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휴가 잘 보내셨습니까. 올해 설은 고향에 가지 않고 단란하게, 조용하게 지낸 분들이 많으시겠지요.

저는 늦잠 자고 바닥 닦고 설겆이 하고 작업하고 가끔 공원 나들이 하고, 김창완 밴드의 노래를 들으면서 지냈습니다.

밥은 몇끼 짓지 않았습니다. 아침에는 아저씨가 빵을 굽고, 점심에는 배고픈 아저씨가 아이를 깨워 라면이나 물만두를 삶아 나눠먹고, 오후에만 간단히 밥 지어먹은 정도였습니다. 

어느 공기 맑은 오후 십분간 줄넘기를 하고나서, 뜀박질을 하여 숨이 찬건지 아저씨에게 설레서 심장이 빨리 뛰는건지 구분하지 못한 뇌가, 어쩌다 쉬는데 밥이라도 잘 챙겨줘야지 하고 잠간 예쁜 생각을 하기도 했으나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애 쓰지 않고 편안하게 보낸, 특별할게 없는 휴가였습니다.

"우리는 아이를 위해 빵에 버터를 바르고 이부자리를 펴는 것이 경이로운 일임을 잊어버린다"고 알랭드 보통이 말했다고 합니다. 레프 톨스토이는 "식사를 준비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일상적 로동을 무시하고서는 훌륭한 삶을 살 수 없다"고 말씀했대요. 

"동의 되신다면 우리들의 식사를 준비하고 우리들의 집을 청소하고 우리들의 빨래를 하며 아무것도 아닌 날을 지켜나가면서, 이것이 진정 행복이라는 것을 느낄수 있어야 한다"고 박웅현 작가가 <다시, 책은 도끼다>에 쓰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도 해요.

우리 인생의 9할은 기존이랍니다. 이미 존재하는 것들이에요. 내가 살고 있는 당대, 내가 타고난 삶의 조건 등 대부분의 것은 기존(既存)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거시적인 흐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말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경 써야 할 것은 나머지 1할인데, 그것의 9할은 기성(既成)입니다. 이미 이루어졌어요. 저는 이제 오십대이고, 남자로 태어났고, 많은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이건 끝난겁니다. 되돌릴 수 없어요. 이것들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고 나면 남는 것이 1할의 1할입니다. 바로 미성(未成)입니다. 미성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나의 하루입니다. 이불 개고 일어나, 오늘의 강독을 열심히 하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 집사람과 저녁밥을 맛있게 먹고, 함께 TV도 보고 잘 자는 것. 이것이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미 존재하는 것들, 이미 이루어진 것들에는 관심을 끄고 사소하지만 소중한 하루 일과에 집중하라고 합니다. 특별할게 없는 일상이 행복이라 합니다. 

그런데 일상에는 각자 동영상을 보면서 킬킬 대는 얄미운 식구들이 있고, 창문을 열자 닫자 갈리는 의견이 있고, 기한이 지난 밀가루를 버리지 말라는 잔소리가 있습니다.  물론 휴가가 끝날 무렵이면 얄미움도 다툼도 잔소리도 그립습니다.   

김창완 밴드의 <시간>이라는 노래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아침에 일어나 / 틀니를 들고 잠시 

어떤게 아래쪽인지 / 머뭇거리는 나이가 되면

그때 가서야 / 알게 될거야 / 슬픈 일이지 

사랑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 얼마나 달콤한지

그게 얼마나 달콤한지 / 얼마나 달콤한지

그걸 알게 될거야

사랑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달콤하대요. 그런데 그 달콤함을, 시간이 흘러 이가 빠지고 눈이 흐릿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여서야 알게 된다고 합니다. 슬픈 일이래요. 

아파서 울었는데, 울때는 아팠는데, 아픔이 잊혀지고 아파서 흘린 눈물조차 달콤하게 느껴지는 인간, 그리고 그걸 가르쳐주는 시간.

그러고보면 시간이 흐르는게 어떤 의미에서는 감사한 일이기도 합니다.

김창완 가수가 불렀던 <청춘>이라는 노래가 있지요.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으로 시작되는데 사실 처음에는 "갈테면 가라지 푸르른 이 청춘"으로 작사했다고 합니다. 갈테면 가라지, 자연을 거스를 수 없지만 뭔가 지킬것을 지키겠다는 비장함이 느껴지네요. 

김창완 가수는, 삼십여년간 밴드를 할 수 있은 비결이 뭐였는지 물어보는 젊은이에게, 경향을 따르지 않았기에 가능했다고 했습니다. 디스코가 흥행하면 디스코 풍격을 따르는 밴드들도 있었지만 본인들의 색갈을 꾸준히 유지한 덕분이라고 하네요. 

비슷한 말을 박웅현 작가도 했습니다. 

인생의 정답을 찾지 마시길, 정답을 만들어가시길.

내일을 꿈꾸지 마시길, 충실한 오늘이 곧 내일이니.

남을 부러워 마시길, 그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

시류에 휩쓸리지 마시길, 당대는 흐르고 본질은 남는 것.

당신 마음속의 올바른 재판관과 상의하며 당신만의 인생을 또박또박 걸어가시길.

당신이란 유기체에 대한 존중을 절대 잃지 마시길.

박웅현 작가는 레프 톨스토이가 <안나카레니나>의 마지막에 묘사한 레빈의 삶이 아름다운 삶이라고 합니다. 평온한 시골에서 평범하게 하루일과를 묵묵히 행하는 것, 다른 사람의 시선, 복잡한 세상사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사는 것, 즉 자기 본분을 찾는 일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행복은 이미 

모두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진정한 행복의 원천은 우리들 가슴에 있다.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어리석다.

곧 바쁜 일상이 시작됩니다. 아침에 조금 더 일찍 일어나고, 낮의 대부분 시간은 직장일에, 밤에 깨여 있는 시간은 거의 가사에 소모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달콤하게 느껴질 시간임을 알기에, 그리고 본분이므로, 기꺼이, 행하겠습니다.   

책 <다시, 책은 도끼다>  박웅현

책 <여덟 단어>  박웅현

노래 <시간>  김창완

노래 <청춘>  김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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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럼에도, 언젠가는 달콤하게 느껴질 시간임을 알기에, 그리고 본분이므로, 기꺼이, 행하겠습니다.]
    바삐 돌아치는 일상이 짜증날때도 많았는데 이 구절을 떠올리면서 마음을 다잡아봐야 되겠습니다. 청소도 열심히 반찬도 열심히 하면서.
    마음에 와닿는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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