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아닌 단어로 사랑을 말해요(feat.요리)

그시절에는 배달앱이 없었던 덕분에, 외식보다는 삼시세끼를 꼬박꼬박 집밥을 먹여 키워준 엄마 덕분에, 온전한 엄마의 손맛을 먹으며 자랄 수 있었다. 표현하기 버거운 그리움이 감당이 안 될 때면 시간을 짜내 엄마가 해줬던 음식을 흉낸 낸다. 요리하는 동안 온전히 엄마를 생각하며 그리움을 달랜다.


요리에 대한 애정이 언제 싹터서 이만큼 자라났을까.

내가 기억하는 첫 요리는 가지볶음이었다. 가지를 볶고 있는 어머니를 말똥말똥 쳐다보니 ‘타지 않게 휘휘 저어봐라, 뜨겁다.’며 처음 어머니로부터 불 앞에 오는 걸 허락받던 날, 긴 나무젓가락을 건네 받아 무척이나 조심조심 가지를 저었던 그날의 요리를 기억하고 있다. 아직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건 ‘우리 딸이 해서 더 맛있구나!’는 말과 맛있게 드시는 모습을 그림일기로 그려 평생 기억할 만큼의 벅찬 기쁨이어서 일테다. 그때가 여덟, 아홉살 무렵이었다. 요리하는 기쁨만큼 요리해 주는 것도 큰 기쁨임을 알게 된 나이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의 내게 요리는 즐거움을 주는 놀이였다. 방학만 되면 외할머니 댁으로 보내졌는데, 여름에는 여름대로 겨울이면 겨울대로 매일이 먹을 풍년이었다. 왕년에 잘나가는 요리사였던(외할머니는 ‘초채쓰프(炒菜师傅)’라 불리는 것을 제일 좋아하셨다) 외할머니는 못하시는 요리가 없었다. 장을 보고 재료를 손질하는 것부터 접시에 담겨지는 과정을 하나부터 열까지 외할머니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며 직관하는 게 방학의 최고의 낙이었다. 그 과정들이 내겐 보는 재미, 먹는 재미에, 호기심을 자극해주는 놀이이기도 했다. 덕분에 이래저래 요리에 대한 알쓸신잡(굳이 알어도 쓸 데가 없지만 반급 친구 중 누군가는 신기해 할 잡 자식)을 많이 알게 되었다. 자연스레 ‘재미있는 것=요리’의 등식이 내 안에서 성립되어 갔다.

책과 연필을 잡는 시간이 점점 많아질수록 요리와는 긴 헤어짐을 가졌다. 아무리 많이 먹어도 채워지기 어려운 허전함 때문에 나는 다시 요리를 시작하게 되었다. 한국에 유학을 와서 한 달은 이것도 맛있고 저것도 맛있고 모든 음식이 도파민 파티였다. 먹고 싶은 것을 한 돌개 다 먹어보고 나니 더 이상 땡기는 것이 없었다. 학교 식당이 맛있는 편이기는 해도 한달이 지나자 물리기 시작했다. 집밥이 먹고 싶어졌다. 맵고 짜고 기름진 음식이 아닌 양파에 계란만 볶아도 맛있고, 감자만 들어간 감재장물에 말아먹던 밥 한끼가 그리웠다. 하고 싶은 거, 사고 싶은 거는 참아도 먹고 싶은 건 못참는지라 바로 후라이팬을 장만하고 장을 봐서 냉장고를 채웠다.

오랜만에 요리를 하려니 낯설고 어설펐다. 칼이 손에서 설 대로 설었는지 당근을 써는데 ‘쿵쿵’ 소리가 나서 혼자 어이없어 웃기도 했다. (도끼로 장작을 쪼개듯 나는 식칼을 당근에 꽂아 당근을 내리쳤으니, ‘쿵쿵’이 딱 알맞은 표현이겠다.) 내가 당근을 써는 것인지 도마를 써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였다고나 할까. 때론 칼보다 가위가 더 효률적이라 가위를 애착 도구로 사용했다. 과정이 어떠하든 만들어진 요리는 내가 원하는 딱 그 맛이었다. 집 떠나온 헛헛함이 조금이나마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칼이 손에 익어가는 게 느껴졌다. 이건 전적으로 결혼이 한몫 해주었다. 둘 다 워낙 먹는 것에 진심이며 먹는 것에서 오는 행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어서 요리를 자주 해먹었다. 뭐든 만들어서 같이 먹는 재미에 설거지가 귀찮은 줄도 모르고 도장깨기식으로 요리한 덕에 자연스럽게 칼질이 늘었다. 어느 한 번은 주말에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남편이 눈이 휘둥그래져서 달려나왔다. “왜? 소리 뭔데? 왜 잘해?” 귀를 의심했다는 거다. 요리하는 동영상을 틀어논 줄 알았단다. 나는 고작 파를 썰었을 뿐인데 예상치 못한 칭찬에 기분이 째지게 좋았다. 하긴 칼소리가 ‘쿵쿵’에서 ‘뚝뚝’으로, ‘뚝뚝’에서 ‘다.다.다’로 바뀐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그날 아침은 어깨가 가뜩 올라간 채로 사명을 다해 정성스러운 香葱炒鸡蛋을 밥상에 대령했다.(고작 香葱炒鸡蛋이라고 하지 말라. 작은 것에도 학문이 있는 법이라고 생각한다.) 칭찬에 인색하지 않은 남편 덕분에 당근은 점점 더 가늘어졌고, 칼소리는 ‘다.다.다’에서 ‘다다다다’로 더 빠르게 리듬을 탔다.

칼질뿐 아니라 밥상에 올라가는 식재료도 다양해졌다. 요리에 대한 관심은 더 다양한 식재료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졌고 계절을 느끼는 방법도 다채로워졌다. 야채코너, 과일코너, 생선코너를 지나가면서 계절이 바뀜을 알아채는 재미, 제철 음식으로 계절을 즐기는 재미는 요리를 더 좋아하게 만들었다. 요리를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식재료에 대해 공부하게 되고 좋은 식재료를 고르는 방법, 신선하게 보관하는 방법도 터득했다. 그렇게 요리 공부는 제일 신나는 공부이자 취미가 되어갔다. 요리를 하고 있노라면 후회하느라 과거에, 걱정하느라 미래에 가 있는 마음을 계속 현재로 데려올 수 있었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몸과 맘이 닳을 정도로 애쓰다가도 한번씩 요리를 하다보면 많은 것을 바라지 않게 되었다.

매일 먹는 끼니와 반찬들, 주말이면 특식에, 명절 음식까지 그동안 요리 경험이 제법 쌓였다. 나에게는 요리가 노력한 만큼 통했던지라 쉬운 축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안되는 게 있다. 엄마 손맛. 어지간한 요리는 그럴싸하게 해내지만 갖은 수를 써도 엄마 손맛을 내기 어려웠다. 알려준 대로 똑같게 해도 뭔가 부족한  맛, 그런데 뭐가 부족한지 모를 그런 맛이 났다. 엄마가 그리울 때면 유독 엄마가 해준 음식들이 먹고 싶어진다. 엄마 표 소탕이나 입쌀밴새, 김치뽀즈나 뚜볼(红豆包, 팥을 속에 꽉 채운 찐빵), 탕추빠위(糖醋鲅鱼), 시라지 된장국에 삶아낸 수육같은 것들이다. 엄마가 생각날 때면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지만(아무리 혼자 역새질해도) 채워지지 않는 아쉬움과 달래지지 않는 그리움이 요리에 묻어나온다. 요리하면서 엄마 손맛을 따라할 수 없지만 엄마 손맛을 그리워 할 수 있는 것도 행복임을 깨달아 간다.

나의 어린시절에는 배달앱이 없었던 덕분에, 외식보다는 삼시세끼를 꼬박꼬박 집밥을 먹여 키워준 엄마 덕분에, 온전히 엄마의 손맛을 먹으며 자랄 수 있었다. 지금에 와서 엄마의 노고가 얼마나 귀하고 큰 고마움인지 알겠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보고싶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는 나다. 이상하게 보고싶다는 말은 엄마에게만 어렵다. 엄마는 내가 제일 처음 떠나온 주소여서, 어쩌면 한번도 보고싶지 않은 적이 없어서, 왠지 보고싶다고 말하면 나 썩 잘 못 지낸다고 들킬 것 같아서 보고싶다는 말을 못하겠다. 그래서 표현하기 버거운 그리움이 감당이 안 될 때면 시간을 짜내 엄마가 해줬던 음식을 흉낸 낸다. 요리하는 시간을 오로지 엄마 생각으로 채우며 그리움을 다독이고 위로한다. 그리고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마음을 요리 사진에 담아 엄마에게 보낸다. 나 이제 꽤 잘 한다고, 이렇게 잘 먹고 잘 지낸다고, 그러니 내 걱정은 하지 말라고 말이다. 우리는 요리 사진 속에 담긴 서로의 마음을 읽어내며,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그리움과 사랑을 맛으로 전한다. 이게 우리 모녀만의 애정 표현이자 대화 방식인 셈이다.

요리가 좋다. 시간과 정성이 들어가야 하고 재료를 준비하는 것부터 설거지까지 때로는 번거롭고 귀찮기도 하지만, 그 모든 수고와 노력을 견딜 만큼의 뿌듯함이 있다. 식재료를 씻고 다듬고 썰고 불 앞에서 정성껏 음식을 만드는 그 모든 과정이 소중하다. 누군가를 위해 정성스레 차린 밥상이든 퇴근 후 나를 위해 만드는 소박한 한 그릇이든, 요리에는 '오늘도 잘 살아냈다'는 다정한 마음과 따뜻한 위로가 깃들어 있다. 그래서 더 애틋하고, 그래서 더 좋다. 


썸네일 BY 이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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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ang Geulb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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