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무엇에 환희를 느끼며, 어떤 열정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가?

1. 프롤로그: 니체가 말하는 ‘열정’과 ‘환희’의 의미

가소롭게 들리겠지만, 7장의 “읽기와 쓰기”에 관련해 니체와 논쟁할 마음에 들떠서 5, 6장의 독후감은 넘기려고 했었다. 그러다 문득 나의 ‘열정’과 ‘환희’는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질문을 마주하며 다시 5장으로 돌아왔다.

니체가 5장에서 말하는 ‘열정’과 ‘환희’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감정적 고양이나 순간적 몰입과는 결이 다르다. 그것은 ‘덕’, 즉 삶을 긍정하고 새롭게 만들어 가는 창조의 힘과 연결된다.

이 장에서도 니체는 제목에 ‘환희’와 ‘열정’이라고 쓰고, 본문에서는 ‘덕’을 훨씬 많이 언급한다. 동의하기 어려운 쓰기 방식이지만, 읽음으로써 얻는 유익이 있기 때문에 꾸역꾸역 적응하고 있다.

“인간이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대의 덕을 사랑해야 한다.”

니체의 환희는 고통을 견딘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실존적 기쁨이다.

“내 영혼을 고통스럽게도 하고 감미롭게도 하며, 나의 내장의 굶주림이기도 한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이름도 없다.”

2. 니체 이전: ‘열정’과 ‘환희’는 억압의 대상

니체 이전의 철학과 종교는 열정과 환희를 억제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해 왔다.

“한때 그대는 열정을 지녔었고, 그것들을 ‘악’이라 불렀다.”

플라톤은 영혼을 이성, 정념(情念, ‘기개’로 번역하기도 함)과 욕망으로 나누고 이성의 통제를 가장 중요한 덕으로 삼았다. 아리스토텔레스조차 열정을 제어해야 할 감정으로 보았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열정을 종종 정욕과 동일시하며 억압의 대상으로 삼는다.

니체는 이러한 억압을 ‘노예 도덕’이라고 명명하며, 금욕과 자기 부정이 아닌 삶의 긍정을 촉구한다.

“그대의 모든 열정은 결국 덕이 되었고, 그대의 모든 악마는 천사가 되었다.”

열정은 결국은 부정의 대상이 아니라, 덕에 이르게 하는 시발점이라는 얘기이다. 

3. ‘열정’과 ‘환희’에서 집중된 ‘몰입’으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열정’이라는 단어는 남용된다. ‘열정페이’처럼 자기 착취와 무한 경쟁을 정당화하는 명분이 되기도 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열정’에 맞추다 보면 정작 자신의 삶의 방향은 흐려지기 쉽다.

니체가 말한 열정은 외부의 기준에 맞춰 소진되는 불꽃이 아니라, 자기 삶을 창조적으로 이끄는 장작불 같은 힘이다. 

한 발 나아가, 차라투스트라는 하나의 열정에 몰입하라고 말한다. 

“그대에게 행운이 있다면 그대는 하나의 덕을 지니고 있을 뿐 그 이상의 덕은 지니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만 더 가볍게 다리를 건널 수 있다.”

여기서 여러 가지 일이나 취미에 관심을 가지는 것과, 삶을 송두리째 걸 만큼의 열정을 갖는 것은 다른 문제일 것이다. 즉 단순한 취향 선택이 아니라, 삶의 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으로 이해하는 것이 온당하다. 

4. 니체와 성경의 교차점: 환희와 고통

니체는 환희를 고통과 구분되는 감정으로 보지 않는다. 

“그대는 그대의 독으로 향유를 빚어냈다. 그대는 슬픔이라는 그대의 암소에게서 젖을 짜냈다. 이제 그대는 그 젖가슴에서 흘러나오는 달콤한 젖을 마시고 있다.”

이처럼 니체가 말하는 환희는 슬픔과 달콤함이 얽힌 실존적 감정이다. 니체가 환희를 ‘슬픔’, ‘고통’ 등과 함께 논하는 것은 현실 도피적 위안을 경계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니체의 환희가 성경의 말씀 “항상 기뻐하라”와도 겹쳐 보인다. 나는 성경의 “항상 기뻐하라”를 현실 도피보다는 어떠한 현실이든 더 잘 끌어안기 위한 긍정적인 태도라고 생각해 왔다. 따라서 내게 있어서 성경의 ‘기쁨’과 니체의 ‘환희’는, 둘 다 삶을 긍정하는 태도라는 점에서 비슷하게 읽힌다.

5. 에필로그: 나의 열정, 나의 환희

5장을 읽으면서 내 삶을 반추해 본다.

– 나에게 열정과 환희는 어디에서 오는가?
– 오늘 나는 무엇에 몰입하고 있는가?
– 내가 느끼는 환희와 열정은 나와 내 주변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가?

20대에는 아끼던 긴 머리를 자르고 수액을 맞으며 기꺼이 해낸 시골 교육봉사가 가장 나를 설레게 했다. 그때의 환희는 내 안의 순수한 열정—교육 격차를 줄이겠다는 소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제 40대의 끝자락에서, 나는 내가 하는 연구가 궁극적으로는 평등한 언어권과 사회 언어 통합을 위한 일이라고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며, “공부하기를 잘했다”, “정말 신난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이 역시 외부의 보상이나 결과 때문이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지향하는 삶의 방향과 내가 하는 일이 맞닿아 있다는 확신에서 온다. 물론, 내 삶에 늘 확신이 차 있는 것은 아니며 자주 자문하곤 한다,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지를.

“그러므로 그대는 그대의 덕을 사랑해야 한다.”

요즘 매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조금씩 읽으며, 내 삶을 최대한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돌아보려고 애쓴다. 

연구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도, 니체 독후감이 마음 같지 않아 낙심할 때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느끼는 어려움이나 기쁨 모두 지금, 여기, 살아 있어서 가능한 환희일 것이다. 

오늘의 주제는 나만의 이야기는 아니지 싶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진짜 나의 열정’과 ‘사회가 요구하는 열정’ 사이에서 방황한다. 진짜 열정은 외부의 평가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향과 맞닿을 때 환희로 이어진다. 

“그대는 그 덕들로 말미암아 파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진짜 열정과 덕은 때로 나를 어려움에 빠뜨리거나 소진시키고, 심지어 파멸에 이르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파멸’은 소멸이 아니라, 현재의 나를 극복하고 넘어서는 탈바꿈을 위한 필연적 과정이 아닐까. 

그리하여 함께 고민해 보고 싶다. 

– 나와 그대는 어떤 열정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가?
– 그대의 ‘진짜 열정’은 무엇이며, 그것이 삶에 어떤 환희를 가져다주고 있는가?

진정한 환희는 결국 우리가 스스로 자신의 삶의 방향을 묻고, 그 길을 사랑하며 걸어갈 때 비로소 경험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

읽은 책:
프리드리히 니체 저, 백승용 역(2022),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사색의 숲(각주가 많아서 좋음)
프리드리히 니체 저, 이진우 역(2020),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휴머니스트(번역문이 쉬워서 좋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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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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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결국 진짜 열정은 개인적인것이어야 한다고 읽힙니다. 개인적인 것일지라도 열정을 부을 대상은 있겠죠. 그렇다면 열정은 곧 사랑. 내가 정말로 사랑하는 것. 사랑하는 일이나 사람에서 어떤 것도 돌려받지 못하여도 끝까지 거기에 마음을 두고 가꾸는 곳. 무언가를 지키는 것 같지만 그건 결국 자기를 지키는 일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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