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이튿날 아침부터 총병부에는 검은 옷을 입은 건장한 사내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이여백은 만력과 이성량, 우사와 봉선까지 서은의 처소로 비밀히 불러들였다. 침소 옆에 달린 자그마한 건넌방에 다들 신중한 기색으로 모였고, 이여백은 서은을 부축해 제일 안쪽 편안한 자리에 앉혔다.

“네 얼굴을 보니 아직 차도를 보이지 않는구나. 대체 이놈의 어의들은 왜 아직도 당도하지 않는 것이냐!”

만력이 눈살을 찌푸리자 우사가 머리를 숙여보였다.

“이미 제일 빠른 말을 보내어 어의를 데려오라 하였습니다.”
“어의를 부르셔도 별다른 방법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이여백은 만력을 향해 말했다. 그는 잠깐 서은을 돌아본후 다시 여럿을 향해 차분히 입을 열었다.

“지금으로서 이 사람의 건강을 회복시켜줄 사람은 단 한사람밖에 없다 하였습니다.”
“그게 누구냐.”

이성량이 다그쳐 묻자, 이여백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분은 이곳에 있지 아니하고, 저 멀리 남쪽으로 오령산맥 이남에 거주하고 계십니다. 그분을 모셔오려면 민간 조직의 힘을 빌어야 하온데, 이 점에 대해 아버님께서 윤허하지 않으실까 걱정되옵니다.”
“명교 말이냐.”

이성량의 담담한 말에 이여백은 얼굴을 들었다.

“아버님…”
“요즘 부쩍 내 집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정체를, 정녕 내가 모를 것이라 생각했느냐.”

이여백은 이성량을 향해 머리를 숙여보였다.

“소자 불효막심하여 아버님께 심려를 끼쳐드렸습니다.”
“이건 그 아이의 잘못이 아니네.”

한켠에서 잠자코 있던 만력이 입을 열었다. 그는 난감한 기색으로 이성량을 보며 말했다.

“실은…”
“폐하…”

이성량은 머리를 들어 만력의 말을 중단했다.

“소신 자녀교육에 힘쓰지 않아 여백으로 하여금 어두운 길을 걷게 하였으나, 그 천성이 악하지 않음을 다행으로 생각하여 지금까지 줄곧 모르는 척 하였사옵니다.”
“…”
“비천한 자식은 잘못을 깨닫고 그 조직을 멀리하면 그만이지만, 성골이신 폐하께서는 잠깐 평복으로 민간에 내려오시기만 해도 민심이 흉흉해지는 법이니 하물며 명교겠습니까.”
“지당한 말이네…”

만력의 말에 이성량은 깊숙히 고개를 숙였다.

“부디 소신의 마음을 헤아려주시고, 소신 또한 폐하를 향한 소신의 우려가 기우이기를 바라옵니다.”
“경의 뜻을 잘 알겠네. 그들을 이용하는 일은 이번이 마지막이니 한번만 봐주게.”

만력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서은의 가슴 한켠에 뭔가 실낱 같은것이 스쳐지나갔다. 누이동생에 대한 만력의 사랑이 이렇게 극진한 것임을. 만일 그가 자신이 진짜 서안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서방님께서 방도가 있다 하였으나, 그것이 오라버니와 아버님을 난감하게 하는 일이라면 저는 사양하겠습니다.”

그녀의 미약한 말에 만력과 이성량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듯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절대 그런 것이 아니다.”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얼핏 웃음을 흘렸다. 방안의 분위기가 잠깐 느슨해진 틈을 타서 이여백이 그들 둘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만일 폐하께서 믿어주신다면 제게 북방 명교를 움직일수 있는 전권을 주시옵소서. 제게 한가지 방법이 있으니 그 방법만 행하고 바로 해산토록 하겠습니다.”

이여백의 말에 우사가 잠시 눈섭을 꿈틀했다. 봉선의 시선이 그의 얼굴에 머물렀다가 가만히 거두어졌다.

“그 방법이란 무엇인지 먼저 말하거라.”

만력이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이여백은 머리를 들고 또렷하게 말했다.

“건곤대나이를 수련한 고수들을 집결시키겠습니다.”

만력의 얼굴에서 궁금증이 놀라움으로 변했다.

“건곤대나이를? 명교에 그 보법을 아는 사람은 몇 없을터.”
“어찌 몇뿐이겠습니까. 애초에 호교법왕이 그 예가 아니겠습니까.”

이여백이 담담히 대답하자, 만력이 머리를 가로저으면서 말했다.

“그넘은 원래부터 눈독을 들이고 수련했던 것이고.”
“이태후마마도 그 보법을 알고 계십니다.”

쨍그랑…하는 소리는 분명 만력이 들고있던 찻잔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그 순간 서은의 기억속에도 언뜻 스치는 장면이 있었다. 보리수가 있는 영화전 마당에서 이태후의 탁월한 경공…그랬던가…그랬었던가…그랬었구나…

“어마마마께서…보법을 아신다니…그게 무슨 소리냐.”

믿지 못하겠다는 듯 만력이 되물었다. 서은의 마음속에도 차츰 의혹이 파문처럼 일기 시작했다. 그날 자신과 이여백에게 선보인 이태후의 솜씨로 보아 그녀의 무예는 결코 등한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작 아들인 만력은 여태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니…

그러고보니 그날 만력이 당도한 다음 이태후가 더이상 무공을 쓰지 않았던 것도 어렴풋이 떠올랐다. 대체 무엇때문에 이태후는 자신의 무예를 감춰온 것일까.

“만일 호교법왕이 이태후마마님의 심복이였다면, 마마님이 무예를 아시는 것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허나…”
“지금 중요한 것은 어차피 이미 유출된 건곤대나이 보법을, 제가 사람을 구하는 일에 쓰고자 함입니다.”

이여백의 어조는 담담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기대를 품은 채 만력을 응시하고 있었다. 놀라움을 거둔 만력은 생각을 더듬는 듯 하다가 다시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어떻게 움직일 것이냐? 어디 네 생각을 말해보거라.”
“건곤대나이 보법을 익힌 명교의 고수라면 그 직위와 인맥 또한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들을 남부로 파견해 의원을 모셔오기보단, 그 인맥을 이용해 남부의 명교에서 직접 북상하게 하는 편이 더 빠릅니다. ”
“몇일이 걸릴 것 같으냐.”
“빠르면 수일, 늦으면 십수일만에 모셔올수 있을 듯 합니다.”

만력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드디어 고개를 들어 이여백을 보았다.

“이 일은 어렵지 않다. 서안에게 명교의 옥패가 있으니 그걸로 명교를 움직이거라. 다만 그동안 서안은 어떡하겠느냐.”
“여자의 일은 여자가 돌볼 것이니 폐하께서는 공주님을 소인에게 맡겨주십시오.”

봉선이 만력의 말을 받았다. 그녀는 만력을 향해 한번 만복의 예를 올린후 머리를 돌려 우사를 돌아보았다.

“령이와 함께 성심을 당해 공주님을 모실 것이니, 지휘사님은 도련님을 도와 명교를 움직이는 일에 힘을 보태십시오.”
“언제부터 그쪽이 날 시키게 되었는가.”

우사는 투덜거리다가 만력이 시선을 주자 바로 머리를 숙였다. 잠시후 그는 고개를 쳐들고 이여백에게 물었다.

“그런데…우리가 모셔와야 할 의원은 대체 누군가.”
“마테오 리치, 명의 이름으로는 이마두(利瑪竇)신부님이라고 합니다.”

이여백의 말에 서은을 제외한 방안의 다른 사람들은 눈을 크게 뜨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

“남쪽으로 가서 오령산맥을 넘으면 원지명이 광동성 향산현이라는 지방이 있습니다. 일찍 1557년에 해적 정벌을 원정한 공적으로 포르투갈인에게 거주권을 준 곳으로, 현지에서 포르투갈어로 마카오라고 하는 곳입니다. 바로 그곳에 가면 이마두신부님을 찾을수 있습니다.”

서은대신 이여백이 자세한 설명을 했다. 만력이 크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곳에 그 명의가 있단 말이지. 그런데 그렇게만 말해서 어떻게 찾는다는 건가.”
“그분을 찾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분은 작년에 그곳에 정착하여 선교를 하시는 분인데 이탈리아적 외국인입니다. 외모가 현지인들과 크게 달라서 원래부터 주목을 받고 계신지라, 그곳에 도착하기만 하면 바로 그분의 행적을 탐문할수 있을 것입니다.”
“외국인이라면…말이 통하지 않을텐데…”
“그분은 이미 명의 언어를 습득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사람이 있는줄을 알았느냐.”

이번에는 이성량이 이여백에게 물었다. 이여백은 대답대신 서은을 돌아보았다. 서은은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방안의 사람들이 모두 그녀를 보았고 그녀는 미리 준비해둔 말을 꺼냈다.

“작년에 우연히 남쪽에서 오신 분께 들었습니다.”
“그렇군…”

이성량은 고개를 끄덕인 후 얼굴 한가득 환한 웃음을 지으며 여럿에게 말했다.

“장의원에게 들었는데 집안에 희사가 있다 하였습니다. 드디어 이 사람이 기다리던 손주를 보게 되었습니다…”
“아버님…”

이성량의 말에 서은이 얼굴을 붉혔고, 방안의 사람들은 너도나도 이성량에게 치하를 했다. 한참 법석대다가 이성량과 만력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들 따라 일어났다. 만력은 그래도 서은에게 한참 주의를 주고는, 그녀가 일일히 대답해서야 문밖으로 나섰다.

그들이 나가자 방안에는 네 젊은이만 고즈넉히 남았다.서은이 이여백에게 가만히 눈짓을 하자, 이여백은 눈치를 알아차리고 허리를 굽혀 그녀에게 말했다.

“바람이 찬데 이젠 안으로 들어가야지.”

그는 가뿐히 그녀를 안아들더니, 고개를 돌려 우사를 바라보았다.

“형님은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일식경후 다시 나오겠습니다.”

그들은 안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문을 닫고 서로 웃음을 나누었다. 그녀를 자리에 눕히고 이여백이 옆에 앉자, 그녀가 살짝 혀를 차며 말했다.

“일단 자리를 만들어주긴 했는데, 저들이 그 눈치를 모르겠습니까.”
“눈치를 알라고 그러는 거지. 어차피 저들은 내가 나가지 않을 것도 알고 있을 테니까.”

그가 미소를 지어보였다. 검고 깊은 그의 눈동자를 보면서 그녀도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다 그가 문득 웃음을 거두고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마치 마음에 새기듯,그가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깊게 응시했다.

“어떻게 당신이 여기로 오게 된 걸까.”

그녀는 고개만 옆으로 갸웃할뿐, 미처 대답을 하지 못했다. 돌연 그가 몸을 숙이며 입술을 포개왔기 때문이다. 심장이 세차게 뛰는 이유는 단지 그의 행동이 갑작스러워서가 아니리라. 잠시후 그의 온기가 멀어지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제가 여기 온 것이…뭐가 어때서요?”

그녀는 부러 새침하게 되물었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따뜻함이 가득차 있었다. 더이상 그의 시선을 마주하느라면 자신의 속내를 들킬것만 같아 그녀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어쩌자고 그런 것인가…이토록 절륜한 남자를…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을…지어는 그녀가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것을 알면서도 이토록 사랑해주는 정인(情人)을…

“좋아서.”
“참…”
“당신이 오지 않았다면 내가 갈수 있을까.”

훅 들어오는 그의 대답에 그녀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문득 머리속으로 그 어떤 섬광이 스쳤다. 그럴수 있을까…그럴수나 있을까…어리석은 기대가 피어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그는 역사의 인물이고, 역사에 없어서는 안될 인물인 것을. 명부에서 지켜보는 한, 그는 이대로 이생을 살아야 하는 것임을…

“그래서 왔잖아요. 제가.”

그녀가 서글픈 속마음을 감추며 짐짓 화사하게 웃었다. 공허한 눈빛과 냉랭한 심장대신, 삶에 대한 의욕과 그녀를 향한 열정을 가슴 한가득 품고있는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면서, 그녀는 조심스럽게 머리를 흔들어 헛된 생각들을 털어냈다.

“그리고 하늘의 축복도…함께 가지고 왔어요. 그러니 이젠 염라대왕도 하늘의 뜻은…거스르지 못할거에요.”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 그들은 서로의 시선을 마주한 채 옅은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그의 따뜻한 미소에 그녀의 모든 번뇌가 하얗게 지워졌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가에 언뜻 이슬이 맺혔다.

세상은, 어쩌면 명부가 아니라 하늘의 뜻이 운명을 주재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무리 만나지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사랑했다 할지라도…그녀는 지금의 이 설렘을 조금 더 즐기고, 봄바람같이 달콤한 행복을 조금만 더 누리고 싶어졌다.

또한, 정녕 명부에 기재된 그들의 운명이 정해졌다 해도 하늘이, 그토록 높은 운명의 주신이…이런 자신들의 애틋한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눈감아주지 않을까 하는 부질없는 바람이…차츰 그녀의 가슴속에서 일었다.

그런 그녀의 침소밖 건넌방에서는, 시간이 흐르는 것을 잊어버린 또 다른 한쌍의 연인이, 오래동안 묻어두었던 자신들의 감정을 마주한 채, 서로 눈물만 쏟고 있었다.

……

열흘후, 한산해진 총병부 후원으로 한 불청객이 불쑥 찾아들었다. 이여백의 제안대로 명교의 고수들이 집결되고 우사를 위수로 한 고수들이 남쪽을 향해 출발한 후의 일이었다. 그날도 만력과 이성량이 서은에게 문병을 와있었고, 이여백은 대청쪽으로 나갔다가 그 불청객을 안내해서 별당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철신이 닳도록 찾아다녀도 결국은 등잔밑이 어두웠다는 말이 그른데 없군요(踏破铁鞋无觅处 得来全不费工夫)…”

방안의 사람들은 이여백의 말보다는, 연갈색 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불청객의 기이한 외모에 정신이 팔렸다. 이성량이 얼떠름한 기색으로 물었다. 

“이분은…”
“이분이 언녕 북방에 올라와 계실줄 그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봉선과 령이의 부축을 받아 일어선 서은은 고개를 들어 그 사람을 유심히 보았다. 방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손으로 자기 이마를 한번 가르킨 후, 다시 자기 몸에 십자를 그리고나서 두손을 모으고 조용히 머리를 숙였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만력과 이성량은 어리둥절해서 서로 쳐다보기만 했다. 봉선과 령이도 숨소리를 죽인 채 가만히 서있었고, 서은은 그 사람을 보다가 알릴락말락 고개를 끄덕였다.

“이마두(利瑪竇)…신부님?”

긍정이었지만 그리 확신에 찬 어조는 아니었다. 그녀 역시 이 순간은 이마두신부의 출현이 놀랍기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보다 더 놀란 사람은 바로 이마두였다.

“총병부에 깊이 계신 부인이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 게다가 저의 중국 이름까지 아시고…”

유창한 명의 말이었다. 명에서 유교와 그리스도교를 접목시켜 일시를 풍미한 선교사답게, 이마두의 말과 행동에는 유교를 깊이 이해한 유학자의 기품이 드러나고 있었다. 사대부 복식을 한 이마두의 차림을 잠시 훑어보던 그녀는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띄웠다.

“저는 신부님이 어떻게 벌써 왔는지 더 궁금하군요. 지금쯤 신부님은 마카오나 조경(지금의 중국  광동성)에 계셔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녀의 말에 이마두는 또 한번 놀랍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그의 그런 행동에 령이가 얼굴을 돌리고 웃음을 참는 게 보였다. 이마두는 서은을 깊이 응시하다가 말했다.

“오오, 북진을 위한 저의 행적조차 낱낱이 아시다니 놀랍습니다. 대체 부인은 뉘십니까.”
“저 역시 신부님이 이토록 빨리 북진을 시도한다는 것과, 또한 그것을 행동에 옮겨 북상한 것이 놀랍습니다.”

그녀가 차분하게 말했다. 이마두는 한참 그녀를 주시하다가, 두손을 맞잡아 읍을 한후 조용히 말했다.

“실은 경성 입성을 위해 잠시 조경을 떠나 북상하는 동안, 우연히 주점에서 한 강호 조직의 담화를 듣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런 차림으로 망건까지 쓰다보니, 그들도 얼핏 보아서는 저를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마침 총병부에서 의술에 능한 사람을 찾는다 하여, 제가 여러날 길을 조여 온 것인데 이리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어찌 그들의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습니까.”

이여백이 묻자 이마두는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강호에서 떠도는 말을 어찌 그대로 믿겠습니까. 제가 이리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편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다들 그의 신중함에 머리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가 다시 서은을 돌아보며 말했다.

“불가에서는 옷깃을 스쳐도 인연이라 하였습니다. 부인께서 부인의 병을 이 이마두만이 고칠수 있다고 하였은즉, 저 역시 부인의 이런 믿음에 보답을 해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신부님.”

이여백이 정중히 머리를 숙이자, 만력과 이성량도 따라서 머리를 숙여보였다. 하지만 머리를 숙이다 말고 만력이 급히 헛기침을 해버렸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은은 드디어 참지 못하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창문살 사이로 정오의 햇살이 화사하게 비쳐들어오고 있었다.

……

“신부님…”

서은은 방 한가득 날라온 과일과 야채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조용히 이마두를 불렀다. 후자는 온몸이 땀벌창이 되어 열심히 뭔가를 적고있다가, 그녀가 부르자 그제야 얼굴을 들었다.

“부르셨습니까, 부인.”
“혹시 시중에 과일난전을 차리시려는 겁니까.”

그녀의 말에 이마두는 피씩 입꼬리를 올렸다.

“부인께서 농을 할 기운이 있으시니 아마도 제 치료법이 가능할 듯 합니다.”

그녀는 웃으려다 말고 눈앞의 과일과 야채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알기로는…그러니까 제 생각으로는 신부님이 제게 서약을 쓰실줄 알았습니다. 최대한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로…”
“오우…안됩니다.”

이마두신부는 크게 두손을 가로저어 보였다. 그의 과장된 몸짓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회임중에 한약은 웬만해서는 쓰면 안되고 서약도 한달에서 석달사이는 절대 쓰지 못합니다.”

그는 다시 머리를 숙이고 쓰던것을 계속하더니, 한참후에야 드디어 붓을 내려놓고 그녀를 똑바로 보았다.

“철분은 아직 섭취하기 이르오니 먼저 허약한 몸을 춰세울수 있는 단백질, 비타민을 들이셔야 합니다. 지금 계절에 구할수 있는 과일과 야채는 다 구했으니, 오늘 이 시각부턴 제가 짠 식단에 따라 엄격히 식사를 하시기 바랍니다.”
“신부님, 저는 의원을 구했지 요리사를 구하진 않았습니다.”

서은의 농담에 이마두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웃는듯 마는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만병에는 약보다 식이요법이 더 낫다는 도리를 부인은 모르십니까.”
“전 그런건 모릅니다. 저는 신부님이 자연과학과 인문학에 연구가 깊다는것은 알지만, 이처럼 요리에도 일가견이 있다는 것은 오늘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누가 요리에 일가견이 있다는 건가.”

문득 문밖에서 말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만력과 이여백이 함께 방안으로 들어섰다. 이마두는 뒤로 둬걸음 물러서서 읍을 하며 그들을 맞이했다. 서로 인사를 주고받은후 이여백은 서은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시름을 놓은 듯 머리를 끄덕였다.

“어제보다는 퍽 나아진듯 합니다. 이젠 심려 마시고 상경하십시오.”
“오라버니께서 상경하시려구요?”

서은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뒤로 기대앉자, 만력은 전에없는 무거운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경성에 일이 있어…여기선 더이상 지체할수  없구나.”
“오래 비우셨으니 이젠 가보셔야 합니다. 저는 걱정하지 마시고 얼른 가보십시오.”

그녀의 말에 만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그때 령이가 방안으로 들어오더니 허리를 굽혀 이마두에게 말했다.

“분부하신대로 주방에 일러 앞으로는 식단에 따라 음식을 들이게 했습니다.”
“알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마두가 머리숙여 답례를 하자, 령이는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저어…제게는 하대를 하셔도 됩니다. 저는 이 방에 딸린 시비입니다.”

이마두는 머리를 들어 령이를 보더니 아까 서은에게 하던것처럼 두손을 흔들며 말했다.

“오오…그렇지 않습니다. 무릇 사람이라면 누구나 존엄과 개성이 있고 또 자신의 능력과 가치를 인정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령이는 어안이 벙벙해진 얼굴로 서은을 돌아보았다. 그런 령이의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차 있었다. 그녀로서는 이마두신부의 말이 천서처럼 들렸는지도 몰랐다. 서은이 그녀를 바라보며 웃어보이자, 그녀는 잠깐 어쩔바를 몰라하다가 머리를 숙인 채 급히 방안을 빠져나갔다.

“신부님.”

서은은 고개를 들어 이마두를 바라본 후,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인문주의를, 이 나라 백성들이 터득하기엔 아직 시간이 걸릴 듯 합니다.”

이마두신부는 새삼 경이로운 눈길로 한참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어찌 부인께서 르네상스까지 아십니까.”
“아, 그건…”

그녀는 잠시 고개를 돌렸다. 한쪽에서 만력이 이여백에게 뭔가를 분부하고 있어서, 전혀 자신의 말에 주의를 돌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이마두를 보았다.

“우연히 주어들은 말로 신부님 앞에서 망신을 자초하게 되었습니다. 그만 잊어주십시오.”
“아닙니다. 부인께선 너무 겸양하십니다.”

이마두는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그의 눈빛에 잠깐 허탈한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역시 저는 우물안 개구리였습니다. 저는 북방에 이런 개명인사가 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지금껏 명의 인물에 대한 제 짧은 판단을 가지고 행동에 옮겼던 일들이 심히 부끄럽습니다. 이런 제가 여기 사람들에게 그 무엇을 가르칠수 있다고…”
“그렇게 자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녀는 청정한 눈길로 이마두신부를 보았다. 눈앞의 신부는 결코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동서방 역사학, 어학, 인문학을 정통하고 명의 유교와 불교 사상을 꿰뚫고있는 최초의 세계인으로, 그리스도교나 천주교의 포교 사상과는 달리 명을 알고 명의 유교와 불교 교리를 존중했으며, 어쩌면 종교와 과학이란 결코 분리되지 않은 하나임을 몸소 보여준, 가장 현실적이고 이상적인 구도자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자신의 말 한마디때문에 실의에 빠지다니…그녀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신부님께서 명에 오신 것은 전도가 목적입니까, 아니면 이 땅에 선진문화를 전파하기 위해서입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전도가 목적입니다.”

이마두는 시선을 들어 그녀를 보았다.

“하지만 인도를 거쳐오면서 한가지 생각이 마음에 깊이 와닿았습니다. 인도인에게는 서양문명속에서 자라난 그리스도교를 강요할수 없으며, 서방 세계와 구분하여 그들의 문명속에 들어가 형제의 사랑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그녀가 작게 머리를 끄덕이자, 이마두는 계속하여 말을 이었다.

“그것은 명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그렇지요.”
“하여 명에 들어온 후에, 저는 처음에 승려복을 입고 지금은 유복을 입었습니다.”
“…”
“옷은 자주 바꿔지지만 제 마음속의 신앙은 항상 하나입니다.”
“신부님은 참으로 대단하신 분이세요…”

그녀의 말에 이마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과찬이십니다. 제가 지금 와서 놀란것은, 명은 하나의 왕국이라든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명은 실로 혼돈의 세계 그 자체입니다. 이속에서 제가 가야 할 길이 얼마나 길고 험난할지 상상이 갑니다.”
“그래서 실의에 빠지신 건가요.”

그녀는 조용히 웃었다. 이마두의 말은 명에 새로운 문명를 가지고 온 한 성직자의 번민이었다. 하지만 유구한 세월 이 땅에 뿌리박은 거대한 문명과 역사를 마주하게 된 지금 그는, 구경 어떤 방법으로 서구와는 전혀 다른 문명권에 카톨릭 중심의 천국을 만들 것인가. 그녀는 이마두를 주시하다가 다시 나지막한 어조로 말했다.

“신부님은 앞으로, 명에서 오랜 세월을 거쳐 전도를 위한 혈성 어린 노력을 하시게 될것입니다. 지금은 단지 그 첫걸음을 뗀 작은 시작일뿐입니다.”
“네, 부인…”
“만일 괜찮으시다면, 제가 명에서 전도할수 있는 지름길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부인께서 어떤 좋은 방법이 있습니까.”

이마두의 눈빛이 빛났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여기 일이 끝나면 경성 입성부터 준비하세요. 그전에 사대부 관리들과 친분을 쌓으시구요. 신부님의 지적 능력으론 충분히 그들과 교우할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말을 마친 서은은 잠시 만력이 있는쪽을 보았다. 그녀의 눈치를 알아차린 듯 이마두가 머리를 끄덕이며 다그쳐 물었다.

“그 다음은요.”
“그 다음은, 신부님께서 한문을 정통하시니 책을 집필하십시오. 자고로 사람의 기억에 남기는 것으로 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오호…책이라…”
“네, 신부님은 르네상스 유럽의 자연과학 지식과 중국 사서오경의 학문을 최초로 한 몸에 갖춘 분이십니다. 그러니 책으로 동양에 서양의 문명을 소개하고, 서양에 동양의 문명을 소개하여 동서 문명과 역사 교류의 길을 열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명에서의 전도에 성공할수 있겠습니까.”
“성공여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신부님께서 다만, 성직자로서의 신부님보다, 동서문명을 통달하고 문화의 다양성에 눈을 뜬 최초의 세계인으로서 역사에 남을 것이라는건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녀의 말에 이마두는 머리를 숙이고 뭔가 곰곰히 생각하는듯 보였다. 그리고 한켠에서 이여백에게 이것저것  분부하고있던 만력이 드디어 그들쪽으로 다가왔다.

“신부님, 저 아이의 몸은 어떻습니까.”

이마두는 두손을 합치고 잠깐 머리를 숙였다.

“경성에 계시는, 부인의 오라버니 되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한달가량 식이요법으로 조섭을 하면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오니 부인의 건강은 제게 맡겨주시고 시름놓고 상경하셔도 될 듯 합니다.”

이마두의 말에 만력의 얼굴에는 희색이 감돌았다. 그는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행입니다. 짐…저는 오늘로 떠나야 하기 때문에…신부님을 믿고 맡기겠습니다.”

이마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득 몸을 돌려 탁자위에서 무언가를 집어들었다.

“이렇게 만난것도 인연이니, 약소하나마 이걸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이건…무엇입니까.”

만력은 이마두의 손에 들려져있는 네모난 것에 잠시 정신이 팔린듯 했다. 서은은 만력의 시선을 따라 그것을 바라보다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마두는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곧 그것을 들어보이며 설명했다.

“시계라고 하는것인데 소리로 시간을 알리는 기계입니다. 조작방법은…이러이러합니다.”

이마두의 조작에 따라 시계바늘이 찰칵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바람에 만력은 눈이 휘둥그래져서 시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서은이 웃으면서 만력에게 말했다.

“받아두십시오. 오라버니처럼 침식을 잊고 독서에 전념하시는 분은 저런 것이 필요합니다.”

만력은 조심스럽게 그 시계를 받아들자, 눈을 들어 눈앞의 이마두를 깊이 주시했다.

“명에는…어찌 오셨는지요.”
“제가 있는 곳의 문화를 전파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마두가 웃으면서 답하자, 만력은 자세히 그를 보았다.

“지금은 조경에 계신다고 했습니까.”
“네…하지만 북진할 예정입니다. 운이 붙어서 경성에 입성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더이상 바램이 없겠습니다만.”

이마두신부는 말을 마치자 그들에게 머리를 숙여보이며 말했다.

“저는 잠깐 주방에 가서 보고 오겠습니다.”

이마두가 나가자 만력은 고개를 돌려 서은을 보았다. 그의 눈에 이별을 앞둔 아쉬움이 담겼고, 서은은 그를 향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부디…강녕하십시오.”
“서안아…이렇게 떠나면 언제 볼수 있겠느냐.”
“오라버니, 어찌 이리도 약한 말씀을 하십니까.”

그녀는 말을 멈추었다가, 마음을 다잡고 말을 이었다.

“부디 용체 보중하옵소서. 경성의 일은 그리 염려할 것이 못되오니 오라버니가 상경하시면 자연 풀리리다.”
“너의 말이 길언임을 내 이미 잘 알고있느니라.”

만력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떠나기전 네게 세가지 요구가 있다. 여백에게도 부탁한 일이니라.”
“말씀하시옵소서.”
“첫째, 꼭 하루빨리 건강을 회복하여 이쁜 아기를 보거라.”
“네, 오라버니.”
“둘째, 혹 여기가 싫으면 언제든지 궁으로 돌아오거라. 궁은 영원한 네 집이다.”
“네, 알겠습니다.”

낮게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약간은 갈렸다. 만력이 다시 말을 이었다.

“셋째,”

잠시 말을 멈췄던 만력은, 들릴듯 말듯 낮게 중얼거렸다.

“혹시라도 내게 만일이 있게 된다면, 네게 있는 옥패를 움직이거라. 너와 총병부 일가는 보전할 것이다.”

말을 마친 만력은 서은이 뭐라 답하기도전에 자리에서 일어나서 문가로 향했다. 바로 그 순간, 문이 활짝 열리며 이마두가 급작스레 문안으로 들어섰다. 그 바람에 만력은 미처 몸을 가누지 못해 휘청거렸다. 깜짝 놀란 이마두는 앞으로 재빨리 나서면서 만력을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조심치 않아…”
“아니. 아닙니다. 그만 앞을 보지 않아서…괜찮습니다.”

만력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곧 그 기색을 감춘 채 그가 문밖으로 나서려 했다. 서은은 고개를 돌려 옆에 서있는 이여백을 보았다. 그리고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 그녀는 지금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마음속 깊은 곳의 의심을 확인할수 있었다.

“오라버니.”

조용한 방안에서 그녀의 말이 한결 또렷하게 울렸다. 그리고 그 말은 만력의 발목을 단단히 잡아버렸다. 방안에는 삽시에 긴장한 공기가 넘쳤고, 만력의 뒷모습이 잠깐 굳어지는게 그녀의 시선안으로 들어왔다.

“어찌…무예를…잃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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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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