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리가(Liga) 01/01/2020 – 04/01/2020

다시 찾은 리가

리가 버스역에 도착했다. 

중심구역 서남쪽 변두리에 있는 다른 호텔로 예약을 잡았기에 버스역과의 거리는 겨우 몇백미터 정도 뿐이다. 방향 따라 걷다 보니 자연스레 도착하게 된 호텔. 별 탈 없이 바로 체크인을 한다는 게 이번 여행에서는 처음이라 상당히 편했다.빨강: 리가 버스역 / 노랑: 내가 묵었던 두 호텔

불과 며칠 전에 처음 와본 곳이지만, 다시 오게 되니 느껴지는 익숙함, 뭔가 자연스럽게 여유가 생겼다. 겨우 중심구역 두어 번 돌아봤는데 벌써 이 도시의 절반을 아는 듯한 그런 안정감. 

일단 5시간짜리 장거리 버스여행에 피로가 쌓인 오늘은 소박하게 근처에서 산책하기로 결정했다. 지도를 보면 여기에도 연길의 부르하통하 비슷한 강이 있으니, 강뚝 근처에서 볼 수 있는 리가 야경은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고. 

야경 구경 전 근처 마트에서 저녁 삼아 먹은 핫도그
걷다가 보게 된 리가 쇼핑몰, 생각보다 너무 작다

걷다 보니 며칠 전에는 그냥 지나쳤던 신기하게 생긴 동상이 보인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아보여 자세히 확인했더니 심지어 동상 속 4마리 동물들의 얼굴마저 사람의 손때를 타서 반들반들해진 흔적이 보였다. 

위치로 검색을 해보니 동상 이름은 The Town Musicians of Bremen in Riga. 브레멘은 독일에 있는데 왜 이름으로 씌어졌나 신기했는데, 역시 1990년에 독일의 브레멘이 리가에게 준 선물이란다, 리가가 브레멘의 파트너 도시라서. 

그리고, 여행 중에는 몰랐는데 지금 검색을 하다 보니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이 동물들이 다 그림(Grimm)동화중 하나인 "브레멘의 음악대"동화 속 주인공들인 당나귀, 개, 고양이, 닭이라는 것. 줄거리를 보니 분명히 어릴 때 읽었던 동화임에도 불구하고, 그땐 동상 영어이름과 이 줄거리를 서로 연관짓지 못했다. 

하긴, 미약한 불빛 아래의 이 주인공들은 지금 다시 뚫어져라 쳐다봐도 전혀 티가 안 난다. 사진 각도를 단단히 잘못 잡았군. 제대로 찍힌 사진을 확인하려면 위에 영어로 쓰여진 동상 이름을 클릭하면 된다. 

크리스마스 마켓은 역시 저녁에 들리는 게 최고.

오페라극장 근처 야경은 충분히 봤었으니 강 쪽으로 방향을 꺾어 계속 걷게 되었다. 15분 정도만 강뚝에서 남쪽 방향으로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호텔에 도착할 수 있으니 산책만 하고 들어가서 휴식하면 되니까. 

강뚝을 걷다 보니 Kisses 쵸콜렛 비슷하게 생긴 건축물도 보인다. 지도를 확인해보니 라트비아 도서관인 것 같다. 

강이 흘러가는 방향이나, 강에 비낀 불빛을 보나 당연히 연길의 부르하통하가 생각이 났다. 이렇게 낯선 곳에서 익숙한 느낌을 조금씩 발견하는 여행이 난 참 좋다. 

자네, 사격은 좀 할 줄 아나?

 

1월 4일 이른 새벽 비행기로 떠나야 한다니 남은 시간은 고작 48시간, 대체 뭘 하면서 놀까? 지도 보면서, 혹을 발 가는 대로 대충 정하기엔 꽤 긴 시간이라 어쩔 수 없이 다시 TripAdvisor를 참고했다. 단 리가 첫 아침 베이글 "맛집" 참사를 피하기 위해서 레스토랑은 찾지 않을 거고. 

찾다 보니 사격장이 보였다. 위치도 내가 아직 가본적 없는 도시 남쪽. 그렇다면 몇시간 뒤인 1월 2일엔 사격을 하다가 덜 익숙한 그 동네를 좀 산책하고, 발트여행 마지막 하루인 1월 3일엔 탈린에서 알게 된 공짜투어를 따라다니다가, 저녁엔 지난 번에 오페라 극장에서 눈여겨봤었던 호두까기 인형 연극을 보는 걸로 하면 되겠지?

평소에는 매사에 계획적이고, 효율 떨어지는 걸 제일 싫어하는 성격을 갖고 있는 내가, 정작 여행을 할 때엔 느슨한 스케줄에 한가한게 거닐기를 좋아하는 걸 보아하니, 역시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하기에는 여행이 최상의 선택인 것 같다. 

운동량이 적지 않을 것 같으니 아침은 제대로 먹고 다니자.
나름 도시 지역일 거라 생각했었는데 일단 강을 건너고 어제 봤던 Kisses쵸콜렛 닮은 도서관을 지나니 주변 풍경이 슬슬 변하기 시작했다. 그래, 첫날에 봤던 80년대 풍경을 밤에만 보고 갈 순 없지. 짧은 15분 동안, 나는 도시 중심구역으로부터 평범한 주택구역, 그리고 슬슬 1-2층짜리 집들만 보이는 농촌에 도착했다. 별장이 아닌 진짜 농촌. 

그 과정에 벌어진 에피소드 하나. 버스에는 거의 40대-70대 정도의 표정이 엄숙한 사람들만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엄숙함을 견지하는 와중에도 외국인이 신기하긴 했나보다, 여기저기에서 날 보는 시선이 끊길 새가 없었다. 

최대한 여유만만하다는 표정으로 뒷문 근처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50대쯤 되어보이는 아저씨가 근처로 오더니 빤히 보면서 잘 안되는 영어로 말을 걸려고 했다. 살짝 두려웠지만 뭐 어때, 하는 마음으로 웃으면서 아주 짤막하게 대화를 했다. 아마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 아저씨는 나보다 일찍 내렸는데, 버스를 내리고도 두 손바닥으로 창문을 툭툭 치며 나와 소통하려고 했다. 서양권 외국인들이 중국 농촌지역으로 가면 이런 느낌이겠구나. 정작 다시 구글 360도 뷰로 찾아보니 기억했던 것보다 꽤 깔끔한 곳이지만, 그 당시 내가 버스에서 내려 걷게 된 13분은 30분처럼 길게 느껴졌었다. 근처에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 당장 사나운 개 몇 마리가 뛰쳐나와 나를 향해 돌진할 것 같은, 동년시절 농촌에서 살 때만 받아봤던 그 느낌이다. 마지막 몇분은 연락처로 전화를 걸어 통화를 하면서 도착했다, 중국 번호를 쓰는지라 통화요금이 어마어마하게 나올 걸 각오하고. 

날 맞이한 코치 A는 20세기 초반의 영국식으로 깔끔하게 차려입었고 30대 쯤 되어보였다. 영국 드라마 Downton Abbey에서 주인공들이 사냥하러 나갈 때 입는 그런 스타일이다. 몇년 전 갓 대학입시를 마친 동생을 데리고 갔던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사격장 느낌과는 전혀 달랐다. 그 곳에서는 코치들이 전쟁터에서 돌아온 듯한 느낌의 군복을 입었었는데. 

100유로 세트. 세일 중이라 75유로에 가능했다.

사격장에 오기로 결정한 이유로는 세가지가 있다. 1) 한때 꽤 열심히 양궁연습을 한 적이 있는지라 과녁을 조준하는 모든 운동에 조금이나마 관심이 있는 편이다. 2) 중국에서 제대로 된 사격장 하나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 정도라 외국에 나와야만 체험이 가능하다. 3) 위에 언급했던 동생이랑 갔던 블라디보스톡 사격장에서 날아가는 원판을 하나도 명중시키지 못했기에 기회가 생기면 꼭 사격을 제대로 하겠다는 오기가 생겼다.역시 사격은 양궁보다 많이 어려웠고, 과녁에 담긴 결과는 참담했다. 하지만 이런 경험은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니까 기분은 좋기만 했다. 

평점이 높은 사격장 답게 사격을 끝낸 뒤 내 이름이 적힌 증서도 발급되었다. 어디서 알아줄 법한 증서는 아니지만 기념으로 남기기엔 참 좋은 방식인 것 같다. 

사격장 찾을 때 번호로 연락하면서 자연히 저장하게 된 코치 A의 번호. 내가 새해에 홀로 찾아가서 어정쩡하게 했던 사격이 인상에 남았는지, 작년에도 올해에도  A는 새해인사를 하면서 동네 사진을 내게 보내온다. 단, 내가 답장을 하면 조용하다는 사실. 내년 1월 1일에도 이런 방식으로 답장을 받았으면 좋겠다. 

내가 갔을 땐 전혀 보이지 않던 눈이 쌓인 경치

지도를 보니 2km 안되는 거리에 성당과 공원이 있기에 그쪽으로 걸어갔다. 성당은 출입금지라고 적혀있어서 근처를 돌기만 했고, 커피와 샌드위치를 사서 근처 공원에 앉아 먹었던 것 같은데 정작 사진은 별로 남기지 않은 것 같다. 

슬슬 자리를 옮겨야 되겠다 싶은데 기왕 먼 곳으로 왔으니 오늘은 중심구역을 훨씬 벗어난 곳만 다니기로 결정했다. 바다 쪽으로 갈 생각도 했지만 날씨가 별로이고 교통이 불편해보여 결국 결정한 곳은 도시 동북쪽 박물관에 가보기로 했다. 

제일 동북쪽에 표기된 박물관
무난히 버스를 두어번 갈아타고 도착한 곳인데 입구가 선명하지 않아 근처에서 한창 헤맸다. 겨우 찾아 들어간 이 박물관은 교외 삼림공원과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는데 해가 짧아 제대로 구경이나 할 지 걱정이 됐다. 

어떻게 이 정도로 한적한지 의문이 생길 무렵, 날 따라다니기 시작한 고양이 한마리. 표정은 시큰둥하지만 15분 정도 졸졸 따라다니면서 사진/동영상 모델 역할을 톡톡히 했다. 

겨우 1/3 정도 구경했는데 벌써 어둑어둑해져 어디로 갈가 고민을 하다가 멀리 보이는 노을 근처로 가기로 했다. 

노을 따라 걷다가 앞이 확 트이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눈, 코 귀로 느꼈다. 

어둠의 장막이 완전히 깔릴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온해지는 그림 같은 풍경이기에. 

슬슬 나가야 할 시간이 가까워질 때 급하게 실내 전시장 몇 곳을 돌았다. 느낌상 20세기 초반 리가의 농경생활을 실외/실내 전시를 결합하여 보여준 박물관이라 인상이 깊었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큰 쇼핑몰이 보여 저녁을 먹고 쇼핑을 하며 하루를 마쳤다. 

편히 보낸 마지막 24시간 

마지막 24시간은 편한 마음으로 다니다 보니 사진을 많이 남기지 않았다. 특히 공짜투어로 다녔던 점심 일정은 사진 한 장 조차 없다. 오후에 갔던 미술관 Art Nouveau Riga 에서 찍은 사진도 겨우 몇 장. 설마 실수로 삭제한건 아니겠지? 

저녁 오페라극장 호두까기 인형 티켓은 미리 사뒀으니 미술관에서 그 방향으로 걸으며 공연을 감상하는 일만 남았다. 

마지막으로 호텔에 들려 짐을 챙기고, 밤 12시쯤 거의 텅텅 빈 공항에 도착했다. Tax refund 창구에 아무도 없어 또 한참 헤매다가 결국 은행계좌를 종이에 적어 영수증과 함께 남기고 새벽 비행기를 탔다. 2020년이라 유명한 여행지에서는 알리페이(支付宝)앱으로도 가능했을 텐데. 

왕복 티켓을 다 제일 앞 좌석으로 안배해준 러시아항공(Aeroflot), 장거리 비행 중 최상의 배려.

화려함 대신 은은하게 고전적인 분위기를 뿜는 발트 지역, 엄숙한 표정과 분위기 속 담긴 따뜻한 마음이 보이는 이 지역 사람들. 전형적인 크리스마스 여행이 아닌 엉망진창 스케줄이었지만 덕분에 예상 밖 수확이 많았던 여행이다.

핀란드 여행과 함께 다시 들리고 싶었던 발트 지역, 하지만 잠잠해지지 않는 코로나 때문에 여행은 커녕 3년짜리 쉥겐비자마저 이 발트 여행을 끝으로 만기가 되어버릴 상황이다. 코로나도 빨리 풀리고 동유럽 정세도 빨리 안정되길 바라며, 요즘도 난 여행 중 찍은 동영상들을 보며 잠깐씩 명상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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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현

본명 아니고 필명 맞습니다 :D / Instagram: k_onthecl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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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마지막 편까지 너무 잘 읽었습니다~
    브이로그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드는 여행기 스타일이 참 좋습니다.
    이번 편에서는 특히 — 노을 따라 걷다가 앞이 확 트이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눈, 코 귀로 느꼈다. — 요 구절과 그 아래 연이은 사진 3장.(우연히 기대하지 않은 상황에서 똬악 나타난 서프라이즈가 주는 행복이, 요런 거라고 생각함)
    세트로 좋음을 느낀것은 작가님의 설명 구절과 연동시켜, 눈 앞 에 펼쳐진 풍광, 코로는 갈대가 가득 들어선 물가 내음, 귀로는 바람이 불어서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을 거라 나름 상생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굳이 3장 중 베스트를 뽑자면 ㅋㅋㅋ 저는 세번째 청량한 푸른 하늘 아래 진달래 꽃잎같은 노을이 살짝 피어난 컷이 참 맘에 듭니다~

    1. 정말 자세히 읽으셨군요! 동영상을 올리지 못해서 이 감정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할 것 같다 걱정했었는데 구카님 표현을 보고, 와 이게 통하는구나 라고 감동했습니다. 아마 구카님의 감성과 상상력, 공감능력이 풍부해서 가능한거겠죠.
      저도 세번째 사진을 제일 좋아합니다. 포샵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할것 같았던 색감이 눈앞에 펼쳐졌으니까요. 그 사진처럼 예쁘지는 않지만 리가 여행중 찍은 동영상 몇개 위챗으로 보내드릴게요 🙂

    1. 정확히 무슨 의미의 토끼조각상인지는 저도 모르지만 정말 눈길이 가는 조각상이라 한바퀴 돌면서 열심히 구경을 했던 것 같습니다. 야경이 부르하통하가 낫다는 점 인정합니다, 여긴 불빛이 별로 없네요 ㅋㅋㅋ
      일본에도 여행 갈만한 곳이 엄청 많을텐데 날씨가 조금 따뜻해지면 주말여행 쯤은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가요? 전 일본에 가본 적이 한번도 없는지라 언젠가 우리나무에 일본여행글이 올라오지 않을가 기대하고 있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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