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 “나는 그 문을 쾅 닫으며 나왔다.”
“나는 학자들의 집을 나왔고, 나오면서 등 뒤로 그 문을 쾅 하고 닫아버렸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16장에서 학자들에 대해 서늘하고 날선 비판을 한다. 학자를 ‘먼지 나는 포대’, ‘그늘에 선 구경꾼’이라고 풍자하는 동시에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진다. 16장을 읽으며 나는 마치 추레한 모습으로 거울 앞에 선 듯 실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다.
사전에 따르면 학자란 “학문에 능통하거나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이다. 학문에 능통하지는 못했으나, 연구를 하고 있는 만큼 니체의 일갈을 쉽게 외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어떤 학자인가? 학자 동료들이 다 비슷하겠지만, 여러 과제 제안서와 보고서, 논문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러다 보면 내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연구와 외부의 요구 사이에서 흔들리는 자신을 자주 마주한다. 반복되는 작업 속에서, 진정 내가 바랐던 공부와 멀어지는 건 아닌지, 언어 현실에 대한 문제 의식이 희미해지지는 않았는지… 스스로에게 되묻게 된다.
니체의 글은 이처럼 현실과 유리된 ‘구경꾼’이 될 수도 있는 연구자의 태도를 환기시킨다.
2. 그늘 속 관찰자 ― 수동적 학자의 슬픈 형상
“학자들은 서늘한 그늘 속에 시원하게 앉아 있다. 그들은 모든 일에 있어서 구경꾼이 되려고 하며, 태양이 내리쬐는 계단에 앉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훌륭한 시계 장치다. 태엽만 제대로 감아주면 된다!”
니체가 그려낸 학자의 모습은, 뜨거운 현실 현장에서 고통과 창조적 사유로 나아가기보다, 정해진 논리와 언어를 안전하게 반복하는 전문가이다.
그늘은 시원해서 쉴 수 있는 곳이지, 이끼 따위 외에는 생명이 왕성히 자랄 수 없는 환경이다. 연구자라는 이름으로 그늘, 즉 안락한 제도권, 익숙한 환경 및 프레임에만 머무는 것은 아닌지, 내가 과연 ‘살림살이를 나아지게 하는 학문’을 하고는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대목이다.
3. 먼지와 곡물 ― 알맹이를 찾아
“사람들이 손을 뻗어 학자들을 잡으면 마치 밀가루 포대를 건드린 것처럼 주위에 먼지가 일어난다. … 그러나 그 먼지가 곡물에서 나온 것이고, 여름 들판의 황금빛 환희에서 생겨난 것임을 그 누가 알겠는가?”
니체는 달변과 학식 뒤에 실체가 ‘먼지’처럼 흐릿해질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도, 그 먼지가 한때는 ‘곡물’이고 ‘여름 들판의 황금빛 환희’였음을 잊지 말라고 상기시킨다.
내가 연구하는 연변말과 같은 비주류 언어도, 분명 구체적인 현실과 개별의 삶을 품은 언어의 곡물이라고 믿는다. 이 연구가 단순한 ‘먼지’로 남지 않게, ‘곡물’ 알맹이를 찾고 기록한다는 초심을 잃지 말아야겠다.
4. ‘고유성’의 회복과 학문적 자존
“인간은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의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그들은 감히 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구절은 니체를 차별주의자로 오해하기 쉽다. 해설에 따르면, 이 말은 모두가 똑같아야 한다는 ‘강박적 평등’보다, 각자의 고유한 가능성과 책임을 인정하라는 메시지라고 한다.
학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주류 기준이 아닌 자신의 문제 제기, 자기만의 목표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그 자체로서 충분한 학문적 자존감을 가져도 된다는 얘기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5. 에필로그 ― 나만의 ‘집’
“나는 너무나 뜨겁고, 나 자신의 사상으로 불타오르고 있다.”
“나는 그들과 같지 않아서 ‘호두까기’ 방식으로 인식에 도달하는 훈련을 받지 못했다.”
이는 학자로서 남의 언어에 기대지 않고 자신만의 언어와 사유로 살아가려는 노력에 대한 은유이다.
“아직도 지어야 할 집이 많지 않은가?”
이는 진정한 학자의 길은 남이 지어준 집, 즉 주어진 이론, 그럴 듯한 익숙한 언어, 시류를 따르는 연구에만 머무르지 말고 새롭고 필요한 학문을 하라는 얘기이다.
논문 발표는 연구의 시작은 아니나 공식적인 기록이다. 그렇게 보면, 나는 연변말에 대한 연구를 2019년에 시작했다. 연변말에서 시작해서 조금 더 관심을 넓히니 러시아 고려인, 재일 조선인, 재미 한인 등 디아스포라 한국어가 눈에 들어온다.
남한 중심의 표준 한국어라는 주류 연구 대상에 비해 주변적이고 지엽적이라는 시선도 있겠으나, 이 연구의 필요를 잊지 않고 꾸준히 나아가려고 한다. 나만의 ‘집’까지는 아니더라도 작고 소박한 ‘방’이나, 또는 그로 들어가는 작은 ‘문’ 하나만이라도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니체의 16장을 읽고 나니 좀 더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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