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인슐린
냉장고 서랍을 연다
아버지가 약병을 몰래 꺼내신다
췌장이 무너지던 날
아버지는 술을 끊고 병들엇다
투명한 병 속
호르몬 한 방울
시간은 이슬에 묶여
깊은 어둠 속으로 숨어들엇다
손때 묻은 혈당 수첩이
병실 바닥에 떨어질 때
힌 방울 인슐린이
정맥의 강을
술 대신 흐른다
어두운 병실 창가에
안개꽃처럼 맺힌 시름
이 독한 술을
어찌 혼자 다 마시리오
이 독한 아픔을
어찌 혼자 감당하리오
시린 밤을
함께 나누려 왔건만
병실의 하얀 벽도
이웃 병상의 그림자도
그 식어버린 밤에는
아무것도 믿겨지지 않앗다
그저 한숨을 가슴에 묻고
빛바랜 복도를 걸엇을 뿐
걱정의 벽은 너무 얇아
한숨소리 하나에
달빛이 강물처럼 흔들리는데
나는 눈물 따위는
보따리에 묶고
긴 복도를 헤치고 들어왓다
두꺼운 밤의 유리창에
두루미처럼 기대신 아버지
그 무거운 슬픔을
가늘어진 다리로 어찌 버티셧을까
아픔의 무게에 눌려
병상에 두루마리처럼 접힌 아버지
눈물젖은 베개에 몸을 기대고
잠시라도 진통을 잊으셧을까
울어도 울어도 못 우는 소리가
아버지 목젖을 조일 때
유리병에 갇힌 달빛은
그림자의 소용돌이에 사라진다
휠체어에 허리 굽힌 아버지
당뇨의 강을 한 방울씩 건넌다
주사바늘 끝에 맺힌 이슬엔
한평생의 무게가 실려 잇건만
아버지의 삶은 왜 그리도 얇앗을까
한방울 별이
맥박에 녹아내리는 순간
쨍그랑~
녹슨 호미와 낡은 삽을
저린 손목이 떨어뜨렸다
곰팡이가 핀 지팡이가
아버지의 땅에 꽂혓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듯
가난을 심은 땅엔 가난만 자라난다
가난의 뿌리는
파도 파도 끝없이 깊어
손끝이 땅에 닿을 때쯤
아버지는 그 땅의 뿌리가 되셨다
고향의 흙을 땀으로 씻어내도
검은 때국은 쉽게 빠지질 않네
가난의 죄값으로 이역에 밀려나
불법체류자로 철근을 뽑던 손
뼈마디마다 타국의 서러움이 스며들어
노가다로 콘크리트를 으깨던 손
그 손으로 주사기를 잡고
그 손으로 별빛을 적신다
손바닥 굳은 살에
피멍은 말라붙엇건만
운명의 그늘에 갇힌채
아버지는 남쪽 땅에서
허구헌 날 땅만 팟다
기울어진 항아리에 자식농사 심으려다
무릎과 허리에 디스크를 심으신 아버지
꿈이라는 노다지를 맨손으로 파려다
거품과 피만 건져내고
결국 두 손으로 당뇨를 파낸 아버지
세상은 갈고리에 걸린 낫처럼
허공에 날카롭게 걸려잇네
밤이 깊어지면
메밀꽃은 별이 된다
검은 땅 위에 떨어진
슬픈 은하수 하나
발걸음 조심히 놓아야
꽃별이 흩어지지 않는다
메밀꽃 밭에 서면
시간이 한 발 느려진다
꽃잎 사이로 부는 바람이
모든 걱정을 데려간다
메밀꽃 피던 그 들판에서도
아버진 이미
그때부터 아프셧을까
그렇게도 고단하여
흰 담요로 얼굴을 가려야만 햇을까
당신의 콩팥은 메마른 우물처럼
뿌리부터 썩어 검어졋다
한 방울 이슬이
혈관 깊이 스며들 때
아버지 세상은 고요히 숨을 죽인다
바늘 끝에 동동 매달린
투명한 은하수
쏟아질 듯 쏟아질 듯
결국 한방울도 떨어지지 않네
온 생을 웅크린채
눈물을 부둥켜안은 아버지
투석 기계 소리는
세월을 갉아먹는 톱니바퀴
그 소리에 몸을 맡기고
한많은 세월을 견디신 당신
시간의 흐름에 실려
속으로만 우는 강물
백 년 쓸개보다 쓴 맛이
콩팥 패인 자리에 맺혀
피를 한바퀴 돌려씻고
멍든 가슴속을 토해낸다
아프다고 아프다고 말하소
꾹 참지 마소
사람 죽는 일이 이리 바쁠줄
내 정마 몰랏네라
아버지 강이 흘럿다
아버지 강이 마른다
그 강에 호르몬 한방울 떨구엇다
그 강에 인슐린 한스푼 풀엇다
물살이 급기야 가늘어질 때
나는 눈물을 보따리에 묶으리
이윽고 해가 지면 나는
녹슨 주사바늘도 거두리
약병은 투명한 서랍에 치우리
유언은 빈 일기장에 적으리
아버지 혈관에 박힌 가시
송두리채 뽑아내리라
아버지의 밤을 비석에 파묻고
아버지의 뼈를 뼈함에 안으리
내 하얀 복도를 걸어
내 몸에 박힌 가시별까지 뽑아내면
아픔도 흔적도 이 세상에서 사라지리
창가에 흐릿한 인슐린 병
밤새 별 하나 삼키지 못햇다
냉장고 서랍에 갇힌 인슐린 한알
병든 시간 한 조각
작은 관에 시간을 밀봉햇다
유통기한이 지난 아버지 유품
다 쓰지 못한 투명한 순간이
어두운 구석에 숨어 잇다
췌장이 무너지던 그 날
아버지는 술을 끊고 병들엇다
아버지의 마지막 한숨이
작은 유리병에 갇혀
냉장고 서랍에 들어갓다
냉장고를 열 때마다
아버지의 흔적이 스민다
아버지의 인슐린을
내 덜 아문 흉터에 쏜다
유효기가 지낫어도
그리움의 효능은
여전히 이슬처럼 고인다
눈물을 투석한다
이슬이 반짝인다
투명한 은하수가
내 흐린 피를 맑게 한다
냉장고 문이 열리면
아버지가 몰래 별빛을 푼다
냉장고 벽을 닫고
내가 또 그리움을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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