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만력 12년 1584년의 이른 봄.

창밖에는 추위가 가셔진 봄날 오후의 해볕이 화사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황금색 비단 휘장으로 둘러쌓인 방안은 얼핏 보기에도 일반 규방이 아닌 화려한 황실의 침궁 분위기가 풍겼다. 그 방안의 창가에는 봄빛에 무르녹는 화원의 화초들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한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궁복차림의 그녀는 그린 듯 서서 창밖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뒤에서 기척소리가 들리자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머리를 양쪽으로 틀어올리고 얼굴에 애티가 다분한 한 궁인이 긴 털로 선을 두른 담비털옷을 팔에 걸고 그녀의 등뒤에 시립해있었다. 그녀는 잠깐 미간을 찌푸렸다.

"춥지 않다는데도."
"공주님, 아무리 봄이라 하지만 꽃샘추위가 더 무섭다는걸 정녕 모르시옵니까. 하물며 아직 옥체도 완쾌치 않으셨는데…"
"괜찮다. 령아…저 창밖을 보거라. 봄기운이 완연하지 않느냐. 이런 화창한 날씨에 털옷이라니."
"그래도 아니 되옵니다. 이태후마마께서 아시면 또 진노하실 테니…"

령이는 창가로 다가와 창문을 닫고 그녀를 부축해서 침상쪽으로 안내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은 아니되옵니다. 이태후마마께서 납시오면 소인은 졸경을 치르게 되옵니다."
"답답해서 바람을 쐬려고 그런다. 그분이 왜 갑자기 여기 오시겠냐. 뵙자고 연통해도 줄곧 오지 않던 분이."
"하오면…행여 공복에 바람을 맞으면 아니 되옵니다. 미음이라도 한술 뜨시옵소서."
"입맛이 없구나."
"끼니를 거르시면, 오늘 처소를 지키는 군사를 매수해 얻어낸 어화원 산책은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알았다. 대체 윗전의 위엄은 어디 간 것이냐. 궁으로 돌아온지 석달째인데 아직도 여기가 궁밖인줄 아느냐."

그녀는 밉지 않게 꾸지람을 한 후, 문득 뭔가 생각난 듯 령이를 주시했다. 령이가 그녀를 부축해 침상에 앉힌후 작은 소반에 놓인 죽그릇을 건네자, 그녀는 그릇을 받아서 한쪽에 내려놓았다.

"우리가 환궁한지…벌써 석달이 되었구나."
"네, 공주님."

령이는 잠깐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때 그 일만 없었더라만 저희는 아직 총병부에 있을것입니다. 총병님께서 갑자기 사람을 불러 저를 경성까지 호송하러 하시옵기에…자세한 내막은 궁에 들어와서 공주님께 들었사오나…"

령이는 말을 끊고 힐끗 그녀를 곁눈질 했다.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공주님께선…참으로 냉정하신 것 같사옵니다."
"내가?"

그녀는 령이를 보다가 머리를 돌려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뭘 안다고 그러느냐."

그녀의 침울한 표정에 령이는 급히 머리를 숙였다.

"황공하옵니다. 소인이 그만 말실수를 했사옵니다. 다만 그 도련님께서 상처가 심하신 듯 하여…"
"네 눈엔…그 사람의 상처만 보였느냐."

그녀는 쓸쓸하게 웃었다. 바람에 창문이 덜컹거렸고, 령이는 말없이 일어나서 창문을 굳게 닫았다. 그녀는 그런 령이의 행동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스스로를 설득하려는 듯 맥없이 중얼거렸다.

"그땐…최선이었다."
"그 최선이, 꼭 그렇게 서로 상처를 입는 것입니까."

령이는 고개를 돌려 이 한마디를 더 묻다가, 그녀의 서글픈 표정을 보고 다시 머리를 숙였다.

"소인은 다만…공주님께서 도련님과 그런 대결을 하신 것을…그런 결단을 내릴수 있으심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금지옥엽인 공주님께서 은잠을 무기로 드시다니…"
"네가, 어찌 내 고충을 알겠느냐."

그녀는 겨우 이 말을 내뱉었고, 령이는 곧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공주님의 그 고충이, 옥체를 상하게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지…"
"…"
"그 고충이 어떤 고충이든간에, 충분히 더 나은 방법이 있으셨을텐데…꼭 그렇게 상처를 입혀야 했었는지…소인은 다만 그것이 이해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령이는 그녀의 우멍한 시선에 그만 입을 다물었다.

"송구하옵니다. 소인이 아무 소리나 지껄여 공주님의 심기를 어지럽혔나이다."
"아니다…령아."

그녀는 머리를 저으며 죽그릇을 들었다.

"너도 이젠 네 생각을 과감히 말할줄 아는구나. 좋은 일이다. 매사 충동적이고 사려깊지 못한 것, 그것은 내 단점이다. 네가 잘 말했구나."

령이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다가 무릎을 꿇었다.

"소인이 어찌 공주님에 대해 왈가 왈부 하겠습니까. 단지 이번 일에 소인이 느끼는 점을 말씀 올렸을 뿐입니다."

그녀가 아무 말 없자 령이는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소인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매번 이러느냐."
"네?"

령이가 고개를 들자 그녀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궁에서 말이다. 매번 궁인들은 이렇듯 전전긍긍 지내느냐. 행여 말 한마디 잘못할까 두려움에 떨면서 말이다."
"거야 소인들의 팔자…"
"또 그놈의 팔자소관이냐."

그녀는 허리를 굽혀 령이를 잡아 일으켰다.

"밖에선 그리 발랄한 아이더니 궁에 돌아오니 성정이 변하였구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궁은 궁의 법도가 따로 있사온데…"
"내겐 그 법도대로 예를 행하지 말라 하였거늘."
"네?"
"오늘은 말귀를 못알아 듣는구나. 내겐 밖에서 하던대로 하란 말이다."
"그걸 어떻게…"
"명령이다."
"알겠사옵니다."

령이의 다소곳한 대답에 그녀는 피씩 웃었다.

"아니, 부탁이다. 이젠 윗전이니 명령이니 이런 말도 삼가하겠다. 사람과 사람사이는 원래 평등해야 하는 것이니."

령이는 그녀가 당최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른다는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다시 차탁을 의지해 앉았다.

"산책도 싫구나."
"네에…"
"궁이 지겹다…"
"네?"

령이는 머리를 들다가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한줄기 눈물을 발견하고 몸을 흠칫했다. 그녀는 얼굴을 돌려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근신하고 있어야 하는 것인지. 감옥같은 이런 생활이 지겨워 죽겠구나."
"잊으셨습니까. 근신령은 이태후마마께서 직접 내리신 거라 태후마마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궁밖으로 나가지 못하십니다."
"그러니까, 내가 왜, 그 마마의 명을 고분고분 들어야 하는 것인지."

그녀의 불만에 찬 어조에 령이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공주님…어찌 그런 말씀을…이태후마마는 폐하께서도 감히 거스르지 못하는 황궁의 지존이시고, 바로 폐하와 공주님의 친어머니 되시는 분이십니다."
"누가 몰라서 묻는 것이냐. 세상에 어머니가 딸을 이렇게 구박하는 건 처음 봤구나. 나는 그렇다 치고, 오라버니까지도 여기 발길을 딱 끊으시니 이건 사람을 피말려 죽이자는 것이 아니냐."

그녀의 푸념에 령이는 아무 대꾸도 못했다. 그녀는 침상에 쓰러지듯 누워버렸다. 궁에 돌아오는 첫날, 그녀를 바라보던 이태후의 냉랭한 눈빛은, 지금 다시 떠올려도 여전히 그녀로 하여금 화가 치밀게 했던 것이다.

"한 나라의 공주가 사사로이 궁을 탈출하고, 요동의 총병부까지 사내를 찾아가다니, 네 정녕 황실의 존엄을 짓밟고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기를 자처하는 것이냐."

우사의 호위를 받아 궁에 들어서자 바람으로, 미처 환복도 할 사이 없이 만력과 한 근엄한 얼굴의 부인이 그녀의 침소에 들이닥쳤다. 경성으로 올 동안 의원을 보였었지만, 몸의 상처가 채 호전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궁인들의 부축을 받아 겨우 일어선 그녀를 부인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오라버니…"

그녀는 의아한 눈길로 만력을 바라보다가, 만력의 난감한 표정에 차츰 그 부인이 누구라는 것을 짐작할수 있었다. 화려한 궁중복색과 정일하고 위엄있는 얼굴은, 궁인들이 자주 입에 떠올리던, 그동안 자수사에 가있던 이태후임에 분명했다. 마음속으로 어렴풋한 감을 잡자, 그에 대한 답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하여 오라버니께 제가 죽은 것으로 반포하라 하지 않았습니까."
"뭣이?"

부인은 눈섭을 곤두세웠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작은 균열이 일었다.

"네 오라비를 보아라. 일국의 황제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언제 한번 이 에미의 말을 거스른적 있었더냐. 둘이 한 어미에게서 태어났건만 네 성정은 어찌 이다지도 유연하지 못한 것이냐. 선황(융경제)께서도 너를 줄곧 걱정하셨더니 끝내는 이런 망극한 일을 저지르는구나."
"소녀를 유연하지 못하다 말씀하시나, 이 또한 어마마마의 성정을 그대로 닮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녀가 머리를 들고 따박따박 말하자 부인의 옆에 있던 만력이 어깨를 움츠리면서 그녀에게 눈짓을 했다. 그녀는 만력의 표정을 못본 척 하고 시선을 들어 이태후의 차거운 얼굴을 주시했다.

"아마 오라버니께서는 어마마마의 지엄한 분부때문에 저를 죽은 것으로 세간에 알리지 않았나 본데, 어마마마께서 그리 분부하신즉, 제가 공주로서 그대로 있어주기를 원하시는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하오면 저는 공주로서의 본분을 다하여 먼저 인성(仁圣)황태후마마를 뵈옵고 인사 드리겠으니 이만 가보게 해주시옵소서."

순간 이태후의 얼굴색이 훅 흐려졌다. 인성황태후란 유왕(융경제)의 첫 비인 진왕비였다. 진왕비는 슬하에 딸과 아들이 하나씩 있었지만 다 어릴때 요절하고 그후에 줄곧 잉태를 하지 못했다. 유왕이 황제가 되자 진왕비는 황후로 되었고 이태후는 귀비로 책봉되었다가, 만력이 즉위하자 진왕비와 더불어 태후가 되어 자성(慈圣)이라는 호를 받았다.

하지만 융경제의 정실인 진태후가 품계가 더 높기때문에 진태후의 호칭앞에 인성이라는 호를 더 붙였던 것이다. 이태후에게도 호가 있는 것이지만 사람들은 굳이 그 앞에 호를 붙여 부르지 않고 이태후라고만 불렀다. 서은이 실권이 없는 진태후의 호를 붙여 부른 것은, 자신을 보자마자 문책을 하는 이태후에 대한 도발이었다.

만력은 도저히 안되겠는지 이태후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어마마마…서안이 몸이 상해 원기를 회복하지 못한 듯 하오니 이만 쉬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건 다 금상의 탓이요."

이태후는 머리를 홱 돌려 만력을 노려보았다.

"이 에미가 궁을 비우고 자수사(慈寿寺)를 재건하는 사이, 어찌 공주를 궁에서 빼돌린단 말이요. 공주의 일은 분명 내명부의 일이라 내가 돌아와서 처리하게 두어야 하는 것이거늘."
"송구하옵니다, 어마마마."

만력은 깊이 머리를 숙였고 이태후는 여전히 노기등등해서 말했다.

"장재상이 돌아가신 후 조정의 일은 금상에게 물려주고 난 더이상 관여하지 않았소. 헌데 아직 뭣이 모자라서 공주의 일까지 이 지경으로 만든단 말이요. 내가 기어이 찾아오라고 할 때까지 금상은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게요? 어찌 저 아이가 저렇듯 상처를 입고 해괴한 모습으로 돌아오게 한단 말이요!"
"더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태후의 질책에 만력은 고개를 푹 숙였다. 서은은 일국의 황제마저 기를 펴지 못하게 하는 이태후의 권위에 은근히 가슴이 얼어붙었다. 하지만 그녀는 머리를 번쩍 들고 이태후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오라버니의 탓이 아닙니다. 제가 고집하였기에 일이 이렇게 된 것이니 오라버니에 대한 추궁은 부디 거두어들이시옵소서."
"네 오라비를 걱정하기 앞서 네자신을 먼저 걱정하려무나."

그녀를 바라보는 이태후의 눈길에 언뜻 조소가 어렸다.

"인성황태후마마를 뵙고 오너라. 다만 오늘이후로 내 허락이 없으면 누구도 널 찾지 못할 것이며 너 또한 반발자국도 방에서 나가지 못할 것이다. 내가 나오라고 할 때까지 방안에서 근신하며 자숙의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야."

그녀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으로는 적어도 만력이 자신을 도와줄 거라 믿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만력을 보았다. 그러나 만력의 태도는 그녀으 기대를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이태후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그는 연거푸 머리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던 것이다.

"어마마마의 말씀이 지당…"
"오라버니…"

그녀는 신음 비슷히 내뱉었다. 역사에서 이태후는 십년동안 만력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했지만, 장거정과 합심해 만력 신정의 밝은 정치를 펴낸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런 이태후였기에 줄곧 만력에 대해서 엄하다는건 알고 있었으나, 황궁과 신분을 버릴 각오가 되어있는 자신에게까지 이런 무단적인 조치를 강행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억이 막혀 이태후를 쳐다보았다.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는 건, 엄연한 인권 침해입니다."
"뭣이?"

다행이 이태후는 화를 내느라 그녀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 듯 했다. 그녀는 곧 자신의 실수를 느끼고 머리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명나라였다. 지금 이 시대라면 인권의 최소한의 가치조차도 인정받지 못하는 시간대였다. 제1차 인권혁명으로 불리우는 프랑스 혁명도, 지금으로부터 200년이 더 지나야 일어날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그만 맥을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벌써 석달이야."

그녀는 침상위에 앉아 령이를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감금된지 벌써 석달…오라버니는 얼굴 한번 비치지 않았고 이태후마마께선 내가 누차 청해도 끝내 오지 않는구나. 처소밖의 금의위 군사들때문에 탈출할수도 없고…이러다 정말이지 숨이 막혀 죽겠구나."
"공주님…"

령이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어쩌면 이태후마마께옵선…"

령이가 말끝을 흐리며 뜸을 들이자 그녀는 갑갑해났다.

"뭐냐, 어서 말하거라."
"혹여 공주님께서 머리를 숙이길 바라는 것이 아니온지…"
"…"
"전에 공주님께서…기억이 채 돌아오지 않았다고 소인에게 말씀하셨지요. 소인의 기억에 의하면, 전에 공주님께서 이태후마마의 말을 듣지 않으셨을 때에도, 마마께선 항상 이런 근신령을 내리셨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지나 곧 풀어주셨죠."

그녀는 머리를 기웃했고 령이는 이번엔 갑자르지 않고 바로 그녀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그건 마마의 성정을 잘 아는 공주님께서, 이틀이 지나지 않아 바로 머리를 숙였기 때문입니다."
"하…"

그녀는 고개를 숙여 허탈하게 웃었다.

"네가 지금…근신령에 석달동안 옴짝달싹 한것도 모자라, 나더러 이태후마마께 머리숙여 잘못을 빌란 말이냐."
"어차피 지금은 공주님께서 아쉬운 입장이 아닙니까."
"네가 오늘은 내 허를 여러번 찌르는구나."

그녀가 빙긋 웃자 령이도 살짝 만복을 하며 웃었다.

"소인이 가서 전해드리오리까."
"…"

그녀가 침묵하자 령이는 알았다는 듯 바로 그녀의 방을 나섰다. 그녀는 나직히 한숨을 내쉬며 창쪽으로 몸을 돌렸다. 저녁노을이 창가에 스며드는가 싶더니 얼마 안지나 주위가 어둑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휘영청 밝은 달이 황궁 높은 곳에 걸려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물끄러미 달을 쳐다보면서 령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달빛에 비친 그녀의 고즈넉한 그림자가 거의 망부석이 될 무렵, 령이가 등뒤에서 말했다.

"공주님, 이태후마마께서 납시옵니다."

그녀는 문가를 향해 돌아선 후 옷매무시를 바로잡았다. 뒤이어 문턱에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가볍게 들리며 이태후가 홀연히 그녀의 방에 들어섰다. 령이는 차를 올린후 자리를 피해 나갔고, 그녀는 휘황한 등불을 빌어 이태후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보면 볼수록 아름답고 기품있는 얼굴이어서 거의 마흔이 되는 나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왜 그렇게 보는 것이냐."

이태후의 얼굴은 딸을 대하는 부드러운 표정이라고는 꼬물만치도 찾아볼수 없는 엄정한 느낌이었다. 자신의 전생이었던 서안공주가 이런 냉담한 어머니 밑에서 얼마나 고통스럽게 지냈을까 생각하니 그녀는 새삼스레 가슴이 저렸다.

"좀만 웃으시면 참으로 고우실텐데."

그녀의 말이 뜬금없었는지 이태후가 시선을 들어 그녀를 흘낏 보았다. 그녀는 이태후의 시선을 마주했다.

"소녀 어마마마께 묻고싶은 일이 한가지 있어, 외람되이 뫼셔오라 하였으니 이 무례함을 용서해주시옵소서."

그녀의 정중한 말에 이태후는 잠시 안색을 풀었다. 서은은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면서 작게 한숨을 삼켰다. 궁에 돌아와서 상대해야 할 사람이 만력 대신 이태후라는 것이 의외였지만, 지금 상황으로서는 어쩔수 없었다.

"한 사람의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하도 뜻밖의 질문이었는지 이태후가 잠깐 멈칫하는 게 보였다. 서은은 고개를 들어 그런 이태후를 보면서 조용히 한마디 덧붙였다.

"또한 모든 부귀영화와 신분, 지위를 초개처럼 버리고, 오롯이 한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태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서은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꼭 마치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신기한 것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이태후의 그런 눈빛에 주눅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서은은 머리를 들고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여기에서 물러서면 아니 된다. 석달의 근신…생각할수록 끔찍했던 시간이다. 그녀는 황궁의 높은 담이 숨이 막혔다. 그리고 요동의 넓은 벌판이 그리웠다. 그리운 것은 비단 그 벌판만이 아니리라.

"부귀영화와 신분, 지위를 초개처럼 버린다고…"

이태후가 천천히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서은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감금된 자신의 처지에 화가 난김에 이태후를 자극하고자 던진 말이었다. 지금 고작 서른여덟살의 이태후는, 정녕 궁안의 외로운 삶에 적응되었을까. 그래서 자신의 아들과 딸에게도 그런 삶을 강요하는 것일까. 그녀의 사색을 중단하며 이태후가 입을 열었다.

"너까지 네 오라비의 걸을 걷겠다는 거냐."
"?"

서은은 이태후의 말을 미처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가 아는 만력은 신분과 지위를 초개처럼 버릴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의혹어린 얼굴에, 이태후가 쓴웃음을 지었다.

"궁궐을 나간지 반년남짓이 되더니 그동안의 일을 잘 모르겠구나. 네 오라비가 정숙빈을 귀비로 봉한 일, 네 정녕 들은적도 없었더냐."
"아…"

서은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정귀비는 만력이 평생을 사랑하고 임종에 황후로까지 봉한 여인이었고, 역사에서 눈앞의 이태후와 줄곧 사이가 좋지 못하기로 유명한 여인이기도 했다. 정귀비를 숙빈으로부터 귀비로 봉했으니 지금 만력과 이태후와의 갈등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녀가 알기론 이태후는 자신의 궁녀 출신인, 일찍 만력에게서 성은을 한번 입은적 있는 왕씨를 총애했다. 이태후가 왕씨를 총애하는 이유는, 왕씨가 만력의 아들 주상락(朱常洛,훗날의 태창제)을 낳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장거정이 죽은 후 만력의 친정을 강화하려는 이태후에게, 하루빨리 만력의 후사를 정하여 국본을 튼튼히 하는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이태후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정숙빈이 귀비로 봉해졌는데, 오라버니가 신분과 지위를 버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네 오라비가 황후도, 태자도 봉하려 하지 않고, 지어는 정사도 돌보지 않고 연일 정귀비 처소에만 머물고 있어 후궁들의 반발이 심하구나. 후궁의 반발인즉 곧 조정의 불만이라, 더이상 태자를 봉하지 않으면, 그 황위가 어찌 온전할수 있겠느냐."

이태후가 정귀비를 미워하고 왕미인과 주상락을 편애한다는 말이 사실인듯 싶었다. 서은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오라버니를 이해할수 있을 듯 합니다."
"난 이해할수 없다."

이태후는 딱 잘라서 말했다. 그녀의 눈빛은 더이상 망설이지 않고 차거운 빛을 내비쳤다.

"한 사람의 마음을 가진다는 건, 그래…잠깐 설레이고 아름다운 일이지. 하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면서까지 한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면, 차라리 평생 혼자 지내는 게 낫지 않겠느냐."
"애정관의 차이인 것 같네요."

서은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사실 이태후 역시 여인인 것을 생각하고 그녀의 감성적인 부분을 자극하고자 이런 말을 꺼냈던 것이다. 만일 이태후가 여인으로서 한 사람을 마음을 얻으려 애쓴 경험이 다소나마 있는 거라면, 어쩌면 자신의 고민을 이해할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도 곁들어서 한 말이었다.

역사에서 이태후는 젊었을때부터 융경제의 총애를 받지 못했고 융경제가 죽자 장거정에게 정신적으로 많이 의지를 했었다. 장거정이 만력의 스승이 되어서부터, 이태후와 장거정은 거의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정사를 상의했다고 후세사람들은 전했다.

장거정이 죽자 이태후는 정사에서 손을 떼고 만력에게 조정을 넘겨준 후, 자주 궁을 비우며 사찰을 재건하는 일들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어쩌면 한때 정신적인 지기였던 장거정의 명복을 비는 그녀만의 방식이 아니었을까. 서은은 한번 과감하게 찔러보기로 마음먹었다.

"삶과 죽음이 가로놓여서가 아니고, 단순히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지 못해 택한 길입니까. 하오면 그 길을 택한 어마마마께서, 여태껏 불교 사찰을 전전하면서 진정 마음의 위로를 받으셨는지요."

그녀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이태후는 또 한번 경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힐끗 보았다.

"너답지 않은 질문이구나. 궁궐을 벗어나 한동안 있더니, 네가 많은 것을 보고 들은 모양이구나."

그녀는 이태후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저는 그렇게 살지 않으렵니다."
"…"
"어마마마와 오라버니의 길까지 제가 왈가 왈부 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오나 제 길은 제가 분명히 택하렵니다."
"그 길이 요동이냐."
"그러하옵니다."

이태후의 복잡한 시선이 그녀와 고집스러운 시선과 마주쳤다. 그녀의 눈에 비치는 결의에 이태후는 살짝 미간을 구겼다.

"왜 하필 그 아이냐."
"하필이라니…혹 그 사람의 신분이 꺼려지십니까. 어마마마께서도 그 사람이 출사를 하지 않은 백신이라 공주에겐 어울리지 않다는 말씀이옵니까."
"그 말이 아니다."

이태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시선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아마 이제는 그녀에게 말해줘야 할 것 같다는 비장함마저 감도는 표정이었다.

"그 아인, 네가 공주라는 걸 알고있느냐."
"처음엔 신분을 숨겼으나 나중엔 알게 되었습니다."
"알고는 가만히 있더냐."

그녀는 눈을 감고 잠시 숨을 들이켰다. 고통스러운 기억이었지만 떠올리지 않을수 없었다.

"제게 크게 분노하고…실망하는 듯 했습니다."
"그렇겠지."

이태후가 가볍게 냉소했다. 서은은 급히 말을 이었다.

"그 사람으로선 충분히 그럴만 합니다. 제가 처음부터 여인의 정체와 신분을 속였기에…"
"여인이란 걸 알고는 분노하지 않았는데, 공주란 걸 알고는 왜 실망한다더냐."
"그건…"

그녀는 이태후가 자신들의 사연을 환히 알고있는 것에 의혹을 품을 여유가 없었다. 이태후의 다음 질문이 곧 이어졌기 때문이다.

"공주가 백신을 따르겠다는데, 놀라고 황송할 것까진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분노하고 실망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느냐."
"그건…애초에 오라버니께서 혼사말을 꺼내셨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는데…그러니까 그 사람 입장에선…저희가 정당한 방법이 아닌 편법으로 이 혼사를 강요한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다고 치기엔, 너와 그 아이와의 그동안 쌓아온 감정이 그리 허무한 것이였더냐."

서은은 그만 머리를 숙였다. 석달동안 꾹꾹 눌러온 긴 설음이 이태후의 몇마디 말에 바로 눈물로 흘러내렸다.

"전…할말이 없습니다."
"바보같은 아이로구나."

이태후는 담담히 말했다. 말은 그렇게 하였으나 눈물을 떨구는 딸의 애처로운 모습에 가슴 아파하는 모정 같은 건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냥 아주 평범한 사연을 보듯 그렇게 그녀를 보았다.

"내가 알려주랴? 그 연유를."

그녀는 눈물을 닦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태후의 다음 말에 그녀는 그대로 경직되고 말았다.

"그건 내가…바로 그 아이의 원수이기 때문이다."
“네?

그녀는 잠시 멍해 있다가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지금 이태후가 그녀를 상대로 농담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건 뭐 명나라 버젼 로미에와 쥴리엣인가. 왠지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허탈한 웃음은 이태후의 한치의 흔들림도 없는 엄정한 태도에 차차 사그라 지고 말았다. 그녀는 입가에 작은 경련이 일었다.

"원수…라니요."

그녀가 공주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의 눈빛이 떠올랐다. 그동안 줄곧 이해되지 않았던, 아니 이해할수 없었던 그의 눈빛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 눈빛은 그녀가 여자라는 것을 알았을 때에도, 그리고 교주라고 오해했을 때에도 전혀 보이지 않던 한가닥 증오의 눈빛 같은 것이었다. 그 증오속에는 회한과 체념, 그리고 애정의 느낌도 섞여있었다는 것을, 그녀는 석달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기억해낼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그의 한마디.

"원수를 지기로 착각했었다니."

바로 그 말이었었구나…원수라는 말이.

"말도 안됩니다."

그녀는 신음하듯 내뱉었다. 그리고 의심이 가득찬 눈초리로 이태후를 바라보았다. 명황실에서는 공주라는 신분이 그렇게도 대단한 건가. 이런 허무맹랑한 연유를 지어낼만큼, 그래서라도 그녀와 그를 갈라놓을만큼 대단한 존재일까. 이깟 신분…버리면 되었다. 어차피 애초에 그녀의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 사람, 어마마마와 어떤 인연이든간에…저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어마마마와 어떤 원수 사이든지 저랑은 상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저 제가 이 황궁을 떠나게만 허락해주십시오."
"내가 그 허락을 해줄 것 같으냐."

이태후가 쌀쌀하게 웃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태후나 만력의 허락이 없이 경비가 삼엄한 황궁을 벗어난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녀의 분노를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이태후는 여전히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넌 내 말을 믿지 않는구나."
"어찌 믿겠습니까. 어마마마께서 왜 그 사람과 원수지간입니까. 그 아버님도 명의 녹봉을 받고있는 마당에."
"말하자면 사연이 길지만."

이태후는 손끝으로 잠시 차탁위의 찻잔을 어루만졌다.

"아마 그 아이가 출사를 원하지 않고 부마자리를 거절한 것도 이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이 출사와 혼사를 거부한 것은 오라버니 때문이거든요…서은은 입끝까지 올라온 말을 삼켜버렸다. 굳이 이태후에게 만력의 정체를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여하튼 그 아인 나라면, 그리고 황실이라면 이를 갈 것이다. 만일 언제라도 이 경성에 올라온다면, 그건 그 아이로서는 복수의 길을 택한 것이니라."
"대체 어떤 깊은 원한이 있어서 그리 척을 진 것입니까."

드디어 참지 못하고 그녀가 물었다. 이태후는 입가에 허구픈 미소를 띄웠다.

"낸들 아느냐? 나도 그것이 궁금하다만."
"네?"

그녀는 이해할수 없어 이태후를 한참이나 보았다.

"그럼…어찌 그 사람이 황실을, 어마마마를 미워한다고 단정 지으십니까."
"아마 선황(융경제)께서 유왕시절 그 아비를 탄핵하신 적이 있지. 그 일로 몇년간 이성량의 출세길이 막히고 그 어미가 그로 인해 병들어 세상을 하직했다더구나. 내가 알고있는 것도 이뿐이다."
"…"
"장재상 생전에 난 재상의 뜻에 따라 이성량을 중용했고 그 아들 역시 관직을 내리려 했으나 그는 아직 과거를 보지 않았다는 핑계로 사양했었다. 후에 무과 장원급제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이번에도 관직은 물론 공주와의 혼사까지 거절했다니 나에 대한 그 원한이 얼마나 깊고 큰지 알수 있지 않겠느냐."
"…"
"다만 나도 의아한 건, 선황께서 그 아비를 탄핵했다 하여 그 원한이 이처럼 후대에까지 미쳤다는 것이다. 조정에서 탄핵하고 탄핵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수 있는 일이거늘."
"아니에요. 꼭 뭔가 다른 연유가 있을 거에요."

그녀의 중얼거림을 이태후는 듣지 못한 듯 했다. 이태후는 말을 끝맺었는지 다시 그녀를 유심히 보았다.

"네가 이번에는 꽤 오래 버티는구나."
"제가요?"
"그래, 아직도 머리를 숙이지 않을 셈이냐."
"제가…어마마마께 머리를 숙이면 이 황궁을 떠나게 해주시겠습니까."

그녀의 질문에 이태후는 어이없다는 기색을 지었다.

"황궁을 떠나다니? 여태 그렇게 말해주었는데도 아직 알아듣지 못했구나. 어림도 없는 일이다."

역시…몸속 깊숙이 좌절감을 밀어넣으며, 그녀는 이태후를 향해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저 역시 머리를 숙일수 없습니다. 누추한 곳에 어마마마를 더이상 만류하지 않겠습니다."

그녀는 문밖을 바라보며 언뜻 언성을 높여 불렀다.

"령아, 어마마마를 처소까지 뫼시거라."
"령이를 부를것 없다. 나 혼자 가겠으니."

이태후는 몸을 일으켜 문을 나서려다가 다소 위압적인 눈길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런 이태후의 눈가에 얼핏 옅은 미소가 스쳤다. 그녀는 그것이 조소처럼 느껴져서 한마디 더 내뱉었다.

"근신중이라 멀리 배웅하지 못하는 점 용서하시옵소서."
"참으로 고집불통인 아이로구나."

이태후는 가볍게 머리를 끄덕인 후 들어서는 령이를 스쳐 문밖으로 나갔다. 령이는 이태후를 배웅한 후, 다시 방안으로 들어와 서은에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공주님…"
"뭐냐."

서은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돌렸고, 령이는 어깨를 움츠리며 뒤로 물러섰다.

"비밀히 아뢸 일이 있어 왔사온데 그리 퉁명스럽게 말씀하시니…"
"지금 내게 무슨 일이 이 궁을 빠져나가는 일보다 더 중요하단 말이냐."

서은의 말에 령이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령이의 눈빛에 알릴락말락 옅은 웃음기가 실렸다.

"바로 그 일이옵니다."

서은은 급히 시선을 들었다. 령이는 잠시 문밖을 의식하다가 그녀의 곁에 바싹 다가서서 소곤거렸다.

"아까 이태후마마를 뫼시러 가던중, 한 사람을 뵈었습니다. 제게 공주님의 안부를 묻더군요."
"누구…"
"금의위 지휘사님입니다. 공주님께서 이 황궁을 빠져나가려면 그분의 도움을 받는 것이 제일 확실하지 않겠습니까."
"금의위 지휘사…"

서은은 아까보다 한결 더 퉁명스런 어조로 대꾸했다.

"그 사람은 적어도 두세번은 배신때린 사람이야. 우리가 그 사람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다고."

그녀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우리라는 두글자가 그녀의 가슴을 실낱같이 스쳐 마음이 아프게 했던 것이다. 그녀는 금세 머리를 흔들어 기억들을 털어버린 후, 방금전 령이의 말을 되새기다가 저도 모르게 빙긋 웃었다.

"하긴 뭐, 그의 입에서 요동과 명교의 소식 정도는 알아낼수 있지 않을까. 지금 불러올수 있겠느냐."
"지휘사님 말입니까."
"그럼 또 누가 있겠느냐."

그녀가 밉지 않게 혀를 차자 령이는 바로 방을 나갔다.

……

"불러 계셨사옵니까."

잠시후 금의위 지휘사–우사는 궁밖에서 볼때와는 판이한 모습으로 서은의 처소앞에 시립하고 서있었다. 우사였을 때는 모든 것에 무심하고 심드렁한 모습이었다면, 지휘사인 지금은 황궁을 지키는 호위사 답게 정중하고 위엄있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석연한 미소를 지었다. 우사는 아무 표정 없이 머리를 숙이고 서서 그녀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오랜만입니다."

그녀의 말에 우사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공주님."
"비밀을 공유한 사이에 이런 정중한 예는 필요없지 않겠습니까."

서은은 여전히 미소를 지어보였다. 환궁하는 길에 우사는 그녀가 무예를 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녀는 우사가 만력의 신분을 알았다는 사실을 각자 함구하기로 약조했던 것이다. 그녀의 말에 우사는 더욱 깊숙히 머리를 숙여보였다.

"제게 시키실 일이 있으신가 봅니다."
"역시 눈치하고는."

서은은 잠깐 손을 들어 좌우를 물리쳤다. 령이가 처소 밖에서 망을 보았다.

"제게 근신령이 내려진 걸 금의위 지휘사님이 모르시진 않으시겠지요. 이것 또한 금의위의 소관이니까."

우사는 대답대신 약간 머리를 숙였고, 서은은 한결 찬연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요 몇일 월색이 청정하니 잠깐 바람을 쐬어 갑갑한 마음을 위로받자 합니다. 하오니 지휘사님께서 부디 너그러이 봐주시기 바랍니다.”
"소직이 봐드리는 건 어렵지 않사오나 이참에 상아가 청학을 타고 월궁으로 가실까 걱정이 태산입니다."
"본래 상아를 세상에 잡아가둔 것은 인간의 사악한 욕심때문이지 않을까요."

그녀의 웃음섞인 말에 우사는 잠깐 머리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주시했다.

"상아는 월궁으로…돌아가게 되어있군요."
"…"
"그 월궁에는…찍어도 찍어도 쓰러지지 않는 고집불통 나무 한그루 내놓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녀의 얼굴 한가득 넘치는 아름다운 미소를 바라보며 우사가 나직히 말했다. 궁중 어디선가 해(亥)시를 알리는 둔탁한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가 사라질 무렵, 우사는 결심이라도 내린 듯 머리를 들었다.

"월색구경은 언제가 좋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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