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은밀한 취미생활이 있다. 바로 동요 가사 쓰기이다. 투고를 했다 한번 퇴고를 당하는 고배를 마신 후에는 감히 쓰지를 못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훌륭한 동요를 써볼 야심을 가지고 있다. 어린 아이들이 아기새 같은 그 고운 입으로 내가 쓴 예쁜 노래말을 귀엽게 지저귀는 모습을 상상하면 무척이나 흐뭇해진다. 

내 아이에게 동요를 불러줄 때가 많다. 어려서 내가 배웠던 동요들을 불러주는데 가사에 멜로디까지 완벽하게 다 아는 동요의 량이 생각보다 적어서 놀랐다. 탁아소, 유치원을 거쳐 소학교 6년을 빠짐없이 정규 교육기관에서 아동교육이라는 것을 받았으면 그동안 배웠던 동요의 수가 적지 않으련만 오늘까지 기억에 남은 것은 별로 없다. 

<오리 오리 동동>, <고개길>, <반짝반짝 반디불>, <삐약삐약 갓난 병아리>, <벽시계> 정도가 전부다. 아이에게는 한어 동요도 가끔 불러준다. <봄은 어디에(春天在哪里)>, <흰 꼬마토끼(小白兔)> 같은 것들이다. 

나는 늘 내가 배우고 불러왔던 동요나, 아들애가 자기전에 듣는 동요나, 아니면 유치원에서 배워오는 <3자경>에서 이름 못할 허전함을 느끼고는 한다. 

언젠가 책에서 봤던 한국 동요 한 소절을 보고 오래 가슴이 설렜던 적이 있다. <나뭇잎 배>라는 제목의 동요였는데 “낮에 놀다 두고 온 나무잎 배는 엄마 곁에 누워도 생각이 나요.”라는 한 소절이였다. 순수한 아이의 동심이 그대로 녹아나는 노래말 아닌가? 바로 내가 정말 잘 써보고 싶었던 그런 동요 아닌가?

어려서 나는 바닥에 침을 퉤퉤 뱉고는 깨진 사발이나 유리병 같은 것으로 다져 반들반들하고 단단하게 만드는 ‘공고리(콩크리트)’ 만들기 놀이에 심취해 있었다. 놀고 난 뒤면 깨진 사발을 무슨 보배라도 되는 듯 정히 호주머니에 넣고 집에 왔는데 엄마의 따가운 지청구를 들어야 했다. 손이 벨 위험이 있기도 했고 어쨌든 위생적이진 못한 놀이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 뒤로는 유치원 담장 밑 구석에 감춰두고 오고는 했다. 잘 때가 되여 엄마의 가슴을 파고 들며 팔베개를 하고 누워도 낮에 유치원 담장 밑에 두고 온 깨진 사발이 생각났다. 춘매가 그걸 가로채진 않았을가? 그렇게 잘 닦여지는 사발은 없었는데… 상률이가 훔쳐가진 않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 잠들었던 것 같다. 

저 동요 노래말을 보는 순간 손톱밑이 까만 채 코를 훌쩍이던 어린 내가 생각나서 마음이 따뜻해났다. 

지금껏 나는 그렇게 마음에 다가오는 동요를 몇수나 불러보았을가? 

<오리오리 동동>은 어린 아이의 동심이라기보다는 “엄마 말씀은 잘 들어야 한다”는 계몽적 의의가 다분한, 많게는 어른의 뜻을 대변한 노래이다. 

“엄마 말을 안 듣고 먼데 갔다가 아이 참, 글쎄 길을 잃”는 오리를 례로 들며 어른 말씀은 잘 들어야 한다는 교훈적 뜻을 담았다. 

<벽시계>도 례외는 아니다. “늦잠 잘세라 재촉하는 벽시계” 역시 교육의 의미를 앞세우고 있다. 

<앵콩앵콩>은 경쾌한 멜로디와 입에 착착 감기는 노래말이 좋아서 참 많이 불렀던 것 같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적의 동요라 다른 세상 이야기 같았다. “앵콩 타고 솟아보면 우리 오빠 철공장 한눈에 보여요.”라는 노래말인데 내가 타는 앵콩은 솟아봤자 유치원 담장너머도 안 보이는 데다 내 오빠는 공장이 아닌 학교에 가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에선 엄마가 좋아>라는 어느 영화의 주제곡도 있었다. 꽤 유명한 영화였던 것으로 기억난다. 주제곡 역시 유명했는데 아이들이 률동을 하면서 다 같이 부르기도 했다. “엄마 없는 아이는 풀과 같지요.”라는 노래말이 있었는데 나는 그 소절을 부를 때면 옆집 엄마 없는 춘매를 한번 흘낏 보고는 했다. 춘매는 코를 옷소매로 훔치며 열심히 그 노래를 따라 불렀지만 정작 그 마음이 어땠을지는 누구도 모른다. 어느 어른도 물어봐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 노래는 춘매 앞에서는 어쨌든 부르기 불편한 노래였다. 

그래서 내가 여직 기억해서 부를 만한 동요가 많지 않았던 것일가? 자라나는 새싹들에게는 교훈과 계몽도 중요하지만 그 여리디 여린 마음을 어루쓸어줄 수 있는 섬세한 손길이 더 필요하진 않을가 생각해 본다. 

아들애가 자기 전에 듣는 동요는 <春天在哪里(봄은 어디에)> 같은 노래이다. 노래말이 너무 아름답다. “봄은 어디에 있나, 봄은 어디에, 봄은 푸르른 수풀 속에 있지, 여기엔 붉은 꽃, 저기엔 파란 잔디, 그리고 노래 부르는 꾀꼬리… 봄은 꼬마들의 눈동자에 비껴 있지.” 이런 노래말인데 더없이 시적이고 아름답지만 어디까지나 어른의 시각이다. 

아들애는 <삼자경> 같은 것을 배워오고 또 듣기도 한다. 맞고 맞는 말씀들로만, 계몽적 의의로만 꽉찬 그것을 아이는 어떻게 소화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것들이 아이의 정신세계를 얼마나 살찌울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언젠가 유치원 다니는 조카가 가을 바람에 락엽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울었다고 한다. 나무가 손이 다 떨어져버렸으니 얼마나 아프겠냐면서. 아이들은 영원히 어른의 스승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어른의 혼탁한 눈으로 본 세상을, 이른바 교육이라는 명의하에 강요하려고 들었으니 이것이야말로 큰 우스개다. 

좋은 동요를 언젠가는 써낼 것이라는 부푼 야심이 조금 움츠러든다. 이미 어질러질 대로 어지러진 이 마음으로 아이들의 그 순수한 동심의 세계를, 그 무궁무진한 상상력과 엉뚱기발한 생각을 표현해 낼 수나 있을지. 그래도 노력은 해야 한다.

정말 아이 스스로가 즐거워서 부를 수 있는, 그런 노래말의 탄생을 기다린다. 나는 쓸 수 없더라도 말이다. 솜털같이 여리디 여린 그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쓸어 줄 수 있는 노래가 그들의 깨끗한 동심을 더 오래 유지시킬 수 있도록, 그들의 정신세계를 더 풍요롭게 해 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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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s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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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도 애가 어릴때 오리오리 동동 앵콩앵콩을 불러줬어요.
    그리구 기차놀이 하자야, 호랑나비 훨훨 도 불러줬구요.

    몽실님의 멋진 동요가 탄생하면 이제 곧 소학교에 들어가는 아들애한테 한번 불러줄 생각입니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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