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범의 등에 올라타서
—김경화의 장편소설 《눈부신 날들》의 출간에 부쳐
리은실
김경화의 첫 장편소설 《눈부신 날들》을 들자마자 이틀을 꼬박 읽어내려갔다. 중간중간 뛰여들어가 맞아요, 맞아요, 우리 마을에도, 나 아는 사람 중에도 하며 자꾸 작가에게 말을 걸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의 작품을 '명작'이라 개여올리는 것은 김경화 작가 본인도 달가워하지 않을 테고 말하는 나도 낯뜨거운 일일 것이다. 그저 그가 소곤대는 매 하나의 이야기에 정신없이 빨려들어갔고 빨리 다 읽고 책장을 덮고는 내 이야기를 쏟고 싶어졌다.
그녀는 친절한 이야기군이였다. 대단히 처참하거나 대단히 렵기적인 이야기를 하려 하지 않았다. 정말 꼭 반드시 그 시간에 그 자리에서 일어났을 법한 이야기들을 조용히 들려주었다.
소설은 할어버지, 할머니가 일가를 거느리고 조선에서 강을 건너 중국으로 오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어른 주먹 만한 감자가 달리고 하루 세끼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북간도를 향해 그들은 희망에 부풀어 살던 곳을 등지고 떠난다.
그들은 죽음을 념두에 두지 않은 것이 아니였다. 북간도를 오로지 금노다지판인 줄로만 알고 떠난 걸음은 아니였다. 가는 길은 험하고 그곳에 도착해서도 갖은 어려움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결연히 길을 떠난 것은 너무나 춥고 배고팠기 때문이였다. 그렇게 실낱 같은 희망을 품고 떠난 길에서 어린 딸은 강물에 쓸려가고 안해는 성난 말의 발길질에 밟혀 죽는다. 남은 것은 어린 두 아들뿐, 할아버지는 막내 아들을 한족에게 주고 일곱 살 난 아들 하나만을 남기고 화룡시 송림촌에 터를 잡는다.
소설 속 '나'는 그런 아버지에게서 늦둥이 막내딸로 태여난다. 아버지는 고만고만한 처지의 녀자를 만나 아이 열을 낳으면서 근근득식으로 살아간다. 필연인지 다행인지 열명 중 네명이 남아 그들 부부 삶의 희로애락이 된다.
소설은 격변의 80, 90년대를 많이 다루고 있다. 이민 2세, 3세로 태여난 아이들은 누구라 할 것없이 째지게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며 그 속에서 우정을 키우고 사랑을 나누고 가끔 싸우며 제 몫의 인생을 살아내기에 바빴다.
가난하고 조용하기만 했던 산간마을에도 개혁개방의 봄바람이 불어와 누구네는 송이버섯을 따서 팔아 한해에 만원 넘게 벌었다느니, 누구네는 목재실이로 돈을 벌어 벽돌집을 지었다느니 또 누구네는 검정귀버섯 재배로 목돈을 벌었다느니 하며 "울타리 안에 갇힌 닭처럼 조용히 살아오던 송림촌 사람들은 바깥을 내다보며 술렁이기 시작했고 마음이 붕 뜨기 시작했다".
조용히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젊은이들은, 특히나 처녀들은 고개 넘어 도회지의 삶을 동경하며 지긋지긋한 농촌을 벗어나려 했다. 농민들보다는 처지가 나아보이는, 그래도 꼬박꼬박 월급이 나오는 린근 마을 공장의 총각들을 흠모하고, 시내에서 장사를 한다는 총각들을 넘보며 욕심은 커간다.
총각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시내에 가서 장사길을 알아보고 돈 될 만한 일들을 찾아 하느라 바빴다. 급기야 담이 좀 큰 사람은 집조를 저당잡히고 돈을 꾸어서는 어선을 타고 먼 바다로 나가기도 한다.
조용한 변화의 바람은 이내 돌풍을 몰고 온다. 누구는 청도로 갔다 하고 누구는 또 로씨야로 간다고 하고 또 누구는 한국에 위장결혼으로 시집을 간다고 한다.
그 과정은 순탄치만은 않다. 고기잡이 배를 타고 고생하여 번 돈으로 다른 꿈을 꾸며 장사를 벌이지만 이내 홀랑 날려버리기도 하고, 조용히 가진 것에 만족하며 살던 젊은 부부는 리혼을 하고 단란한 가정이 깨지기도 한다.
돈 앞에 우정은 빛이 바래고 사랑은 람루해져간다.
그래도 월급 타는 로동자가 제일이라고 했던 시대는 어느새 저물고 장사 하는, 돈 잘 버는 약삭바른 남자가 최고라고들 한다. 세상은 급변하고 있었다.
변화의 물살을 타고 주인공 금화는 연길로, 로씨야로, 청도로 떠돌며 고군분투한다.
'후남언니'는 가짜 리혼을 하고 위장결혼으로 한국에 갔다가 다시 또 거기에서 새로운 남자를 만났지만 그동안 모아둔 돈을 홀랑 잃고 만다. 후남언니는 다시 일어설 거라며, 이미 이렇게 한국에 나온 바하고는 돌아갈 수 없다면 입술을 깨문다. 작가는 그런 후남언니를 보며 "언니는 이미 달리는 범의 등에 올라 탄 거나 다름 없다"고 했다.
어쩌면 그 시기 모두는 달리는 범의 등을 타고 있지 않았나 싶다. 불안했고 막연했을 것이다. 가는 곳이 어딘지는 알 수 없으나 일단 달려야 했다. 그런 시대였다.
내가 소학교를 다니던 시절, 그 때쯤 마을에는 한국으로 시집 가는 언니들이 여럿 있었다. 또래끼리 무리를 지어 자전거를 타고 꺄르르 웃으며 영화관으로 달려가던 그 언니들 중 몇이나 한국 남자에게 시집을 간다고 했다. 그중 한 언니는 이웃집 룡철(가명)이 오빠랑 그렇고 그런 사이임을 코흘리개인 나도 아는 터였다. 그런 언니가 어느 날, 다리를 심하게 저는 중년의 사내를 데리고 왔다. 그 언니보다 열한 살이 많다고 했다.
그 언니가 시집을 가고 룡철이 오빠도 고기잡이배를 탔을 것이다.
또 작은오빠의 소꿉친구기도 했던 해연(가명)언니는 밀입국하여 한국으로 갔다고 했다. 마을 아주머니들이 수런거리는 말에서 밀입국이란 대단히 위험한 것임도 알게 되었다. 배를 타고 홍콩, 태국을 통해 가는데 들킬가 봐 짐짝처럼 지하실에 숨어서 한달을 가야 한다고 했다. 그 안에서 오줌똥을 싸기도 하고 밥도 먹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다 가는 도중에 죽는 일도 있다고 했다.
무시무시한 말들 뿐이였다. 아니다. 그런 말들 속으로 누구네는 시내 간 딸이 돈을 보내와 랭장고도 사고 집도 새로 지었다는 희망에 부푼 말들도 있었다.
얼마 안되여 우리 집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엄마는 5전 리자로 꾼 돈으로 수속을 했고 그렇게 해서 두 오빠는 일본으로 갔다. 나날이 뛰는 리자와, 타지에 있는 오빠들 걱정으로 엄마는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나는 가끔 자기 감상에 젖어 모두가 가난했지만 정이 넘쳤던 그 시절을 아름답게 추억할 때가 있다. 소설을 읽고 가책을 느낀다.
시간이라는 필터를 거치고나면 힘겨웠던 기억들이 대개 몽롱해지고 좋았던 아련한 추억만 남기도 하지만 내 바로 웃세대가 겪었던 그 혼돈의 세월과 힘들었던 인생살이를 내가 너무 과소평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절은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혼란스러웠고 불안했고 고달팠다.
외사촌언니는 대학에 입학했지만 농촌에서 농사로 자식 뒤바라지 했던 이모와 이모부는 딸의 대학학비를 마련할 수 없었다. 밑으로는 또 고중에 입학해야 할 작은 딸이 있었던 것이다. 언니는 결연히 일본 류학을 선택했다. 일본에 가면 아르바이트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 아르바이트 한 돈으로 학비도 낼 수 있고 대학공부도 할 수 있다고 했다. 언니는 리자돈을 꾸고 류학길에 올랐다.
언니 나이 열아홉살이였다.
언니는 몇번이나 집에 전화를 걸어와 울었고 이편에서는 이모가 속수무책으로 전화기를 들고 울었다.
막무가내였다. 농사를 해서는 돈이 나오지 않았고 부지런했지만 어찌할 수가 없는 이모부는 한숨만 땅이 꺼져라 내쉬였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밑에서 마른 풀잎을 뚫고 올라오는 푸른 빛들이 우야우야 아우성치고 있었다"라고 끝맺은 소설의 결말은 조금 희망적이다.
김경화 작가는 처절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을 좀더 비극적으로 묘사하지 못한 것에 유감이 있는 듯 했다.
그러나 나는 이로써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월경을 하여 이 이국땅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내디디는 걸음 하나하나 쉬웠던 적이 없었지만 그들에게는 희망이 있었다. 아들 낳아서 그 아들 하나 출세하는 걸 보고 싶었던 소박한 희망, 사랑하던 련인을 내치고 뛰쳐나갔지만 앞날은 조금더 윤택해질 것이라 믿었던 벅찬 희망… 그 희망이 그들을,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다 주지 않았을가? 달리는 범의 등에 올라타 어디로 갈지도 모른 채 달렸지만 분명 앞에는 더 좋은 곳이 기다릴 것이라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모든 것은 가장 훌륭한 배치였을 것이다. 돌고 돌아 선을 이룬 것이리라. 미약하나마 그 희망 하나 동아줄처럼 부여잡고 그들은, 우리는 질긴 생명력으로 여기까지 왔다.
남의 소설을 빌어 내 이야기를 주절주절 끝도 없이 풀어내고 싶은 걸 보니 아직 그 소설에서 헤여나오지 못한 것 같다. 그 시기를 살아낸 모든 이들에게 따뜻한 위로가 될 소설 《눈부신 날들》을 정중히 추천한다.
희망을 안고 달렸던 지난 날들은 모두 눈분신 날들이였을 것이다, 그리고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달린다면 분명 눈부신 날이 올 것이리라.
