저…그렇게 난해한 사람이 아닙니다."

연못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다정하게 비쳤다. 서은은 물위의 달그림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약간 자조섞인 미소를 지었다.

"저는, 생각이 빠르지만 깊지 못하고, 생각하는 걸 바로 행동에 옮기고, 그러다 엉뚱하게 실수를 저지르고, 또 그 실수를 만회하려고 많은 길을 에돌기도 합니다."
"…"
"가끔 큰 사고도 치고…치밀하고 냉정한 판단을 하기 어려워 가끔 크게 후회할만할 일을 저지르기도 하죠."

이여백이 고개를 숙이고 소리없이 웃자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보았다.

"정말입니다.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저의 아버진 제가 어릴때부터 항상 사고를 칠가봐 걱정하셨습니다."
"이런 재간둥이를 두고 그런 걱정을 하시다니. 무예에 금기서화는 물론 묵죽도와 봉구황까지 능숙한데…아버님의 요구가 너무 높은 게 아닌가."

그가 웃으면서 하는 말에 그녀도 따라 웃었다. 잠시후 그는 웃음을 거두고 그녀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사군자(梅兰菊竹,매화,난초,국화,대나무)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 명대에 와서 시작되었는데, 특히 북송 소식(苏轼)이 전수한 묵죽을 군자의 덕과 연관시키는 시는 지금까지 딱히 기억에 남은 것이 없었느니."

그녀는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몰라 멍해 있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부드럽게 눈을 휘였다.

"아까 연회석에서 묵죽도 여백에 써넣은 그 시 말이다. 그것 역시 아버님께서 전수하신 건가."
"네…낭호 뒷부분으로 석암을 그리는 방법이며 그림의 여백에 써넣은 시구들, 그리고 봉구황의 연주까지 모두 아버지한테 가르침을 받은 겁니다."

그녀는 우연이였지만 아버지에 대한 화제를 꺼내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으로부터 백여년후인 청나라 정판교의 시가 지금 사람들에게 알려질리 없었다. 그가 기억에 남은 시가 없다는 말이 바로 그 말이었다.

"봉선각에서 봉구황 연주에 시를 곁들인 것도 절묘한 방법이거늘."

그의 이어지는 칭찬에 그녀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음률에 특별한 재주는 없으나 봉구황은 자주 연습한지라…"

그가 다시 침묵하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이게 다입니까."
"…?"
"하실 말씀이란 건…단순히 이런 칭찬을 하고자 지금까지 저를 붙들어 두었느냐는 말입니다."
"그게…"
"되었습니다. 애초에 기대를 말아야지 원. 대신 저도 할 말이 있습니다만…"

그녀는 말하다 말고 머리를 숙이고 옷섶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그녀의 그런 모습이 생소한 듯 머리를 기웃했다.

"뭐냐."
"헤투알라성 말입니다. 저도 같이 가면 안되겠습니까."

그녀의 말에 그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리고 추호의 여지도 없는 단호한 거절이 그의 입밖으로 튀어나왔다.

"안돼."
"위험이 없다면서요. 왜 안된다는 겁니까."

그녀는 불퉁한 기색으로 투덜거렸다. 그는 짧게 한숨을 쉬면서 그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누르하치는 위험하지 않아도 가는 길에 다른 인마가 있을수 있다. 지금의 요동은 부족간 싸움이 빈번해서 만일의 상황이 있게 된다면 신충일과 나는 자신을 보호하기엔 넉넉해도 너까지 보호하기는 무리가 있어."
"저도 제 한 몸 보호하기엔 넉넉한 솜씨…"
"그러니 넌 부중에 남아있거라. 네 한 몸만 보호할수 있는 솜씨라면 말이다."
"백번 겸양해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녀가 번쩍 고개를 들자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일을 마치면 바로 돌아올테니 집에서 기다리거라."
"왕복 닷새면 족하겠습니까."
"헤투알라성에 있는 시간까지 합쳐도 그정도면 충분하다."
"그러면 부디 조심, 또 조심하옵소서."
"병역가는 남정을 바래는듯한 아녀자의 걱정 같은건 버려라. 내 아우답지 못하군."

그가 피씩 웃어버리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몸을 틀었다. 그리고 발을 구르며 투정하듯 한마디 내뱉었다.

"놀리지 마십시오…형님."

그의 얼굴에서 문득 웃음기가 거두어졌다. 금세 조용해진 분위기가 이상해져서 그녀는 머리를 들었고, 그바람에 지척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뭔가…뜨거운 열기가 그의 눈길에서 느껴졌다. 그런 짙은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던 그가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그녀의 어깨에 있던 그의 손이 그녀의 귓가를 거쳐 얼굴로 오는 순간, 그녀는 화뜰 놀라 뒤로 물러섰다.

풍덩!

순식간에 차거운 연못 물에 그녀는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급히 일어서다가 또 한번 발을 빗디뎌 물속에 어푸러졌다. 다행이 물은 그리 깊지 않았지만 워낙 창졸간에 일이라 그녀는 물속에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허우적거렸다.

바로 이때 단단한 팔이 그녀의 몸을 붙들어 일으켰다. 그녀는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여 얼굴에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닦으려 하지도 않고 그에게 크게 화를 냈다.

"뒤에 물인데도 말씀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물가로 나왔고, 그는 멍해 있다가 굉장히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말해줄 사이도 없이 네가 뒤로만 움직이더구나."
"그럼 왜…"
"머리에 나뭇잎이 붙어있어 떨쳐내주려 했건만."
"너무하십니다…"

그녀는 원망조로 한마디 내뱉다가 그만 흠칫하고 몸을 떨었다. 뒤이어 온몸 한가득 몰려드는 한기에 그녀는 두 팔로 어깨를 꼭 감싸안고 몸을 움츠렸다.

근간에 날씨가 추워져서 두터운 옷을 둬벌 껴입은 것이 다행이였다. 만일 여름이어서 얇은 옷이 이렇게 폴싹 젖으면 바로 여자의 신분이 탄로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 이렇게 떨고 있는것은 단지 추워서라고, 그리고 그의 행동을 오해해버린 자신의 경거망동이 후회되어서라고 일축해버렸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또 화가 치밀어 그녀는 홱 처소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문득 등뒤에서 강력하게 잡아당기는 힘에 그녀는 어쩔새없이 그의 품에 덥석 안긴 몸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놀라 버둥거렸지만 왠지 제대로 몸을 가눌수 없었다.

언제 벗었는지 그의 도포가 자신의 몸에 씌워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중의 차림의 그의 품에 몸을 밀착하고 어정쩡하게 서있는 모습이 되어버렸다. 따뜻한 체온이 그녀의 몸에 전해졌고, 그 따뜻함 뒤에는 강하게 뛰는 심장의 율동이 느껴졌다. 그녀는 다시 몸을 움츠렸다.

"전 괜찮습니다."
"가만있어."

그의 어조는 단호했고 그녀는 도포밑에서 꼼지락거렸다.

"이러다 형님 옷도 젖겠습니다."
"이미 다 젖었느니."

그는 그녀가 더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도포로 그녀를 꽁꽁 동여매다싶이 감은후 다시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짙게 가라앉은 눈빛에 또 한번 뜨거운 열기가 스쳐지나갔다. 그녀는 민망한 시선을 내렸다.

"이만 처소로 돌아가겠습니다."
"서안아."
"네."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끝으로 그가 다시 길게 침묵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시선이 집요하게 얽혀오는 감을 느끼자 바싹 긴장해져서 혀로 입술을 추겼다.

그리고 그녀는 보았다. 그의 눈에 순간 타오르는 한가닥 뜨거운 불길을. 그녀는 자신의 시선을 어디에 두었으면 좋을지 몰라 잠깐 허둥댔고, 그는 머리를 한번 가로젓더니 그녀를 감은 팔을 풀고 뒤로 물러섰다.

"서안아."
"네. 형님."

오늘밤 이 남자가 대체 웬 일일까 하는 생각을 하며 그녀는 몸속 깊이 스며드는 한기에 도포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는 그녀를 이윽토록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헤투알라성에서 다녀온 다음…얘기하자꾸나."
"네? 얘긴 오늘 하시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녀는 새삼스레 의아해졌다. 할 얘기가 있다 하면서 지금껏 끌더니 결국은 아직도 말을 꺼내지 못했단 말인가. 그녀의 의혹을 최대한 증폭시키며 그는 민망한 듯 딴데로 시선을 돌렸고, 그녀는 그의 완벽한 옆선을 바라보면서 대체 그 망할 얘기가 뭘까 하는 생각에 갑갑해졌다.

"어서 들어가거라. 고뿔에 걸릴라."
"네, 그럼…형님도 얼른 쉬십시오. 아까 보니 잔을 연속 비우시던데…보아하니 조금 취하신 듯 합니다."

눈앞의 이 남자는 취하면 오히려 말을 갑자르는 게 특징인가 보다. 그리고 쓸데없이 애틋한 눈빛으로 사람 마음이나 싱숭생숭 간지럽히고. 괜히 넘겨짚다간 분위기 잡고 고백이라도 하는줄 알겠네. 미쳤군, 미쳤어. 이리 중얼거리며 몸을 돌리는 순간, 그녀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입에서 의미모를 말 한마디가 바람결에 들릴락말락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미약했지만 그 한마디는 어쩌면 지금의 그녀의 마음과 완벽하게 일치한 것 같았다.

"취한 게 아니라 미쳤구나…내가."

……

이여백과 신충일이 헤투알라성으로 떠난지 사흘째 되는 날, 서은은 령이와 함께 가만히 총병부를 빠져나왔다. 총병부에 있으면 숨이 막힌다는 령이의 불평도 귀찮았지만, 그녀 역시 그날 밤 이여백이 남긴 말로 한창 심란해있던 참이였다.

"취한게 아니라 미쳤구나…내가."

분명 그리 말했었다. 그의 그 한마디는 그녀의 심장에 뜨거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어쩌면 그는 언제 한번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던 사람이였는데, 그날의 그 한마디에는 전에없는 좌절감이 느껴졌다. 그날 그녀는 처소로 돌아온 후에도 가슴이 두근거려 잠을 이룰수 없었다.

"헤투알라성에서 다녀온 다음…다시 얘기하자꾸나."

왜 그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혹시 자신의 물에 젖은 모습에 여인의 행색이 탄로되지나 않았을까. 아니면 그날 그는 왜 그런 뜨거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을까…그녀는 거의 뜬눈으로 그 밤을 지새웠고, 그녀의 그런 걱정은 사흘이 지난 지금에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의 정체가 밝혀지는 것은 시간문제에 불과했지만, 직접 이 모든 것을 털어놓을만한 용기와 타이밍을 그녀는 찾지 못하고 있었다. 만일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신분을 그가 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그녀는 심란한 마음을 억누르고 앞에서 걸어가는 령이를 불러세웠다.

"령아."
"네, 도련님."

령이는 상기된 얼굴로 뒤를 돌아보면서 활짝 웃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자주 놀러 나오시와요. 도련님."
"그렇게도 좋으냐."
"네, 궁에서는 언제 이런 정경을 볼수 있겠사옵니까."

령이는 흥분에 젖은 목소리로 떠들다가 그녀의 눈총에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가 못말린다는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왜 아직도 이렇게 실수가 빈번하느냐."
"죄송합니다…도련님."

그녀는 저잣거리를 벗어나 사람이 적은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령이는 그 뒤를 따르며 속삭이듯 물었다.

"아까는 왜 부르셨사옵니까."

그녀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 피씩 실소를 했다.

"나도 정신이 없구나. 너한테 한가지 물어본다는 것이 깜빡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령아…그날밤…"

그녀는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물에 젖어 들어온 그날 밤 말이다."
"네에."
"행색이 어떠하더냐."
"네?"

령이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눈을 깜빡거렸다.

"행색이…어떠하냐구요?"
"그러니까…물에 젖어…여자라는 걸 알아볼수…있을 정도냐 말이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그래서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다가 문득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다…가서 놀거라."
"그날 밤 말이옵니까?"

령이는 그제야알아차린 듯 방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에 젖은 모습이 청초하고 가여워보여서…여자인 제가 보기에도 뭉클하오이다."
"령이 너!"

그녀는 살짝 발을 굴렀다.

"지금 날 놀리라고 네게 물어본 건 아니다."
"잠깐 농을 했사오니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주시옵소서."

령이는 깔깔 웃다가 다시 정색하고 그녀를 보았다.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도련님…그날 행색이 젖은 것 빼곤 전혀 이상하지 않았사옵니다. 젖긴 했어도 워낙 많이 껴입으셔서 별로 의심할만한 구석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눈을 흘겼고, 령이는 빙긋 웃으며 여유작작하게 말을 이었다.

"다만 제발 방금처럼 발을 구르든가 눈을 흘기지 마시옵소서. 한번씩 이러시면 아무리 남장 차림이라 해도 천만가지 여아의 교태가 일시에 살아나오이다."

그녀는 령이를 노려보다가 그만 고개를 흔들며 시선을 돌려버렸다.

"이것이 감히 윗전을 놀리려 드는구나. 궁에 돌아가고싶으냐."
"용서하시와요. 도련님…저는 여기가 좋사옵니다. 제발 절 돌려보내지 마시와요. 다만…주위 이목이 있사오니 궁이니 뭐니 하는 말씀을 삼가해주시옵소서."

령이가 방금전 자신이 주의를 줬던대로 소심한 보복을 하자 그녀는 웃음을 참으면서 으름장을 놓았다.

"아무래도 네가 여기 있기 싫어서 이러는게 분명해. 이제 둘째도련님이 돌아오시면 총병부 부중에 시종이 많아서 네가 필요없다고 말하겠다."
"정말이십니까? 도련님…정녕 그리 가혹하게 저를 내치시렵니까. 착하신 우리 도련님께선 절대로 그런 분이 아닌데…"

령이는 속지 않는다는듯 빙긋거렸고 그녀도 피씩 미소를 지었다. 바로 그때 누군가 언뜻 둘의 곁을 스쳐지나갔다. 어쩐지 그 사람의 뒤모습이 눈에 익다고 생각하는 순간, 령이가 목소리를 낮추어 은밀히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

그녀는 길을 에돌아 사라지는 그 사람의 뒤모습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령이가 그녀곁으로 바싹 다가왔다.

"금방 지나간 저 사람이…제 손에 무언가를 넣고 갔사옵니다."
"어서 가져오너라."

령이는 꼬깃꼬깃 접혀진 종이 한장을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그녀는 급히 그것을 펼쳐들었다. 글자체를 숨기려고 흘려쓴 듯한 글씨 한줄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후 성문밖에서 나 좀 볼수 있겠나.—우사"

그녀는 종이를 갈무리한후 머리를 들어 령이를 보았다.

"잠깐 가볼데가 있으니 먼저 총병부로 돌아가 있거라."
"네? 저 혼자 말입니까?"

령이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총병님께서 물어보시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저는 도련님을 따라 가겠습니다."
"총병님께서 굳이 물어보시면 봉선각에 갔다 하거라."

그녀의 말에 령이는 눈을 더 크게 떴고 그녀는 거의 떠밀다싶이 령이를 총병부 방향으로 돌려세웠다. 령이의 뒤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후 그녀는 저잣거리를 벗어나 성문밖으로 종종걸음을 쳤다. 견고한 광녕성 성문에 이르자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쌀쌀한 늦가을 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스쳤고 그녀는 노을이 지는 언덕을 바라보면서 길게 숨을 들이켰다.

"꽤 빠르군."

자취없이 뒤에 온 사람의 조용한 한마디에 그녀는 몸을 돌렸다. 우사의 흥미로운 눈빛이 그녀를 아래위로 훑었다. 저녁노을이 그녀의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

"역시 신출귀몰인 건곤대나이 보법입니다."

그녀는 미간을 약간 찌푸리면서 우사를 바라보았다.

"설마 아직도 형님과 대결을 원하시는 겁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우사의 의아한 표정에 그녀는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봉선각에서는 왜 그러셨습니까. 그건 작정하고 형님을 난감하게 만들자는게 아닙니까. 형님더러 기루에서 음률을 선보이라니요? 어찌 그런 허황한 생각을 다 하실수 있는지."
"그바람에 그대의 거문고 재주가 빛나지 않았는가."

우사가 능글거리자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변변치 않은 재주라도 없었던들 그날밤 쉬이 당신을 놓아줬겠습니까. 끝까지 형님을 난감하게 굴면 당신이 바로 명교 우사라고 떠들어 망신을 줄 생각이었습니다. 명교 우사가 기루를 드나든다는 게 강호에 퍼지면 그 역시 그리 듣기 좋은 일은 아니겠지요."

우사는 말문이 막혔는지 피씩 웃음을 지었다.

"다음번에 만날 땐 날 괄시하지 말라고 말했을텐데."
"더이상 형님을 욕보이게 하면 괄시뿐이겠습니까."

그녀가 뒤질새라 맞받아치자 우사는 멍하니 그녀를 보다가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거 무서워서…어디 말을 하겠나. 아우 없는 사람은 서러워 죽겠네. 그렇게도 그 형님을 지켜주고 싶은가."
"물론입니다."

그녀는 단호하게 대답한 후 우사를 주시했다.

"오늘은 왜 날 보자고 했습니까."
"그대의 그 잘난 형님이 지금 헤투알라성에 가있다고 들었네."
"그런데는요."

서은은 쌀쌀하게 대답했고 우사는 깊숙히 미간을 찌프렸다.

"총병부에 가만히 있지 않고 왜 잘난척 돌아다니는가."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그녀는 우사를 보면서 고개를 기웃했다.

"형님이라고 평생 총병부에 있으라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그건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소릴세."

우사는 뒷짐을 지고 언덕위를 몇발자국 거닐었다. 그러더니 우뚝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보면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당장 그 형님에게 가서 총병부로 직접 돌아오지 말고 어디 숨어있으라고 하게."
"그런 말은 명교 우사님께서 직접 찾아가서 알려주든가, 사람을 보내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녀는 여전히 빈정거렸고 우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건주여진 방비가 대단하네. 또 헤투알라성은 누구나 쉽게 들어갈수 있는 곳도 아니고."
"그럼 형님이 돌아오시길 기다리십시오. 아마 이삼일후면 돌아오실겁니다."
"그때면 때가 늦어져!"

우사가 급히 내뱉는 말에 이번에는 그녀가 이마를 구겼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어디 자세히 말씀해주실수 있겠습니까."

우사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들어 멀리 앞쪽을 바라보았다.

"혹 근자에 강호에 떠도는 소문을 못들었는가."
"소문이라니요? 어떤 소문입니까."

그녀의 의혹에 우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명교는 실상 언녕 새로운 교주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소문 말일세."
"듣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머리를 가로젓자 우사의 목소리는 침울해졌다.

"명교 교주는 내게 북방의 당주들을 모집하라는 명을 내린 후 그사이 남쪽에서 새로운 교주를 선정했네. 내가 북방에서 지체하는 사이 명교는 완벽하게 신구교체가 된셈이지."
"그래도 당신의 우사자리는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녀의 말에 우사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게 중요한게 아닐세. 중요한건…이렇게 되면 명교를 아는, 그리고 명교를 떠난 사람들이 무사하지 못한다는  걸세."
"…?"

그녀는 그제야 우사의 말뜻을 알아듣고 눈을 크게 떴다. 우사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왜 그렇게 명교 교주 자리를 욕심냈는지…이제 그 이유를 알겠나. 명교 교주가 다른 사람이 되면, 명교의 비밀을 조금이라도 알고있는 사람이라면 다 숙청대상에 속하는 걸세."
"그러면 형님이…"

그녀가 차마 잇지 못하는 말을 우사가 이어서 말했다.

"어쩌면 최초의 제거대상이 될수 있지. 내가 알기론 이미 남쪽으로부터 몇몇 강호의 유명한 호걸들이  비명횡사하기 시작했는데 이건 새 교주가 손을 쓰기 시작했다는 증거네. 북방에도 몇일내로 명교의 움직임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네. 그때는 설사 경계가 삼엄한 총병부라도 결코 안전하지 않아."

서은은 큰 숨을 들이쉬면서 우사의 얼굴을 보았다.

"왜 명교는 형님을 쉬이 놓아주지 않는 것입니까. 입막음을 하고싶다면 왜 지금 와서야 해하려는 것입니까. 그리고 명교 교주가 명을 내렸다면 우사님은 왜 모르는 겁니까. 우사님은 명교 교주의 심복이지 않습니까."

우사는 눈섭을 꿈틀했고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런 교주의 심복으로 있다면 왜 이렇게 형님을 구하고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알리고자 하는 것입니까…명교 교주가 이 사실을 안다면 당신은 명교를 배신한 죄로 역시 그 숙청대상에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우사는 그녀의 눈길을 피해 시선을 딴데로 돌렸다.

"혹 상피제(相避制)라고 들어봤는가."
"상피…관료체계의 친족간에는 같은 관청 또는 통속관계에 있는 관청에서 근무할 수 없게 하거나, 연고가 있는 관직에 제수할 수 없게 한 제도를 말하지 않습니까."
"맞네. 명교도 상피제를 도입하고 있는데 조정에서 하는 것과는 좀 차이가 있네."
"명교도 참 가지가지 하는군요."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고 우사는 계속 말을 이었다.

"명교의 상피제도란 사적인 친분이 있는 사람에겐 절대 그 사람에 관련한 임무를 주지 않는다는 걸세.교주는 인간이라면 꼭 인정에 영향받게 된다고 하면서 명교의 교리 역시 이런 인간의 인성은 지켜줘야 한다고 했었네."
"…"
"그 예로는, 전에 좌사로 있으면서 탐관오리들을 숙청할때, 자네의 그 형님도 자신과 교분이 있는 사람은 한번도 만나지 못했지. 바로 그런 제도가 있으니 일전에 그가 우리 아버지를 돌아가게 한 원흉이 아닐수도 있다고 내가 생각을 하게 된거고. 마찬가지로 자네의 그 형님과 사사로운 친분이 있었던 나로선, 지금 그 사람에 대한 그 어떤 임무도 기피해야 할 상황이지."
"참으로 이상한 교리군요. 솔직히 결과는 똑같은 것이 아닙니까. 명교 교주도 참 간악한 사람이군요.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 죽이듯 하면서 그 무슨 인성을 운운합니까."

그녀의 비아냥을 아랑곳하지 않고 우사는 조용히 그녀를 응시했다.

"허니 헤투알라성으로 가서 자네 그 형님에게 이르게. 총병부로 돌아올 때 대로로 오지 말고 수림을 꿰질러 올 것이며, 위험하면 총병부에 직접 가지 말고 전의 그 동굴로 오면 된다고 말이네."
"내가 왜 당신 말을 들어야 합니까."

그녀가 시선을 들었다. 두 사람의 눈길이 허공에서 잠깐 부딪쳤고, 그녀는 그런 예리한 눈빛으로 우사의 흔들림 없는 표정을 한참 응시하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체념어린 한숨을 내쉬면서 입을 열었다.

"이번만 당신을 믿어보겠습니다."
"탁월한 선택일세…"
"그런데 설마 나더러 도보로 가라는 건 아니겠지요."

우사가 기다렸다는 듯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말 한필이 풀을 뜯고 있었고, 서은은 앞으로 다가가 몸을 날려 말에 올라탄 후 우사에게 정중히 머리를 숙여보였다.

"이런 소식을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님대신 제가 인사 드리겠습니다."

그녀가 발로 등자를 한번 구르자 말은 쏜살같이 앞으로 내달렸다. 그녀의 그런 결연한 뒷모습과 멀리 석양속에서 전해오는 채찍소리에 우사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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