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분

천평의 접시에
시간의 분동을 쌓는다

빛의 떨림
그림자가 비스듬히 기운다

계절의 바늘이
가을의 눈금에 꽂혔다

여름의 마지막 그늘이
지붕을 따라 흘러내릴때

한 장 낙엽이
가을의 빗장을 밀어올린다

굴뚝의 한숨이
하늘을 흔들어 깨우니
가을빛이 우수수 쏟아진다

푸르름이 흩어진 산마루엔
석양이 붉은 숨결을 불어넣는다

떠나기로 마음 먹은 순간
가을은 이미
발 밑에 이별을 깔아놓았다

가을 바람에 실려 온
아련한 작별이여

허리 휜 낫이
벼이삭의 마지막 숨을 베는 동안

하늘은 물로 빚은 배낭을 메고
떠날 길을 서두른다

수많은 밤
달빛의 상처에는
시간의 주름을 타고
가을비가 고인다

서리 낀 아침
홀로 선 들국화

그림자가 진흙에서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지 못할때
가을은 먼길을 나선다

흩어져야 빛나는 계절의 이치
꽃은 왜 스러져야만 할까

사랑이 만발했던 자리에
시든 꽃잎만 흩날릴 뿐

철없는 미련도
가을바람에 부서져
한조각 낙엽으로 녹아내렸네

덧없는 세월이 발밑에 쌓여
벌써 이곳에 서 있구나
어느새 이렇게 왔네

여름밤 꿈을 주머니에 구겨넣었더니
한여름의 불씨가
잿더미로 타올랐네

가을 바람에 낙엽 타는 냄새
한 줄기 연기
가을은 제 갈 길을 간다

마을을 감돌던 시냇물
메마른 우물로 스며들고

땅에 파묻힌 김치움도
한줌 흙으로 돌아갔네

모든 걸 제 자리로 되돌리는
한자루 가을의 마법

허공을 흔드는 그네
별빛에 매달린 둥근 추

달이 그림자를 삼키는 밤
인연의 매듭 풀리니
가을빛이 밤하늘에 흩어진다

계절이 스쳐가고
바람은 다시 분다

낙엽의 등에 실린 가을
그리움의 무게가
땅속으로 스며든다

돌릴수 없는 철든 시간
어디가 끝이란 말인가

조각난 시간의 파편
낙엽에 바람을 꿰어
하늘과 땅을 바느실로 깁는다

가을은 흔적만 남기고
소리없이 물러서는 계절

날개 부서진 여름 나비
다음 생을 날기 위해
번데기 속에 웅크렸다

뿌리 깊은 나무는
뿌리의 향을 찾아
땅 속으로 길을 넓힌다

한알 초심은
흙속에 남아

서리 내린 빈 들판에도
다시 피어날 씨앗이 잠들었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
가을밤 별처럼 빛나네

가을이 가면
겨울이 분명 온다지만

이슬은 서리가 되고
비는 눈이 될 뿐

알맹이는 그대로
겁데기만 바뀔뿐

사계절의 고리를 따라
물이 한 바퀴 돌면

그리움의 한가운데서도
봄을 기다리는 법을
전생에 이미 알고 있었겠지

가을 앞에 섰네
가을이 앞에 섰네

거울 앞에 섰네
거울이 앞에 섰네

가을이 다가올수록
봄은 더 가까워지네

꽃 지던 자리에
한떨기 데자뷰가 피어오르네

낙엽 진 흉터 위로
새순이 돋아나려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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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수(朴文寿)

고향의 봄이 그리운 타향살이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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