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도 연습이 가능하다면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읽고
올해가 막 시작되던 1월에 책 5권을 구매해 저에게 새해선물로 주었습니다. 제가 저에게요. 한두달이면 후딱 읽을 수 있는 양이라 생각했는데 다섯 권 중 한 권은 7월이 된 지금에야 드디어 완독했습니다. 이 책만 읽은 건 아닙니다만, 끝까지 읽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끼면서도 한 챕터를 읽고는 숨을 고르고 다른 책에 잠깐 눈을 돌리다가 다시 읽기를 반복하게 만들었던 책의 제목은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였습니다.
다들 아시다싶이 이어령 선생님은 한국에서 “시대를 선도한 지성인”라는 평을 듣는 거목입니다. 살아온 동안에 쓰신 책이나 펼쳐온 담론도 크게 주목 받았지만 무엇보다 88세에 암으로 투병하시면서 현대의학에 의존하지 않고 집에서 주체적인 자연사를 택하시고 끝까지 삶과 죽음에 대한 지성인으로서의 통찰적 깨달음을 나누고 가셨으니 가히 삶의 과정과 마무리까지 이어령다웠습니다.

책은 열여섯 챕터로 구성되어 있고 대담 식으로 진행됩니다. 때문에 현장에서 생생하게 수업을 듣는 듯한 느낌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책을 소개를 하자니 한 학기동안 교수님의 강의 내용을 빼곡이 적은 노트를 들고 무엇부터 말해야 하나, 머뭇거리는 학생이 되는 것 같아 기억에 강렬하게 남은 죽음에 대한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려 합니다.
1.
내가 여러 번 얘기하지 않았나.
덮어놓고 살지 말라고.
왜냐면 우리 모두 덮어놓고 살거든.
덮어놓은 것을 들추는 게
철학이고 진리이고 예술이야.
…
우리가 감쪽같이 덮어둔 것,
그건 죽음이라네. 모두가 죽네.
나도 자네도.
lesson3 진실의 반대말은 망각
저는 죽음에 대해 늘 생각하는 사람이라 내가 과하게 죽음을 의식하는건가,라는 의식까지 하는 사람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일이 저는 썩 불편하거나 울적하지 않거든요. 오늘 저녁 먹을 메뉴를 생각하듯 가볍게 몇살까지 살다 죽으면 아쉽지 않을까,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기도 하고 넓고 깊게는 어떤 종류의 죽음이 아직 받아들이기 어려운지, 왜 그런지까지 생각을 해봅니다. 죽음을 생각할수록 오늘 하루 살아있다는 것에 실감을 하게 되고, 죽음을 머릿 속으로 열심히 준비할수록 삶이 더 리얼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이어령 선생님의 저 가르침을 보면서 아,나는 그동안 내 나름 죽음을 덮어놓지 않고 들추려고 애썼구나,라는 마음이 들어서 위로가 되더라고요. 물론 이 책을 읽으면서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로 죽음은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실체는 완전히 다른것이라는 것에 솔직히 겁을 먹기도 했습니다만, 그럼에도 죽음은 어떤 식으로든 살아가는 과정에 계속 들여다보고 준비해야 할 존재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비단 죽음뿐만 아니라 지금 나를 불편하게 하고 두렵게 하고 회피하게 만드는 것들을 끄집어내 부침개처럼 뒤집어 보기도 하고 어떻게든 실체를 마주하는건 삶에 꼭 필요한 용기같아요.
2.
“내가 그랬지.
죽음은 신나게 놀고 있는데
엄마가 “얘야, 밥 먹어라”하는 것과
같은 거라고.
죽음이라는 게 거창한 것 같지?
아니야, 내가 신나게 글 쓰고 있는데,
신나게 애들이랑 놀고 있는데
불쑥 부르는 소리를 듣는거야.
“그만 놀고 들어와 밥 먹어!”
이쪽으로,
엄마의 세계로 건너오라는 명령이지.
어릴 때 엄마는 밥이고 품이고 생명이잖아. 이제 그만 놀고 생명으로 오라는
부름이야…
그렇게 보면 죽음이 또 하나의 생명이지.
어머니 곁, 원래 있던 모태의 귀환이니까.”
chapter8. 죽음의 자리는 낭떠러지가 아니라 고향
지금까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연구나 막연한 호기심이 철학과 종교의 영역이 되어 각자 죽음에 대해 무의식적으로든 의지적으로든 갖고 있는 생각들이 있을텐데요, 이어령 선생님은 죽음을 “원래 있던 모태의 귀환”이라고 표현합니다. 아, 이렇게 듣고 보니 죽음에 대한 이미지가 확 달라지더라고요. 저는 사실 죽음,하면 가장 먼저 본능적으로 연결되는 이미지는 “곡소리”였거든요. 죽음은 남은 자들에게 충격, 불행,슬픔이라는 비극적인 감정을 일으킬 수 있고요, 시간이 지나면 비극적인 감정은 옅어질지언정 그리움이 더 사무치기도 한다지요. 물론 지극히 개인적으로 존재하는 인간들 앞에 차례질 각자의 죽음의 종류와 상황도 다 달라서, 이어령 선생님처럼 고령에 준비된 죽음을 맞이하는 상황이 아니라 갑작스러운 것이라면 이해를 달리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황망한 부름이든 준비된 부름이든 무에서 유였던 인간이 다시 무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 ‘원래 있던 모태의 귀환’이라는 표현은 여전히 유효해보입니다.

김용호 사진작가가 찍은 투병 중 사색 중인 이어령. 죽기 하루 까지 삶의 방문을 활짝 열어둔 채 사람들을 맞았다./조선일보
3.
2~3억 머리의 정자의 레이스를 통해서
내가 왔어.
수능 시험보다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거지.
그런데 그전에
엄마와 아빠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또 그전의 조부모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계속 거슬러 가면
36억 년 전 진핵세포가 생겼던 순간까지 가.
나는 그렇게 탄생을 파고 들어.
신은 생명을 평등하게 만들었어.
능력과 환경이 같아서 평등한 게 아니야.
다 다르고 유일하다는 게 평등이지.
조선일보-온라인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인간의 탄생이 얼마나 신묘막측한지는 10대 시절 과학 시간에 어렴풋이 듣고, 어른이 되어서도 시인이나 철학자, 소설가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다뤄졌던 주제였으므로 익숙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알고 있다’는 것과 나의 탄생에 대해 어느 깊이만큼 깨닫고 전율을 느끼는 건 또 다른 문제더라고요. 한 인간의 탄생에 대해 어느만큼의 무게를 더하고 의미를 부여할지는 각자의 몫이겠지만 요즘처럼 생명의 가치가 존중한지 못하는 시대에 이어령 선생님의 말씀은 곱씹어 생각해볼 필요가 분명히 있지요. 흔히들 “삼관”이라고 해서 세계관,가치관,인생관을 꼽는데 이어령 선생님의 저 한마디에서 저는 거목의 세계관, 가치관,인생관을 모두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세계의 시작점과 끝점은 생과 사일테고 그 중간에 가치관을 인생관을 표방하는 꼭짓점들이 수두룩이 찍혀 그것들을 연결하다보면 개개인의 유니크한 삶의 그림이 나오는 게 아닐까요. 저는 인간의 탄생을 기이하게 생각하고 감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마인드를 살아내는 사람이라면 죽음을 뜻하는 마지막 끝점 뒤에도 새드 엔딩이 아닌 해피에딩을 의미하는 느낌표나 여운을 남기는 줄임표를 충분히 찍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고보니 죽음이라는건 벼락치기 공부처럼 며칠을 밤 새워 준비해서 치를 수 있는 중간고시가 아니라 생각하며 사랑하며 살아온 모든 날들의 마지막에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건네주는 신의 시험지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바쁜 현대인들이 읽기엔 묵직한 내용이라 시간을 많이 할애할 것 같은 책이지만 저처럼 몇개월을 거쳐서라도 읽아가다보면 삶과 죽음에 대한 이해와 관점이 넓어지고 깊어지는 경험을 하게 될거에요. 관심이 있으신 분들께 이 책의 마지막에 수록된 이어령 선생님의 마지막 인터뷰 내용 중 일부를 링크로 공유합니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0/18/2019101803023.html

이어령 선생의 을 2016년엔가 읽었는데 신선하고 충격적인 부분이 많았었습니다. 마지막까지 많은 메시지를 전달한, 생각만 해도 흐뭇한 ‘포만감을 느끼는’ 분임은 틀림없는 듯요.
동감입니다:)
오 죽음이라……
인생이란 어떻게 사느냐랑 어떻게 죽을까인거 같슴다
네 맞습니다 태어난건 내 의자가 아니지만 살고 죽는 건 의지가 관여할 수 있지요.
이런 글 너무 좋습니다. 덮어놓고 살지 말라는 말 곱씹게 되네요,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오, 저에게도 “덮어놓고 살지 말라”는 말이 여운이 크네요. 좋은 책 소개해줘서 감사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